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른 문명권과 차이를 보이는 아메리카의 경우를 논외로 했으므로 그 나머지에 대해서 본다면, 1500년에 문명이 발달한 곳은 1400년에도 이미 문명이 발달해 있었고, 1800년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역시 문명이발달해 있는 곳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P74
이런 곳을 총괄해서 보면, 약 1,000만 제곱킬로미터로서 오늘날 프랑스영토의 약 20배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공간에 불과하지만 대신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이 지역은 뚜렷이 분간되는 띠 모양을 이루는데, 이것은 약간의 차이점만 빼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에서도 그대로 찾을 수 있다(다시 반복하지만 1,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넓이를 가진 이곳에 인류의 70퍼센트가 살고있다). - P74
이런 수준은 우리에게는 매우 낮아 보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이미 확실한 인구과잉이었다. 1제곱킬로미터당 44명으로서 독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뷔르템베르크는 16세기 초에 특히 랑스크네병을 모집하는 징병지역이었다.⁸⁵ 스페인의 인구밀도가 17명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의 인구밀도가 34명이었으므로 이곳은 이민을 떠나보내는 원천지역이었다. - P75
85. H. Bechtel, o, pp. 25-26. - P762
앙시앵 레짐 시기의 프랑스에 대한 장 푸라스티에의 계산에 따르면, 윤작까지 고려하여 한 사람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1.5헥타르의 경작지가 필요하다.⁸⁶ 이것은 1709년 대니얼 디포가 단언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디포의 계산에 의하면 한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땅 3에이커나 중간 정도의 땅 4에이커(즉 1.2-1.6헥타르)가 필요하다는것이다.⁸⁷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인구 압력이 있을 때에는 음식생활을바꾸거나(특히 육류와 빵 사이의 변화를 초래한다), 농업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이민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 P76
86. Jean Fourastié, Machinisme et bien-être, 1962, pp. 40-41.
87. Daniel Defoe, A Review of the State of the British Nation, 1709, p. 142, 다음에서 인용. Sydney Pollard et David W. Crossley, The Wealth of Britain 1085-1966, 1968, p. 160. - P762
이상에서 고찰한 것은 인구역사의 핵심적인 문제들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시 인구와 시골 인구 사이의 비율이 비율은 이전에 유행했던 경제성장의 역사에 핵심적인 지표였다—이며 또 인문지리학의 규준에 따른 시골 인구집단의 형태이다. - P76
고든 휴즈의 지도가 보여주는 다른 사실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문화"(인류의 첫 번째 성공)와 "문명"(인류의 두 번째 성공)이 자리 잡은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략). 둘째, 이 지도를 보면 유럽인이 승리를 거두기 벌써 수 세기 혹은 수천 년전부터 전 세계가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77
마지막으로 셋째, 인구가 조밀한 이 좁은 지역들이 늘 동질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지역들(서유럽, 일본, 한국, 중국 등)이 있는가 하면, 말레이 제도나 인도네시아 등 거주지역이 몇몇 곳에 분산된 지역도있다. 인도는 복잡하게 섞인 여러 문명들이 지역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다. - P80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거대한 대양이라고 하더라도 일찍부터인간의 모험이 펼쳐지지 않아서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은 바다는 없었고(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인은 인도양의 몬순을 알고 있었다), 접근하고 통과하는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산맥이 없었으며, 인간이 이리저리 뚫고 들어가보지않은 숲이나 인간이 통과해보지 못한 사막이 없었다. 이 세계가 "거주 가능하고 항해 가능한"⁹⁰ 공간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00년 이전, 아니 1400년이나 심지어 1300년 이전에도 아무리 작은 조각의 공간이라고해도 주인과 용익권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 P77
90. Denis Diderot, Supplémentau voyage de Bougainville, 1958, p. 322. - P762
정글북 : 인간과 야생동물
오직 문명권만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늘 크기 마련이며, 사실 문명권이 핵심적인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 문명들은 그들의 오랜 모습, 도구, 의복, 주택, 관습, 심지어 전통적인 노래 등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재능을 다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 결과물들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각각의 문명에는 또한 나름의 색깔이 있다. 여기에는 독창적인 요소들이 많다. - P80
야만인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곳은 말레이 제도, 중국의 고산지대, 홋카이도 북부, 타이완, 또는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면모를 가진 인도의 심장부 등 아시아 지방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유럽에는 숲속의 빈 공간의 마른 땅에서 벼를 재배하기 위해서 고지의 숲을불태우는 ("숲을 먹어치우는") 화전민 같은 정주 상태의 "야만인이 없다.⁹⁴ 유럽은 아주 일찍 산지 사람들을 순화시키고 길들였으며, 그들을 파리아(paria: 천민계급)로 취급하지 않았다. 반대로 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은 일종의 "합작" 관계가 없었다. - P81
94. Georges Condominas, Nous avons mangé la forêt de la Pierre-Génie Goo......, 1957. - P762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야만족은 사실 이들을 업신여기는 문명권에 포로처럼 갇혀 있는 상태였다. 진짜 야만족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이 조밀하게 모여 사는 지역의 경계 밖에서, 가혹한 환경이기는 하지만 완전한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프리드리히 라첼은 이들을 란트뵐커(Randvölker), 즉 "주변 종족"이라고 불렀으며, 독일의 지리학자와 역사학자들은 게시히틀로스(geschichtlos), 즉 역사를 가지지 않은 종족이라고 불렀다(그러나 과연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 P82
땅의 지력이 낮고 이용가치가 없어 보여서 사람이 희귀해지면, 야생 짐승들이 증가한다.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 곧 짐승들과 만나게 된다. 여행기들을 보라.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이 당신을 향해서 온다. 17세기의 한 여행자의말에 의하면,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마을과 도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갠지스 강 삼각주에서 낚시를 하다가 배에서 잠이 든 낚시꾼에게 헤엄쳐 다가와서 공격한다. - P82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서는 가공할 만한 식인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서 산간마을 주변을 개간해버린다.⁹⁸ - P83
늑대는 우랄 산맥에서부터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를 무대로 삼아왔고 곰은 이곳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다. 도처에 늑대가 있었고늘 늑대를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늑대 사냥은 시골이든 도시이든 그 지역이얼마나 건강한지에 대한, 그리고 그해가 얼마나 살기 좋은 해인지에 대한 지표가 될 정도였다. 잠시라도 주의를 늦추거나, 경제가 후퇴하거나 또는 겨울 사정이 나빠지면 늑대 수가 증가했다. - P84
당연히 빈 터가 클수록 동물이 번성했다. 만주지역에서 중국 황제의 웅장한 행차(10만 필의 말이 동원되었다)를 수행했던 페르비스트 신부*는 피로가 누적되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환상적인 사냥에 동행했다. 이때 하루 만에 잡은 포획물이 1,000마리의 사슴과 60마리의 호랑이였다.¹¹⁷ 1639년 당시 아직 사람이 살지 않던 모리셔스 섬에는 멧비둘기와 토끼가 어찌나 많았는지, 그리고 어찌나 겁이 없었는지 사람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¹¹⁸
* Ferdinand Verbiest(1623-1688) : 네덜란드의 예수회 선교사, 천문학자. 중국 청나라 왕조에서관직을 역임했으며 중국 이름은 남회인(南仁)이다. 그는 천문학 지식을 이용해서 흠천감(天 - P85
117. H. Josson et L. Willaert, Correspondance de Ferdinand Verbiest, de la Compagnie deJésus (1623-1688), 1938, pp. 390-391. 118, J. A. Mandelslo, 앞의 책, II, p. 523. - P763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어느 곳이나 「정글북」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길을잃기 전에 이 책을 덮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얼마나 미약하게 장악하고 있었는지를 증언한다. - P89
18세기에 마무리된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
중국에서든 유럽에서든 18세기에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이 무너졌다.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은 이때까지의 규준이었던 속박, 장애물, 구조, 비율, 수치의관계 등의 총체를 가리킨다. - P89
균형
출생과 사망, 두 움직임 사이의 균형 잡기라는 게임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대개 앙시앵 레짐하에서는 모든 것이 균형 상태에 이르렀다. 출생률과 사망률의 두 계수는 약 40퍼밀로서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출생이 가져온 것을 죽음이 가져갔다. 오늘날 렌 지역의 교외에 속하는 라샤펠 푸주레라는작은 코뮌의 교구 기록¹²⁷을 보면 1609년에 50건의 세례식이 있었다. 인구1,000명당 40명 정도가 출생한다고 가정하면 세례식의 수에 25를 곱한 것이 인구가 되므로 이 마을의 인구는 약 1,250명 정도로 추산된다 - P90
127. P. Goubert, 출판하지 않는 저작, École des Hautes Études, 제6부. - P763
유럽 인구가 정체 또는 감소 상태에 있던 시절인 1648년 직후, 독일을 방문한 한 이탈리아인이 "무기를 지닐 정도의 나이인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아이들이비정상적으로 많다"고 말했다.¹³² 만일 균형 상태에 빨리 도달하지 못하면 당국이 개입한다.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베네치아에서도 가공할 만한 흑사병이 지나간 직후인 1348년 10월30일 자의 관대한 칙령을 통해서 앞으로 1년 이내에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이곳에 정착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완전한(de intus et de extra)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 P92
132. G. Franz, 앞의 책, pp. 52-53. - P763
기근
수 세기 내내 기근이 끈질기게 반복되어서 그 자체가 인간의 생물학적 체제에 편입되었고 일상생활의 구조가 되었다. 그나마 우월한 위치에 있던 유럽에서도 곡가 상승과 곡물 부족은 계속 일어났고 심지어 친숙했다.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잘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 법칙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실 어떻게 상황이 다르게 진행되겠는가? - P93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살펴본 결과는 극도로 심각하다. 다른 곳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던 프랑스라고 해도 전국의 일반적인 기근이 10세기에 10회, 11세기에 26회, 12세기에 2회, 14세기에 4회, 15세기에 7회, 16세기에 13회, 17세기에 11회, 18세기에 16회가 있었다.¹³⁵ 18세기에 작성된 이 계산은 물론 매우 조심스럽게, 많은 유보조건하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수백 건에이르렀을 지방적인 기근은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낙관적으로 보일위험이 있다. - P94
135. Moheau, Recherches et considérations sur la population de la France, 1778, p. 264. - P763
유럽의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도시와 인근 지역들에 기근이 악착같이 따라다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약간 나아졌다고는 해도 재난이 그치지 않았다. 1730년 슐레지엔, 1771-1772년 작센과 남부 독일에 곡물 부족 사태가 벌어졌고,¹³⁸ 1816-1817년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기근은 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널리 확산했다. - P94
138, Fritz Blaich, "Die Wirtschaftspolitische Tätigkeit der Kornmission zur Bekämpfung derHungersnot in Böhmen und Mähren (1771-1772)", in: Vierteljahrschrift für Sozial- undWirtschaftsgeschichte, 56, 3, 1969년 10월. pp. 299-331. - P763
그러나 한편 도시들만 이러한 운명의 타격에 노출되었다고 속단하지는말자. 도시는 탄원하는 데 익숙했다. 도시에는 창고와 저장 곡물과 "밀 보급창"과 외국에서의 구매 등 여러 수단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금씩 여러 방면에서 준비하는 개미 같은 정책이었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흔히 도시보다도 주변 농촌지역이 더 큰 고통을 겪었다는 점이다. 상인, 도시, 영주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농민은 거의 비축물이 없었다. - P95
부르주아들의 잔혹함은 16세기 말, 그리고 17세기에 더욱 심해졌다. 이들이 가진 문제의식은 빈민들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뿐이다. 파리에서는 병자와 불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병원*으로 보냈고 성한 사람은 두 사람씩 사슬에 묶어 하수도를 청소하게 하는 등 힘들고 한없이 지루한 일을 시켰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말기에 빈민법(Poor Laws)이 나왔는데, 사실 이 법은 차라리 빈민을 억압하는 법(lawsagainst the poor)이었다.
* höpital, hospital: 이 단어는 오늘날과 같이 ‘병원‘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에는 그의미보다는 빈민, 광인, 불구자, 병자 등을 수용하여 격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 - P96
1630-1631년에 거의 인도 전체를 짓누른 가공할 만한 식량 부족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 네덜란드 상인이 끔찍한 기록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나 농촌을 떠나 의지할 곳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의 상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눈이 푹 꺼지고, 입술은 창백하고 거품으로 덮여 있으며, 마른 피부에 뼈들이 불거져나와 있다. 배는 빈 자루처럼 매달려 있다. 몇몇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울고 소리지른다. 다른 사람들은 땅 위에 누워 죽어간다." - P97
우월한 위치에 있는 유럽으로 되돌아오면 사람들은 마치 밤새 여행을 한끝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굳어져 있거나 아니면 안심이 되어, 또는 체념하는 마음이 되어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서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공포스러운 사태는 중세 초기에나 있었으며, 아니면 아주 큰 시차로 뒤쳐져 있던 동쪽의변경지역에서나 남아 있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만일 "역사상의 재앙을그에 따른 희생자의 비율에 따라 평가한다면 핀란드에서 1696년에서 1697년까지 일어난 기근이 유럽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재앙으로 꼽힐 것이다." 이때 전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라져갔다.¹⁴⁷ - P98
147. Eino Jutikkala, 앞의 논문, p. 48. - P764
1662년 블레주아에서는 한 증인에 의하면 "500년 이래 이러한 곤궁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배추의 심과 밀기울을 대구 씻은 물에 담가 먹었다."¹⁴⁸ 같은 해에 부르고뉴의 징세담당관들은 국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올해의 기근은 전하의 국토에서 1만가구 이상을 죽어가게 했으며, 심지어 훌륭한 도시 주민의 3분의 1이 풀을먹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¹⁴⁹ 한 연대기는 "일부 사람들이 인육을 먹었다"고 덧붙인다.¹⁵⁰ - P98
148, Pierre Clément, Histoire de la vie et de l‘administration de Colbert, 1846, p. 118. 149. G. Roupnel, 앞의 책, p. 35, 주 104. 150. Journal de Gaudelet, Ms, 748, Bibl. Dijon, p. 94, 다음에서 인용, G. Roupnel, 앞의 책 p.35. 주 105. - P764
질병
한 번의 흉작은 그런 대로 넘어간다. 두 번 계속되면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르고 굶주림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결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재난이 아니다. 그것보다 약간 이르게, 어쩌면 약간 늦게, 기근이 질병에게 문을 열어준다.¹⁵⁴ - P99
154. 이것은 흔해빠진 언급이지만 다음에서 증명되었다. Enrique Florescano, Precios delmaizy crisis agricolas en Mexico, 1708-1810, 1969. 이 책에서 그는 18세기 멕시코에서기근이 발생한 날짜와 여러 질병이 일어난 날짜를 비교했다(같은 책, 161쪽의 표 참고). - P764
그러나 현대의 의사들은 얼핏 보아서는 이 질병들이 어떠한 것인지 거의모른다. 이것들은 옛날의 병명 뒤에 숨어 있고, 증상의 묘사가 때로 이상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 병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병과 같은 것인지를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병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세균과 바이러스도 진화하고 그것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인간 역시 진화함에 따라 질병은 각각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다.¹⁵⁶ - P100
156, Mirko D. Grmek, "Préliminaires d‘une étude historique des maladies", in: Annales, E.S.C., 1969, n° 6, pp. 1473-1483. - P764
이런 대규모 공격 앞에서 잘 먹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라리아에 대한 최선의 치료는가득 찬 솥이다"라는 토스카나의 속담은 아주 잘 맞는 이야기이다. 1921-1923년 러시아에 기근이 심했을 때,¹⁶⁵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증거에 의하면 러시아 전역에 말라리아가 퍼졌는데, 북극권 가까운 곳에서조차 마치 열대지방에서와 거의 같은 증상을 띠고 나타났다. 영양 부족은 확실히 질병의 "확산요소"였다. - P102
165. Société des Nations, Rapport épidémiologique de la section d‘hygiène, n° 48, Genève, 1923년 4월 24일, p. 3. - P764
현대 의학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개진한 4-5가지의 가설 중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것은 매독이 두 종족 간의성관계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재창조된 질병이라는 주장이다(트레포네마 팔리듬 균[treponema pallidum]에 대해서 트레포네마 페르테누에 균 [treponemapertenue]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¹⁶⁷ 이 병은 바르셀로나에서 콜럼버스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린 때(1493)부터 끔찍한 증상을 드러냈으며, 그후 급속히 퍼져갔다. 이 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이었다. - P103
167. A. G. Price, 앞의 책, p. 162. - P764
페스트
페스트에 대해서는 엄청난 양의 문서들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으며 많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우선 이 병은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폐(肺)페스트는 1348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면서 역사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질병이며, 이에 비해 선(線)페스트는 더 오래된 것으로서 종기가 가랑이에 생기고 또 썩어들어가는 질병이다. - P105
지금까지 말한 것이 쥐나 벼룩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니더작센의 윌첸에 페스트가 퍼져가는(1560-1610) 데 대한 치밀한 연구를 볼 때 (이것에 대해서 3만여 건에 달하는 문서가 있다) 그 반대임을 확인하게 된다.¹⁷³ - P105
173. Erich Woehlkens, Pest und Ruhr im 16. und 17. Jahr., 1954. - P764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유럽에서 이 질병의 강도는 18세기부터 약화되었다. 이 병이 엄청난 규모로 퍼진 마지막 사례는 유명한 1720년 마르세유의 페스트이다. 그렇지만 이 병은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두려운 질병으로남아 있었다. 1770년 모스크바에 살인적인 페스트가 창궐한 것이 그 예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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