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0년에 출간된 백민석의 장편소설이다. 본래 절판된 책이었으나 2017년 한겨레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본작은 '납치', '감금', '강간', '윤간', '살인', '시신 훼손', '시신 유기' 등 온갖 엽기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공포소설이다. 웬만한 멘탈을 가지고는 읽기 힘든 수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백민석은 2003년 절필 선언한 후, 2013년에 복귀하였다. 복귀 후 <공포의 세기>, <수림>, <교양과 광기의 일기> 등을 집필하였는데, <목화밭 엽기전>은 지금 나열된 후기작들이 소프트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다. 백민석만의 스타일이 강하게 새겨진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자면서 그는 잠시 후 깨어났을 때 자신이, 전에 없이 아주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게 되길 바랐다. 한 번 맡으면, 뒈져서 영안실에서 알코올로 염하기 전까진 결코 씻기지 않을. 그 냄새는 회계사가 이 대치동의 삶에선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을, 그런 냄새가 될 것이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으면서도,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엉엉 무서워 울게 될 그런 냄새가 될 것이다." - <목화밭 엽기전>, 66쪽


 한적한 교외 전원주택에서 살아가는 대학 강사 한창림과 과외 교사인 그의 아내 백태자. 화목한 교육자 부부인 듯 보이는 그들은 실제론 '스너프 필름(실제 폭력, 살인, 강간 등의 모습을 담아 은밀히 유통하는 필름)'을 만들어 '펫숍'이라는 정체불명의 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한다. 필름의 촬영지는 주택의 지하 창고이며, 배우는 그들 부부와 그들이 납치해오는 미소년이다. 성공적으로 일을 치러온 그들 부부의 다음 타깃은 박태자가 가르치는 학생 윤수영이다. 하얀 피부와 매끈한 몸매를 가진 미소년 윤수영은 스너프 필름의 최대 고객이자 펫숍의 사장인 '삼촌'의 취향에 딱 맞는 배우이다. 한창림은 윤수영을 납치하기 위해 그가 다니는 학교를 돌며 동태를 살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빠뜨릴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소재가 소재인 만큼 수위가 매우 세다. 부부가 스너프 필름을 제작하는 과정(납치, 감금, 고문 등)이 에누리 없이 정밀하게 묘사된다.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이다. '엽기'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싶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이십 대 후반(지금의 내 나이다...)이었던 백민석은 '엽기'와 '괴물'에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가 책을 집필했던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아직은 엽기 코드가 유행했던 시기는 아니었으나(2000년대 초반에 크게 유행했다), 백민석은 이 단어에 묘한 끌림을 느꼈던 것이리라. 


 국어사전에 따르면 엽기는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님'을 말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문화 코드는 '엽기'였다. 그 당시엔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나도 기억한다. 인터넷을 통해 온갖 엽기 짤을 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똥을 싸거나 토를 하는 장면, 환공포증을 느끼게 만드는 이상한 그림들, 누군가 잔인하게 죽는 장면들이 인터넷에 유행처럼 퍼져있었다(그 당시엔 야후가 대세였고, 기억하기론 아예 야후의 검색 디렉터리에 '엽기' 코너가 있었던 것 같다). 왜 2000년대 초반에 그리도 엽기 코드가 유행하고 있었을까? 아마 세기말, 세기초의 혼란한 분위기와 IMF 사태의 여파가 채가시지 않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인터넷의 발전으로 유입된 말초적인 이미지와 영상들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백민석 본인만의 개성이 만나 <목화밭 엽기전>같은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닐까? 


본 책이 나온 지 18년이 지났다. 1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백민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쓰이던 천구백구십 년대 후반에는 '엽기'니 '괴물'이니 하는 말들은 잘 쓰이지 않았고 약간은 낯선 정서에 속해있었다. (중략) 하지만 이제는 도처에서 실제의 괴물들의 모습을 본다."  


'성관계 거부하자 마구 때리고 숨지게 한 30대 징역 25년'
'친딸에게 몹쓸 짓 인면수심 40대에 "20년간 전자발찌 부착'
'"안 만나준다" 짝사랑 살해한 40대 1심서 징역 25년'
'신변보호 해지 넉 달 만에 40대 여성 무참히 피살'
...


어제오늘 뉴스 사회면에 톱 랭크된 기사들이다. 작가의 말처럼 '한창림'같은 괴물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있다. 그러나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소설 속 대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아내가 이 사회에 끼친 해악이란 엄밀히 말해,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는, 제아무리 용을 써도 사회 체계 안의 내용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괴물스런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물은 장난감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 <목화밭 엽기전>, 261쪽


그렇다. 괴물 하나 없앤다고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진짜 괴물은 '한창림'같은 인물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한창림'은 죽었지만 스너프 필름은 계속 제작될 것이다. '펫숍'이 건재하므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무명의 남편은 죽었지만, 가정폭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명의 남편을 타락시킨 '구조조정'과 가정폭력을 용인하는 '가부장제'는 여전하니까. 결국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만들어낸 사회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상 '한창림'은 도처에서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과 뉴스를 통해 극단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목화밭 엽기전>은 이 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문일지도 모른다.     


끔찍하고 기괴하고 참담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재미 하나는 끝내준다. 본 소설의 서브텍스트나 주제의식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내용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공포 스릴러 소설보다 재미있다. 한창림과 박태자의 악행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추리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물론 청소년 및 임산부는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곧 다가올 열대야의 대비책으로 <목화밭 엽기전> 하나 장만해보는 게 어떨까? 적어도 우리가 영화관에서 접할 허접한 공포영화들보단 훨씬 더 강렬한 서늘함을 제공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만이 쓸 수 있는 '진짜'연애 이야기" - <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가 돌아왔다(사실 작품을 워낙에 빨리 내서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하다). 신작의 제목은 <연애의 행방>. 사회파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력을 돌아볼 때, 연쇄 데이트 폭력 사건을 추적하는 고독한 형사의 모습이라든지 행복의 절정에서 갑작스레 실종된 연인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 등이 떠오르겠지만, 이번엔 아니다. <연애의 행방>은 무려 연애소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보이는 '로코'는 어떤 모습일까?  본 소설의 배경은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다. 이곳을 무대로 '무센스 초식남' 히다, '플레이보이' 미즈키, '미숙한 바람둥이' 고타, 그런 고타의 동거녀 미유키와 순정녀 모모미 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애증의 로맨스를 펼친다. 스키장을 무대로 한 만큼 소설은 설원의 깔끔하고 순수한 이미지와 활강하는 스노보더들이 내뿜는 활기와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여러모로 로맨스와 어울리는 장소랄까? 실제로 스키장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를 '겔렌데 마법'이라고 하는데, 설원의 분위기가 단점은 가려주고 장점은 부각시켜주기 때문에 생기는 법칙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겔렌데 마법'에서 착안하여 이 소설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본인이 스노보드 마니아인 점도 한몫했겠지만.


  <연애의 행방>은 또 다른 특징은 본 책이 여덟 개의 작은 이야기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라는 점이다. 첫 단편인 '곤돌라'의 주인공들이 세 번째 단편 '프러포즈 대작전'에서 나오는 등 각 이야기들이 연결성을 지니며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스토리는 우리가 그간 보아온 로맨틱 코미디와 유사하다. 바람둥이가 내연녀와 스키장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곤돌라에서 자신의 정부를 마주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든지(곤돌라), 친구들끼리 완벽하게 프러포즈 작전을 짜놓았는데 갑자기 등장한 상대방의 전 남자친구로 인해 작전이 꼬여버린다든지(프러포즈 대작전), 이처럼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연애의 희비극을 소재로 한다. 다만 이 소설이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와 다른 점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인 추리소설 기법과 예기치 못한 반전이 적재적소에 양념처럼 뿌려져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본 소설은 뻔할듯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다.


"사랑에 빠지는 '마법'앞에서는 누구나 조금은 한심해지기 마련!"


본 소설의 뒤표지에 적혀있는 문구이다. 본 소설에는 사랑에 빠져 한심해지는 캐릭터들이 나온다. '한심'에도 종류가 있는데, 가장 한심한 것은 역시 사랑에 눈이 멀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일 게다. 과연 본 소설에서 그런 캐릭터들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꼭 확인해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단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김탁환 작가의 장편소설 <거짓말이다>. 지난 2016년 8월에 출간된 이 책은 '2016년 서점 직원이 뽑은 올해의 한국소설', '제33회 요산김정한문학상'에 수상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역사물과 추리물을 혼합한 '팩션추리물'을 주로 써오던 김탁환 작가가 본격 사회소설을 집필했다는 것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심도 있게 다뤄지지 않았던 '민간 잠수사'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거짓말이다>는 "포옹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의 공간에서 목숨을 걸고 사자를 인도하는 민간 잠수사의 이야기"를 최초로 다룬 소설이었다. 그리고 김탁환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한 사람이 있다. 바로 故 김관홍 잠수사이다. 오늘 소개할 김탁환 작가의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는 <거짓말이다>의 집필 노트이자, 정의로운 사나이 故 김관홍 잠수사와의 인연을 추억한 회고록이다. 


 김탁환 작가의 에세이(제작노트)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는 일자별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은 작가가 故 김관홍 잠수사를 처음 만난 2016년 3월 2일이다. 작가가 처음 그를 만난 곳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녹음실이었다. 녹음은 무려 4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故 김관홍 잠수사는 사건 현장에서 민간 잠수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불합리를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눈물을 쏟아가며... 김탁환 작가는 그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에게 장편소설 하나를 같이 써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편 작가가 주인공을 만드는 방법이 세 가지쯤 돼. 하나는 완전히 허구로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살아 낸 인물을 역사 속에서 찾아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지. 이 두 가진 흔히 쓰는 방법이야.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작가로 사는 동안 평생 있을까 말까 해. 인생의 선물인 셈이지. 그게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주인공이 작가를 찾아오는 경우야. 작가는 가만히 있는데, 주인공이 뚜벅뚜벅 다가오는 거지. 자기가 주인공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야."
- 본문 253쪽, 김탁환 작가의 말  


그렇다. 그는 김탁환 작가에게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자신이 주인공인 줄도 모른 채.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는 세월호 사건의 감춰진 진실이나 민간 잠수사의 고통을 고발하기 위해 집필된 책은 아니다. 이런 내용은 장편소설 <거짓말이다>에 자세히 담겨있다. 본 에세이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끝내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故 김관홍 잠수사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편지이자 고백록이다. 물론 <거짓말이다>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담겨있다. 본 책에는 김탁환 작가가 소설 집필을 위해 참고한 다양한 기사들이 소개되어있다, 독자들은 이 기사들을 통해 세월호 사건 이면에 감춰진 진실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책의 핵심은 故 김관홍 잠수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질문, 그가 왜 바다로 떠났는지, 그리고 다시 육지로 온 후 얼마 안 있어, 왜 하늘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대답이다.  


 사건 이후, 그리고 다시 육지로 올라온 이후 故 김관홍 잠수사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물속에서의 끔찍한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또한 사랑하는 자신의 세 남매조차 만질 수 없게 만들었다. 육지에서는 어떠했는가. 자신과 함께 바닷속에서 생사를 함께한 공우영 잠수사는 국가로부터 살인자로 몰려 재판에 가있었다. 그 자신도 잠수병으로 인해 더 이상 잠수를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을 잊었고, 거짓 정보에 속아 유가족과 민간 잠수사를 돈벌레로 매도했다. 그는 이런 괴로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민간 잠수사의 억울함을 풀고, 유가족을 돕고,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의 일종으로 그는 김탁환 작가를 도왔고, 박주민 의원을 도왔고, 각종 청문회와 언론에 나가 목소리를 냈다. 세월호 2주기엔 비가 많이 와 광화문에 사람이 많이 안 올까 걱정하다가, 광화문 광장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자 어린아이처럼 빗속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그렇게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왔던 그였으나,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님! 언제 가장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줄 아십니까? 지금처럼, 어둠이 깔리면서 비가 쏟아지는 저녁입니다. 지상에 있지만 수중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일죠. 그리고 순식간에 배 밖에서 배 안으로 위치를 옮깁니다. (시신을) 품에 안고 나올 때, 그 무게와 감촉을 선명하게 느낍니다. 제가 데리고 나온 아이의 얼굴이 연이어 떠오릅니다. 아, 그땐 정말 죽고 싶더라고요." - 본문 250쪽, 故 김관홍 잠수사의 말 


故 김관홍 잠수사가 세상을 떠난 후, 세상은 많이 변화했다. 그의 바람대로 세월호는 인양되었다(물론 한참 늦었다). 장편 소설 <거짓말이다>도 무사히 출판되었다.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 당시 패악질을 일삼았던 정부가 몰락했다. 이 모든 장면들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기억할 수 있다. 본 책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에 그의 생각과 정신이 담겨있다. 그가 왜 바다로 갔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느낄 수 있다. 故 김관홍 잠수사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정두야! 작년 봄 맹골수도로 내려오란 권유를 받고 내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 간단해. 이게 옳은 일인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야. 옳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난 할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옥이란 아무도 나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나의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이다. - 허경,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中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은 삶의 이유와 존재 가치를 관계 속에서 찾는다. 만약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물다섯의 기초생활수급자 태성은 기억을 잃은 채 어느 병실에서 깨어난다. 그가 가진 유일한 기억은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에 번개탄을 태우고 도망친 부모의 모습이다. 퇴원 후 판자촌에 들어가 기초수급생활비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태성. 그는 철저히 혼자다. 가족도, 친구도, 살아갈 이유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반 자살 카페 '더 헤븐'을 발견한다. 카페 운영자 '메시아'의 제안에 따라 동반자살 계획에 합류하는 태성. 약속 장소에서 그는 운영자 메시아를 비롯한 카페 회원 네 명과 마주한다. 헌데 '메시아'라는 자가 수상하다. 그는 그곳에서 회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데, 바로 닷새간 죽음을 미루는 대신, 자신이 회원들에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최대치의 행복을 제공하겠다는 것.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회원들은 찜찜함 속에서도 메시아의 솔깃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루, 이틀, 사흘 ... 목적을 잊은 채, 메시아가 제공하는 온갖 호화로운 음식과 안락함 속에 안주하는 회원들,,,


그리고 닷새가 지났다.
그들은 몰랐다. 그 행복의 끝에는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정해연 작가의 신작 <지금 죽으러 갑니다>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부모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태성, 성폭행을 당한 후 이어진 2차 가해로 고통받아온 민서라, 지독한 왕따를 경험한 최린 등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이유로 죽고자 한다. 그런 그들에게 삶의 의욕을 준 것은 메시아가 제공하는 행복(온갖 호화로운 음식과 안락함)이 아니었다. 그들을 살고자 만든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난 연대의식이었다. 본 소설은 공포, 추리, 스릴러 등 장르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작가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결국 '삶의 진정한 의미'이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나의 마음을 들어주지 않는", 즉 '단절'이 지옥이라면, 천국은 '연대' 혹은 '공감'이다.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작가는 이 황홀한 지옥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간만에 잘 짜인 추리 스릴러 한 편을 보았다. 개연성 있는 드라마, 스피디 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전개, 디테일한 공간 및 심리 묘사가 일품이었다. 덕분에 나는 작가가 안내하는 소설 속 상황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81년생 젊은 작가 정해연. 그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분 시공 청소년 문학
최이랑 지음 / 시공사 / 2017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그럴 줄 알았다면 그날,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거야.
그럴 줄 알았다면 써버는 그날,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지 않았겠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날, 거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우리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따위는 애초에 없으니까! - <1분 中>


10대 소녀 유수, 서연, 소혜, 보미는 절친이다. 이들에겐 인기 아이돌 그룹 써버의 열혈 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써퍼의 '3주년 기념 팬콘서트'에 응모하고 함께 참석하기로 한다. 당첨되지 않은 소혜를 제외한 셋은 콘서트 당일, 콘서트가 열리는 서진타운으로 향한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찍 도착한 소녀들. 헌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여기저기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무엇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다. 어영부영 다가온 시작 시간. 유수, 서연, 보미는 전력 질주하여 관객석 맨 앞줄을 차지한다. 헌데 유수에게 갑자기 복통이 찾아오고, 그녀는 어쩔수없이 맨앞줄을 포기한채 홀로 화장실로 향한다. 공연장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뒤이은 강풍. 공연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다. 단 1분만에. 그 1분 사이에, 유수는 공연장 밖으로 날아가고 정신을 잃고만다.

 참사 이후, 생존자들의 삶과 치유를 다룬 소설이다. 같은 아픔을 겪은 동갑내기 소녀들 유수, 서연, 소혜, 보미와 그들의 부모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해가는지, 또한 참사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과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세밀하고 정밀하게 묘사해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세월호 사건'을 생각했다. 10대가 주로 희생되었다는 점, 제대로된 진상규명이 없다는 점, 유가족들이 보상금에 눈 먼 장사치로 비하된다는 점, '그만좀 하자'는 인터넷 여론 등이 2014년 4월의 세월호 사건의 전개과정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헌데 본 소설의 모티프는 세월호 사건이 아닌 1995년 6월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였다. 


 본 소설의 작가 최은영은 긴 시간을 삼풍 백화점 사고의 '기억수집가'로 활동해왔다. 오랜 기간 참사에 얽힌 사람들을 인터뷰해왔고,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런 작업은 2016년에 발간된 <1995년 서울, 삼풍>이 탄생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작가는 삼풍백화점 사고의 유가족들을 인터뷰하며, 치유되지 않은 그들의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선, 혹은 이런 참사가 다시는 잃어나지 않기 위해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하며,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본 소설 <1분>이다. 놀라운 점은 삼풍백화점 사고로부터 약 20년 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의 모습이 본 소설에 묘사된 삼풍백화점 사고의 전개과정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대한민국은 20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변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작가가 이야기한 공감과 연민, 기억을 통한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1분>은 참사의 생존자 유수의 시선을 통해 공감, 치유의 메시지를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할 것을 이야기한다. 사고 이후 유수는 잠도,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두려움에 인터넷에도 접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목숨을 잃은 친구들을 위해 꿋꿋이 살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희생자들을 계속 기억하기로, 또한 친구들의 죽음을 폄하하고 덮으려하는 무리들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실제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던 사람들은 청소년들이였다. 어른들은 이제 잊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그냥 사고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또래의 죽음을 잊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다. <1분>이 청소년 소설의 형식으로 출판된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세상을 바꿀수 있는 것은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좋은 소설을 읽었다. 참으로 슬프고도 피로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더는 우리 사회에서 '삼풍백화점 사고'나 '세월호 사건'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