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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ㅣ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평점 :
요즘은 자신의 본 모습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끼를 표출하는 이른바 ‘부캐’가 유행하고 있다. 작가 특히 소설가에겐 자신이 그린 등장인물이 부캐라고 생각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부캐가 많은 작가도 드물다, 가가형사에서부터 탐정 갈릴레오, 호텔 매스커레이드의 콤비까지 그를 대표하는 작품에는 색감이 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신간소식이 들려오면 찾아보게 되는 작가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런 히가시노 게이고가 최근 새로운 부캐를 등장시켰다. 단발성인 줄 알았는데 벌써 3번째 소설이다.
『블랙쇼맨과 운명의 바퀴』에는 ‘천사의 선물’과 ‘피지 않는 나팔꽃’, ‘마지막 행운’이란 제목의 3편의 중편이 실려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시작에는 작가의 사인과 함께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있어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곁에 두고 싶은 든든한 존재로 거듭난 블랙 쇼맨과 함께 이제 다시 쇼타임. 일생 최고의 즐거움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은 독립적이긴 하지만 전작과 비슷하게 건축사로 일하는 가미요 마요가 물어온(?) 사건을 ‘트랩 핸드’라는 작은 바 마스터이자 마요의 삼촌인 가미오 다케시가 해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짜여 있으니 이제 중요한 건 어떤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이다. 각각의 독립된 사건이라고 했지만 전작인 『블랙쇼맨과 환상의 여자』의 사건과 이어지는 편도 있었다. ‘피지 않는 나팔꽃’편이 그렇고, ‘마지막 행운’편도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 행운’을 제외한 두 편은 묵직한 주제를 그리고 있다. 먼저 이혼을 하고 죽은 남편의 부모에게 임신 중인 태아의 상속권을 주장한 ‘천사의 선물’에서는 '친생자 추정'에 대해 다룬다. 일본 민법에 따르면 친생자 추정은 출산을 하게 되면 출생신고를 위해 아버지를 등록해야 하는데 친모쪽에서 전남편으로 정한다면 전남편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증명을 통해 친부가 아님이 인정되는 제도이다. 우리 민법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과 비슷한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다케시가 특유의 마술사적인 감각으로 사건을 해결하지만 사건 해결과는 별개로 많은 생각을 든 소설이었다,
다음으로 경증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자살을 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딸과의 관계를 그린 ‘피지 않는 나팔꽃’도 많은 생각이 드는 주제였다. 전작 『블랙쇼맨과 환상의 여자』에서 어머니의 집착과 강요를 벗어나 자살을 한 다른 이의 모습으로 살기로 한 나나에와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살한 이를 자신의 딸로 장례까지 치르고 실버타운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스에나가 히사코와의 평생선같은 관계가 다시 다케시와 마요의 도움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딸을 찾는 스에나가씨의 모습에서 길어진 수명으로 인해 대두되고 있는 노인의 치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비교적 최신작인 블랙쇼맨 시리즈에서는 이야기의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소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순한 맛’에 속하는 작품들이 많다. 어쩌면 미스터리의 숨 막히는 상황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밋밋한 전개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따뜻한 힐링소설 같은 내용을 기대한다면 만족스러운 소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난 『용의자 X의 헌신』과 같은 반전 있는 미스터리가 더 ‘히가시노 게이고’스럽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