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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이세요? ㅣ 창비청소년문학 133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내가 겪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흔히 나만 겪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생각보다 얇아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소설집은, 그렇지만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독서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가볍고 경쾌하게 담아냈지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네 편의 단편을 통해 한국 현대사가 지나 왔던 시간들을 조명하기도 하고, 현재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사회 현상이나 풍경들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렇지, 이게 나만 겪었던 일들은 아니었지, 이런 일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며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특히 <이상한 나라의 하루: 당근이세요?>와 <오월의 생일 케이크>를 감명깊게 읽었다. <이상한 나라의 하루: 당근이세요?>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직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런 점을 생각하고 읽으면 훨씬 더 흥미롭다. 주인공은 하루 동안 집을 떠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여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현대 한국의 여러 모습이 조명된다. 외국인과 중고물품을 거래하고, 이주문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친구와 만나고, 한부모가족으로서 가장의 역할을 다하는 엄마와 대화하며 엄마를 좀더 이해하는 모습까지. 하루 동안의 여정 속에서 작가는 현대 한국이 처한 여러 모습을 자연스럽고도 다채롭게 담아냈다. 소설 속 모습은 뉴스나 신문기사로 보면 조금은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지만, 소설 속에서는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하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떤 모습이든지 결국 사람이 사는 모습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모습이 내 근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이야기들이라는 것. 한 편의 짧은 소설에서 여러 내용을 읽었다.
<오월의 생일 케이크>는 읽다 보면 아! 하고 깨닫는 지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역사가 남긴 상흔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지, 그렇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음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큰아빠 생일상에 올라갈 음식을 배달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는데, 그 짧은 순간 목격한 사고의 모습이 하루종일 주인공을 괴롭히고 힘들게 만든다. 그런 주인공이 만나러 가는 큰아빠는 소설에서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5.18을 겪으며 마음이 심하게 다친 사람이다. 짧은 순간 목격한 사고도 이렇듯 힘든데, 그런 참사의 현장에 서 있어야 했던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주인공은 큰아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지만, 일련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마냥 집에만 있는 큰아빠를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큰아빠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 큰아빠에게 매년 케이크를 보내는 사람, 그 케이크 앞에서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는 큰아빠의 모습은 '그럼에도' 아직 극복의 가능성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주인공이 큰아빠에게 집에 갈 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자 큰아빠가 수락하는 장면 또한 그렇다. 집 밖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을 큰아빠의 모습은 현대사의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내딛을 한 걸음으로 읽힌다.
청소년문학 133번을 달고 나온 소설집이지만 깊이 있게 읽히는 청소년문학은 근래 들어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가볍고 잘 읽히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방학에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인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