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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평점 :
백희성 작가의 『기억의 무늬』는 사람을 얼굴이 아니라 감각과 흔적으로 기억하는 청년의 이야기다. 안면인식장애를 지닌 주인공이 부모의 죽음에 얽힌 오래된 사건을 다시 좇는다는 소개에 끌려 책을 펼쳤다. 작가의 전작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한몫했다.
파리의 패션학교에 다니는 스물두 살 카미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신 목소리와 걸음걸이, 옷감의 질감과 냄새 같은 감각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세 살 때 부모가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한 뒤 생긴 안면인식장애, 그리고 그날 손끝에 남은 옷감의 촉감은 카미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단서다. 19년이 지나 카미는 그 기억을 붙들고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어 사람들의 눈, 코, 입이 마치 물결처럼 흔들려 보일 뿐이다.”
카미를 읽으며 데이비드 발다치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나오는 에이머스 데커가 떠올랐다. 둘 다 남다른 지각 방식을 지녔고,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은 정반대다. 모든 것을 잊지 못하는 데커가 기억을 되짚어 논리적으로 추리한다면, 카미에게 남은 것은 세 살 때의 파편적인 촉감이다.
데커의 기억이 수사의 무기라면 카미의 촉감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증명할 수 없는 믿음에 가깝다. 한 사람은 기억으로, 다른 한 사람은 감각으로 진실을 좇는다. 두 인물을 나란히 떠올리며 기억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다르게 펼쳐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기억의 무늬』가 독특한 점은 눈이 아닌 손끝으로 사건을 읽어 간다는 데 있다. 카미는 얼굴과 표정보다 옷과 가구에 남은 흔적을 단서로 삼는다. 패션학교를 배경으로 직물과 옷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특히 소설의 첫 문장이 오래 남았다.
“천은 수만 가닥의 실이 짜여 태어난다. 그리고 그 천들을 잇대어 옷을 완성하는 것은 바늘이 끌고 간 가느다란 실의 흔적이다.”
옷이 실의 여정을 따라 완성되듯 사건의 진실도 흔적을 따라 드러난다는 암시처럼 읽혔다. 제목의 ‘무늬’ 역시 옷감에 새겨진 결인 동시에, 기억과 시간이 겹쳐 만들어 낸 흔적처럼 느껴졌다.
카미는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표정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미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좋을 때와 나쁠 때 슬플 때조차 얼굴에 변화가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 가슴은 분명 감정에 따라 요동친다. 단지 얼굴로 표현되지 못할 뿐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도 얼굴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이 작품에서 안면인식장애는 추리를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지 묻는다.
신입생 시절 봉사활동을 떠올리는 장면도 인상 깊다.
“가장 행복한 순간 그들은 세상에 소란을 끄고 조용히 내면의 침묵과 마주했다. 외부의 빛이 차단된 곳에서 비로소 등불이 켜지는 것이었다.”
보는 감각이 닫힌 자리에서 다른 감각이 열릴 수 있다는 생각은 카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소설에서 가구와 직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사건의 단서이자 기억을 담아 두는 그릇이다. 건축가 출신인 작가의 시선은 공간과 사물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아기 침대와 엄마 의자, 커튼 같은 물건이 사건의 의미를 바꾸는 장면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듯, 엄마의 향기를 입히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천 조각을 조그맣게 잘라 아기 침대와 엄마 의자 사이에 끼워놓고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범인을 찾는 여정은 한 가족의 사랑과 상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오래된 가구가 간직한 것은 나무의 무게만이 아니라 누군가 가족을 지키려 했던 마음이다. 사물이 사랑의 흔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정서를 잘 보여 준다.
카미의 안면인식장애와 촉각 중심의 추리는 참신하다. 부모를 잃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다시 파헤쳐 가는 과정에도 관심이 갔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의 긴장감이 기대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가족을 둘러싼 사랑과 상실의 감정은 잘 살아 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옅어지는 점은 아쉬웠다.
소설을 다 읽은 뒤에는 내가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하는지 생각했다. 얼굴이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손에 닿던 감촉이나 옷에 배어 있던 냄새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카미의 안면인식장애를 독특한 추리 장치로만 보았지만, 읽을수록 이 설정은 ‘타인을 안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얼굴은 한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옷을 고르는 취향과 걸음의 속도, 손에 밴 습관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쌓여 있다.
카미의 세계는 불완전해 보이지만, 그가 흔적을 읽는 방식은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졌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감정에 따라 다시 짜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흔적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카미의 모습은 기억을 읽는 일이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임을 보여 준다. 기억의 무늬를 읽는 일은 과거를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