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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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과 해양 세력상이에 위치한 반도의 나라라는 지리적인 여건상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은 우리나라이나 역사적으로 위기 때마다 마법처럼 영웅이 등장하곤 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침체되어가는 한국문학 시장을 속된말로 멱살을 잡고 끌고 가고 있는 모양세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한 달 정도 지났지만 서점가에는 아직도 한강 작가들의 책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전시되어 있고 사람들을 서점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소설은 나에게는 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예전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른 소설보다 어렵게 읽은 기억이 있다. 제주 4.3 사건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아픈 현대사를 글과 영상으로만 접했다는 세대라는 어설픈 핑계를 하곤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원서가 한글인 노벨문학상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고른 소설이 희랍어 시간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는 큰 따옴표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물의 대사 없는 것도 아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도 그렇고 희랍어 시간에서도 그랬다. 대사를 눈에 띄게 구분하지 않아서 인지 그만큼 인물의 내면 심리를 더 잘 살필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에서는 문장의 행간의 늘리는 등의 표현으로 글을 읽는 것 뿐 아니라 페이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희랍어 시간은 소리를 잃은 한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자가 말을 잃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15쪽)

 

또 다른 주인공인 남자는 가족을 독일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그 수업에 모르는 외국어로 말문이 트인 적이 있는 여자가 수업을 듣는다. 수업 내내 말이 없는 그녀를 이윽고 그가 의식하게 되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안경을 깨뜨려 앞을 보기 힘든 그를 그녀가 도와주게 된다.

 

희랍어 시간의 불안한 모습의 주인공을 보면서 홍콩의 중국 반환 전의 혼란이 가득 담긴 영화 <중경삼림><타락천사>가 떠올랐다. 양조위 배우의 연기가 주로 생각이 나지만 나에게는 지금과는 다른 홍콩이 담긴 영화로 배우들의 눈빛이 무겁게 느껴진 기억이 남아 있다. 이런 영화 속 등장인물과 비슷한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마주하는 그 찰나의 시간이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욕심일까란 생각도 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한강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 속 그와 그녀의 침묵과 목소리와 체온, 각별했던 그 순간들의 빛을 잊지 않고 싶다. (193쪽) 

 

소설을 읽는 나도 오랫동안 그들이 순간의 빛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소설의 내용과 별도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문장인 희랍어 시간 말미의 한 대목이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끊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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