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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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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감정을 깨닫고 발산하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게 사랑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말이다. 사계절 안에는 온도 차이가 있고, 그게 날씨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의 안에도 온도 차이가 있다. 바로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발상을 머금은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뚜렷한 계절감과 그 안에 있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대비되고 대조되며 때로는 은유와 비유로 존재하기도 하는 그 순간을 담은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기도, 그래서 마음을 쿡쿡 찔러대기도 했다. 


​싱그러운 봄과 끈적끈적한 여름 이야기,

쓸쓸한 가을과 고즈넉한 겨울 이야기


싱그러움과 끈적끈적함, 쓸쓸함과 고즈넉함. 계절이 주는 느낌을 담은 표현들이다. 그 표현들과 어울리는 감정의 일대기를 그리는 구조라는 점에서 독자들이 더 풍부한 감상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말하자면 사람의 삶에 있는 희노애락의 순환을 절기로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래서 미워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며, 이로 인해 성장한다. 이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사랑이며 그것이 작가가 내내 강조하고 싶었던 키워드일 것이다. 띠지에 쓰인 카피조차도 ‘사계의 소설가 장은진이 그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개중에서도 특히 신선하게 느껴졌던 건 표제작 <가벼운 점심>이었다. 가출한 지 10년이 지난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그 설정부터가 호기심을 불러오기 딱 좋아 보였다. 거기다가 가출한 이유는 같이 살았던 아내를 진정 사랑하지 않아서였다는 것.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 당장 부부가 갈라서지 않았으며 그래서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는 걸 자식의 입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분명 이 가족들의 내부에 끊임없이 문제가 도래했고 일명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집 안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첫째로는 남편이 본인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집을 나간 이유도 그게 맞았지만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아내이자 어머니가 있다. 또, 아내를 사랑하지 않기에 당장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할 수 있었을 듯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머물렀던 남편이자 아버지까지. 어찌 보면 망가진 사랑을 향한 합리화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잘잘못을 따지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닌 듯해서 도덕성은 배제하고 읽었다. 


특히 이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건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 그 반전이 말이 안 돼서 놀라웠다기보다는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색안경을 끼고 독서하고 있었구나, 하는 데에서 오는 신선함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는데 왜 그걸 상상하지 못했을까. 이런 깨달음이 시야를 넓혀 주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사랑은 재난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온다는데, 그 재난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 같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 사랑이 있는 것 아닐까. 평생을 해도 제대로 알 수가 없어서 계속 알고 싶게 만들고, 집착하게 되는 것….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라면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가장 건강할 듯이 느껴졌다. <가벼운 점심> 속 아버지가 봄을 싫어했지만 진정한 봄을 만나 자기자신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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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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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이유 모를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원도의 끊임없는 자신을 향한 물음표 뒤에 있는 여러 가지의 결핍이 보여서였을까? 또, 자신의 생애에서 만난 경쟁자들과 도무지 공평하지 않았던 상황들을 나열하는 걸 보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이 있었다. 기분 나쁜 피로감이라기보다는 문장을 온몸으로 곱씹고 있구나, 그런 감각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장민석까지…. 그들을 필두로 본인을 둘러싸고 있던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서 장민석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학창시절의 장민석은 원도가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똘똘 뭉친 것 같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원도 자신에게는 부족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까지 충분히 이끌어올 수 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모든 게 원도와 반대였다는 점, 그리고 그 대척점이 사실은 원도의 이상향이었다는 점까지. 큰 스포일러이기에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현재에 와서 장민석을 만난 장소,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의 정체 같은 것들까지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 장민석은 죽음과 존재 따위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던 원도의 열망이 투영된 상징과도 같다는 걸 말이다.

끝끝내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점도, 어머니의 사랑을 가질 수 없었던 점도 원도를 더욱 심오한 미궁 속으로 구겨 넣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풍파를 겪어온 지금까지 원도는 혼자다. 옆에 부모님, 친구, 애인, 아내, 자식이 있었지만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떼어 놓을 수 없던 지독한 생각의 뫼비우스 안에서 추측으로만 제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물론 그를 동정하기에는 완전무결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범법을 저지르고, 그를 통해 잠시나마 부를 손에 쥐었다. 여기에 원도의 과거가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유년시절부터 이어져온 지독한 트라우마와 고뇌가 악의 근원이었다는 가정은 합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답은 ‘글쎄’다. 원도의 생이 그랬듯이. 그는 평생을 정체 모를 무언가에 골몰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모른다. 그저 멀리 다다를 뿐이다. 그의 이름처럼, 생애처럼. 최진영 작가 특유의 심오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의 구성이 세심했다. 계속해서 생각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원도의 머리속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독서가 끝난 후에는 원도의 일생에 얹혀 있었던 그 물음표가 독자에게로 넘어온다. 말하자면 후유증과도 같다. 원도가 신경 쓰인다. 모순과 물음표로 점철되었던 그의 삶을 함께 고민하다 보면 나의 실존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시간도 분명히 생긴다. 이런 부분에서 복합적인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도의 세계를 읽어낸다는 건 지독히 피로하고 중간쯤엔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행위다. 다만,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나갈 수 없단 느낌을 받고 완독하는 경험이 ‘무언가’를 줄 수 있음은 분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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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4
송지영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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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의 의미가 희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왜 소중한가? 그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는 게 어렵다는 지점에서 우리는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이름들이 오랫동안 빛을 내길 바라는 독자의 입장으로서 바라본 『셋셋 2024』이 반가웠던 것도 같은 이유다. 처음 세상에 나온 이야기 특유의 간절함이 닿는 순간이 소중했다. 그 진심을 전달하고자 과도히 힘을 준 부분조차도 여러 번 곱씹고 싶어지는 마음들이었다.


[지금 여기, 가장 빠르게 도착한 내일의 문학들]

탁월한 카피라고 생각했다. 이보다 『셋셋 2024』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가 있을까. 첫 발걸음을 내딛는 자들과 독자가 처음 마주하는 지점. 그 지점에는 내일의 저명함이 숨쉬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글이 좋아 글을 공부하고 끊임없이 써나가는 4년을 보낸 나로서는 존경스럽다는 마음부터 들었다. 왕도랄 게 없는 영역에서 자신의 자아를 잃지 않고 하나의 글을 완성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잖은 미래에 소설과 시 역시도 AI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글쎄. 개념서와 같은 책들이라면 몰라도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 어린 단락들을 추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문장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 고뇌가 존재해야 비로소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이야기가 탄생한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가 잘 팔릴 것이라는 설득의 여지까지 갖추어야 하기에.

그중에서도 송지영 작가의 <마땅하고 옳은 일>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간병했던 딸 강선숙의 심리를 따라 글자들을 곱씹는 일은 고요하고 소름이 돋았다. 강선숙이 차라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내심 바랐던 마음, 요양원에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던 행동, 그리고 자신의 미래는 어떤 모양으로 마무리될지를 차례로 떠올리는 그 과정이 말이다. 당장의 죄의식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죄의식이 어떻게 돌아올지를 떠올리는 정서는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삶 속의 무수한 유한함들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마땅하고 옳은 일>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고뇌, <재채기> 속 관계의 끝맺음, <기다리는 마음>이 그린 반려의 유한함 등. 인간의 삶에 무수한 유한함이 존재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무수한 새 시작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낀다. ‘좌절’을 제시하고 닫힌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보다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 시작이 될 이야기들이 각자의 유한함을 품고 있기에 되려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상을 준다.

나는 4년간 문예창작학과에 재학하며 시를 잘 쓰는 사람을 숨김 없이 부러워했다. 시 합평 시간만 되면 심장이 빨리 뛰어 미쳐버릴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지 싶다. 내 시를 남의 앞에 내보이는 일이 부끄러웠다. 이제 와서 곱씹어 보면 그건 내 시가 못나서가 아니라 내 솔직한 마음을 꺼내 놓는 일이 못내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못난 문장이 오히려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시를 회피하고 회피한 자리에는 글을 편식하는 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시집을 읽어댔다. 결과가 나오진 않은 시도였다. 하지만, 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추상적인 문장의 모음 아니야? 하는 반골 기질을 누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셋셋 2024』 속 시들을 만나기 전에 나의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하마터면 그 소중함을 놓칠 뻔했으니 말이다.

스쳐가는 찰나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언어적으로 체화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떠올리게 된 시들이었다. 어느 하나의 시를 베스트로 꼽을 만큼 내 조예가 탁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일상을 저장하는 방식이 내게 큰 귀감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나칠 수 있었던 구석의 기분을, 오늘의 날씨를,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배경들을. 내 하루를 기록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써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 귀한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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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초능력 찾기 저스트YA 7
이진 외 지음 / 책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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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아쉬움과 후회에서 비롯되는 생각들 말이다. 잘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거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이 있다거나 할 때 그런 생각들은 배가 된다. 상상함으로써 느껴지는 현실과의 괴리에 괴로울 때도 있지만, 반대로 동기부여로 작용하는 때도 있다. 고민들 속에서 위안을 찾기 위해 했던 숱한 상상들이 글로 쓰인다면 이런 느낌일까. 읽는 내내 그런 마음이 들었다.


책폴의 청소년문학을 세 권째 읽으며 느낀 점은 그야말로 청소년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그려냈다는 것이었다. 청소년문학이니 그런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안다. 다만 그런 게 있지 않나.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을 볼 때 '이건 너무 어른의 시선에서 쓰인 게 느껴지는데?' 하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말이다. 그 괴리를 줄이는 게 어떻게 보면 숙제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장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신간은 소설집으로, 하나의 주제인 '초능력'을 중심에 두고 쓰인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엮은 앤솔러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총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모두 '초능력을 가진 청소년'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능력을 가졌지만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는 인물, 초능력을 통해서라도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인물 등등. 청소년들의 고뇌는 가지각색이며 한 가지의 유형으로 정의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써내려갔다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로 시작하는 발상이 '근데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완전무결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가닿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알게 되어 내 초능력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인물, 진실과 거짓이 주객전도 되어버린 상황. 현실과 초능력의 세계 사이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느 지점까지의 상상력은 독자의 세계를 넓혀 준다. 마냥 현실적이고 비관적이지도 않게, 그리고 이상적이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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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와 9그룹 바다 탐험대 저스트YA 6
한요나 지음 / 책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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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획일화된 제도 아래에서 '대학만 가면 자유가 생긴다', '몇 년만 참고 고생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는 것이 보편적인 탓인지, 성인이 되어서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20대들이 즐비한 현실이다. 이를 두고 낙오자라 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악순환을 불러오는 부분도 있다. '제일 중요한 건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 사실'임을 망각한 이 시대에서 『버니와 9그룹 바다 탐험대』는 '스스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자들에게 응원을 건넨다.


  주인공 버니는 '공동체' 속에서 교육받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청소년이다. 그녀가 몸 담은 공동체는 '지구 공동설'을 중심에 두고 있다. 지구의 어딘가에는 분명 구멍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지구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 가설이다. 공동체 속 버니와 같은 아이들은 또 다른 지구로 나아간다면 분명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공동체 속 선생님들은 왜인지 숨기는 것이 많아 보이고, 아이들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어쩐지 익숙한 구조의 사회다.


  이 안에서는 개인의 도전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걸 깨달아버렸을 때의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안전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이 시설에 안도하면서도 그만큼 시설 안의 '무자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버니를 옥죄고 있었다. 이마저도 버니가 '마마 지구'에 닿았다 왔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을 어기고 흘러갔던 낯선 곳에서 버니는 친구 태인이와 함께 모험심을 장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험심이 곧 시설에서 독립해야 할 그들에게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을 알려 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 리뷰의 첫 문장에 썼던 것처럼,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다리의 아이러니였다. 정해진 복장, 밥, 따라야 할 규율들이 즐비한 공동체에서 입시라는 공통된 목적 하나를 좇으면 되는 것이 열아홉까지의 이야기다. 이 목적을 이룬 자들은 잠시간의 행복 이후 덩그러니 남겨지는 기분을 필히 느끼게 된다. 순식간에 정해진 것 하나 없는 황무지에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에.


  또한, 그 황무지에서 '보편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기준치가 높다는 특이점도 있다. 당연히 이 대학교쯤은 가 줘야 하고, 전공 불문하고 이런 자격증쯤은 있어야 하고, 대외활동 역시도 한두 개로는 부족하다 같은 인식들 말이다. 목표가 있다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자 다른 목표가 있는 자들에게 획일화된 보편성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인데 모든 사람이 같은 과정을 밟는다는 것 자체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위의 모든 이야기들이 버니의 행보가 어쩐지 위로처럼 다가오는 까닭이다. 여러 명과 같은 길을 걷다 덩그러니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자가 보여 주는 용기. 나중에 다른 곳으로 돌아가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보겠다는 굳건함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응원처럼 느껴진다. 시행착오는 결국 도전에서 온다. 도전했다 실패한 자를 미련하다 칭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굳이 그 길을 왜 가는가?' 하는 물음표는 본인이 스스로에게 던질 때 유일하게 가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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