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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2000년에 출간된 백민석의 장편소설이다. 본래 절판된 책이었으나 2017년 한겨레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본작은 '납치', '감금', '강간', '윤간', '살인', '시신 훼손', '시신 유기' 등 온갖 엽기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공포소설이다. 웬만한 멘탈을 가지고는 읽기 힘든 수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백민석은 2003년 절필 선언한 후, 2013년에 복귀하였다. 복귀 후 <공포의 세기>, <수림>, <교양과 광기의 일기> 등을 집필하였는데, <목화밭 엽기전>은 지금 나열된 후기작들이 소프트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다. 백민석만의 스타일이 강하게 새겨진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자면서 그는 잠시 후 깨어났을 때 자신이, 전에 없이 아주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게 되길 바랐다. 한 번 맡으면, 뒈져서 영안실에서 알코올로 염하기 전까진 결코 씻기지 않을. 그 냄새는 회계사가 이 대치동의 삶에선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을, 그런 냄새가 될 것이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으면서도,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엉엉 무서워 울게 될 그런 냄새가 될 것이다." - <목화밭 엽기전>, 66쪽
한적한 교외 전원주택에서 살아가는 대학 강사 한창림과 과외 교사인 그의 아내 백태자. 화목한 교육자 부부인 듯 보이는 그들은 실제론 '스너프 필름(실제 폭력, 살인, 강간 등의 모습을 담아 은밀히 유통하는 필름)'을 만들어 '펫숍'이라는 정체불명의 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한다. 필름의 촬영지는 주택의 지하 창고이며, 배우는 그들 부부와 그들이 납치해오는 미소년이다. 성공적으로 일을 치러온 그들 부부의 다음 타깃은 박태자가 가르치는 학생 윤수영이다. 하얀 피부와 매끈한 몸매를 가진 미소년 윤수영은 스너프 필름의 최대 고객이자 펫숍의 사장인 '삼촌'의 취향에 딱 맞는 배우이다. 한창림은 윤수영을 납치하기 위해 그가 다니는 학교를 돌며 동태를 살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빠뜨릴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소재가 소재인 만큼 수위가 매우 세다. 부부가 스너프 필름을 제작하는 과정(납치, 감금, 고문 등)이 에누리 없이 정밀하게 묘사된다.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이다. '엽기'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싶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이십 대 후반(지금의 내 나이다...)이었던 백민석은 '엽기'와 '괴물'에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가 책을 집필했던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아직은 엽기 코드가 유행했던 시기는 아니었으나(2000년대 초반에 크게 유행했다), 백민석은 이 단어에 묘한 끌림을 느꼈던 것이리라.
국어사전에 따르면 엽기는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님'을 말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문화 코드는 '엽기'였다. 그 당시엔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나도 기억한다. 인터넷을 통해 온갖 엽기 짤을 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똥을 싸거나 토를 하는 장면, 환공포증을 느끼게 만드는 이상한 그림들, 누군가 잔인하게 죽는 장면들이 인터넷에 유행처럼 퍼져있었다(그 당시엔 야후가 대세였고, 기억하기론 아예 야후의 검색 디렉터리에 '엽기' 코너가 있었던 것 같다). 왜 2000년대 초반에 그리도 엽기 코드가 유행하고 있었을까? 아마 세기말, 세기초의 혼란한 분위기와 IMF 사태의 여파가 채가시지 않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인터넷의 발전으로 유입된 말초적인 이미지와 영상들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백민석 본인만의 개성이 만나 <목화밭 엽기전>같은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닐까?
본 책이 나온 지 18년이 지났다. 1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백민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쓰이던 천구백구십 년대 후반에는 '엽기'니 '괴물'이니 하는 말들은 잘 쓰이지 않았고 약간은 낯선 정서에 속해있었다. (중략) 하지만 이제는 도처에서 실제의 괴물들의 모습을 본다."
'성관계 거부하자 마구 때리고 숨지게 한 30대 징역 25년'
'친딸에게 몹쓸 짓 인면수심 40대에 "20년간 전자발찌 부착'
'"안 만나준다" 짝사랑 살해한 40대 1심서 징역 25년'
'신변보호 해지 넉 달 만에 40대 여성 무참히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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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뉴스 사회면에 톱 랭크된 기사들이다. 작가의 말처럼 '한창림'같은 괴물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있다. 그러나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소설 속 대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아내가 이 사회에 끼친 해악이란 엄밀히 말해,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는, 제아무리 용을 써도 사회 체계 안의 내용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괴물스런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물은 장난감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 <목화밭 엽기전>, 261쪽
그렇다. 괴물 하나 없앤다고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진짜 괴물은 '한창림'같은 인물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한창림'은 죽었지만 스너프 필름은 계속 제작될 것이다. '펫숍'이 건재하므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무명의 남편은 죽었지만, 가정폭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명의 남편을 타락시킨 '구조조정'과 가정폭력을 용인하는 '가부장제'는 여전하니까. 결국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만들어낸 사회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상 '한창림'은 도처에서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과 뉴스를 통해 극단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목화밭 엽기전>은 이 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문일지도 모른다.
끔찍하고 기괴하고 참담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재미 하나는 끝내준다. 본 소설의 서브텍스트나 주제의식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내용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공포 스릴러 소설보다 재미있다. 한창림과 박태자의 악행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추리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물론 청소년 및 임산부는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곧 다가올 열대야의 대비책으로 <목화밭 엽기전> 하나 장만해보는 게 어떨까? 적어도 우리가 영화관에서 접할 허접한 공포영화들보단 훨씬 더 강렬한 서늘함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