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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평점 :
품절
케빈 베이커의 6단계 법칙(Six Degrees of Kevin Bacon)이란 것이 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최대 6단계 이내에 서로 아는 사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A와 B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A가 C를 알고 C가 D를 알고 D가 B를 알고 있다면 A와 B는 3단계 만에 연결되는 셈이다. 요컨대 지구의 어떤 사람도 최대 6단계를 거친다면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나의 지인들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맞다면 거대한 지구가 엄청나게 작아 보인다. 게다가 요즘은 SNS의 발달로 인해 6명이 더 줄어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따뜻한 편의점 이야기로 유명한 김호연 작가가 이번에는 비디오 대여점이란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소재로 다시 이야기를 펼친다. 『나의 돈키호테』는 방송국 피디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 진솔이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을 무사히 보내게 도와준 ‘돈키호테 비디오’의 사장인 돈 아저씨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 이상 감정이 소모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직장을 뛰쳐나온 진솔은 마음의 고향 대전으로 내려와 하릴 없이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한다.
서른 살 인생 동안 이만한 쉼표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제구실하여 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구실하며 살려다 보니 어느새 망가져버렸고, 제구실 따위 못 하게 됐다. 스스로 멈춰버린 일주일, 그 시간은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였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길가의 쓸모없는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쉼표는 허락되지 않고 제구실을 하려면 어느새 망가져 제구실을 못하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매일 겪고 있을 수 도 있고...
그렇게 보내다 진솔이 선택한 일은 유튜버이다. 지금은 카페가 되어버려 자신이 머물렀던 비디오 대여점 공간이 같은 건물 지하실로 옮겨진 것을 알게 된 진솔은 그곳에서 자신의 추억과 돈 아저씨를 찾는다는 메시지와 함께 첫 방송을 시작한다. 대전에서 시작된 그녀의 여정은 서울과 통영을 거쳐 제주까지 가서 돈 아저씨를 만나면서 끝이 나지만 아저씨과 그녀의 여정은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이어진다.
진솔의 기억 속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갔던 돈 아저씨는 스스로 산초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이 만난 돈 아저씨는 진솔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키호테가 산초가 될 순 있어도 산초가 돈키호테가 될 순 없단다.”
“왜죠?”
“열정이 사라졌으니까. 열정이 광기를 만들고 광기가 현실을 박차고 나가는 인물을 만들거든, 나는 고갈된 열정 대신 현실에 발을 디딘 산초의 힘으로 돼지우리를 만들고 하몽을 염장할 거란다. 어른 진솔은 이제 아저씨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는다.”
고갈된 열정 대신 현실에 발을 디딘 산초의 힘이라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평생을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키호테처럼 살았던 돈 아저씨의 말을 들은 진솔은 그에게 받은 열정을 다시 돌려줄 차례가 된 것을 느끼고는 그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전작인 『불편한 편의점』에서도 느꼈지만 김호연 작가의 소설에는 그 지방의 묘사가 뛰어난 것 같다. 진솔의 주무대가 된 대전 선화동의 묘사는 마치 ‘응답하라 OOOO’의 시리즈를 보는 것 같이 2000년대 초반의 거리 묘사가 뛰어났다. 마치 소설을 읽고 그곳을 답사도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우광훈 작가의 『나의 슈퍼 히어로 뽑기맨』이 뽑기 기계가 가득한 대구의 골목을 묘사하고 있다면 『나의 돈키호테』는 비디오와 소설 대여점이 자리한 대전의 한 골목을 정감있게 묘사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옛 골목이 사라지는 요즘 사진과 영상도 좋지만 이런 서사로 그 곳을 기억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