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보이지 않는 빛을 쫓다
적외선을 발견한 윌리엄 허셜

어떤 사람은 발견에 최적화돼 있는 듯 보인다. 참 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사실 발견은 운의 문제가 아니다. - P102

실험의 출발점은 관찰이었다. 허셜은 태양을 관측하면서 일부 강한 빛을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색유리 필터를 사용했다. 그는 어떤 필터를 쓰면 태양 빛은 대부분 차단되지만 열은 여전히 느껴지는 반면, 다른 필터를 쓰면 빛은 대부분 들어오지만 열은 차단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허셜이 남긴 글을 보자.
"(나는) 색깔을 서로 다르게 한 감광유리를 다양하게 섞어 썼다. 놀라운 점은이 유리 중 일부를 쓰면 열감은 느껴지는데 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반면, 또다른 일부를 쓰면 빛은 보이는데 열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¹⁰ - P102

10. J.L. E. Dreyer (ed.), The Scientific Papers of Sir Wil-liam Herschel, 2 vols (The Royal Society, London,
1912) - P390

허셜은 관찰에 돌입했다. 움직이게 해놓은 온도계로 스펙트럼 중 빨간색이나 녹색 또는 자주색 부분의 온도를 각각 측정했다. 각각의 관찰시간은 8분 정도였다. 그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8분이 지난 후 대조군의 온도계와 비교한 빨간색 스펙트럼 쪽 온도의 평균 상승분은 화씨 6.9도, 녹색 쪽은 화씨 3.2도, 자색 쪽은 2도였다. 그는 붉은 빛이 녹색 빛보다, 녹색 빛이 자주색 빛보다 더 강력한 열 효과를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뭔가 특이한 점이 그의 눈에 띄었다. - P103

허셜은 후속 실험을 통해 온도계를스펙트럼의 빨간색 끝 밖으로 계속 더 움직여봤고, 열 효과가 빨간색 바깥 가 - P104

까운 곳에서는 가장 크지만 그 지점을 더 넘어가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온도계를 스펙트럼의 자주색 끝 밖에도 놓아봤지만 열 효과는 없었다.
허셜이 발견한 것은 훗날 ‘적외선‘이라 알려지게 된 것이다(당시 그는 그것을 ‘열calorific rays‘이라 불렀다). - P104

허셜은 발견한 내용을 여러 편의 논문에 담아 왕립학회에서 발표했고, 복사열과 빛은 둘 다 동일한 스펙트럼의 일부(우리는 이 동일한 스펙트럼의 일부를 보고느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는 "두 개의 특정 효과를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두 개의 상이한 원인을 상정하는 것은 철학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단순명료한 설명일수록 최상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과학의 근본 원칙이다. - P104

027 빛은 파동이라는 가설
·토머스 명의 이중 슬릿 실험

(전략).
이들의 모델은 빛이 파동이라는 가설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를 검증할 수있는 실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과학적 사고를 지배한것은 뉴턴의 입자 모델이었다. 그 후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 Thomas Young 은 빛이 파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입증하는 실험을 고안해냈다. - P113

(전략). 빛이 파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이것이 ‘영의 이중 슬릿 실험‘ 또는 일상용어로 ‘2개의 구멍 실험‘이라고 유명해진 실험이다. 이 실험의 강점 중 하나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심오하다는 것이다. 1803년 실험 결과를 왕립학회에 제출하면서 영은 이런 소개말을 달아놓았다.
"내가 설명하려는 실험은 아주 쉽게 되풀이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구할수 있는 장치를 이용해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실험이다."
그러나 영의 이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뉴턴은 누구에게나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과학자 중에는 뉴턴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 P115

030 화학을 정량화하다
•원소 표시를 체계화한 베르셀리우스.

존 돌턴과 험프리 데이비의 연구 업적을 기반으로 원자와 분자와 화학일반에 대한 근대적 지식을 향한 획기적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은 스웨덴의 과학자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Jöns Jacob Berzelius였다. - P124

베르셀리우스는 자신의 가설을 진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화합물에 존재하는 여러 원소의 비율을 측정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가 밝힌 실험 목적은 ‘무기화합물의 성분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결합돼 있는지 간단명료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 P124

원소를 표시하는 체계를, 분자 구조를 표시하는 체계로 바꾸려면 다양한 여러 원소를 구성하는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야 했다. 베르셀리우스는 수소가 가장 가벼운 원소라는 이유로 수소의 질량을 기준 단위(1)로 정한 다음 다른 원소의 원자 질량을 수소의 질량에 준하여 산출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 P125

현대 화학의 기준체계와 베르셀리우스가 만든 체계 사이에는 중요한 또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원소의 무게나 질량(원자 질량 단위)의 기본단위를 수소 원자 한 개의 질량으로 규정했던 베르셀리우스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탄소의 가장 흔한 형태인 ‘탄소12‘라는 동위원소의 원자 질량의 12분의 1을 기본단위로 정해 쓴다. 그러나 이는 화학자화 물리학자나 중시할만한 미묘한 구분일 뿐 함의는 유사하다. - P126

그러나 베르셀리우스조차도 생물을 다루는 화학은 무생물을 다루는 화학과다르다는 생각, 생물과 관련된 화학은 뭔가 독립적인 ‘생기生氣, vital force‘와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유기화합물‘이라는 용어를 고안한것은 생화학과 고유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탄소 관련 분자들을 지칭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분자에는 ‘무기화합물‘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러한 오해가 끝나기 시작한 것은 베르셀리우스가 원자 질량 표(앞의 표를 보라)를 만들어 발표한 지 불과 10여 년 후였다. - P126

032 입자들이 추는 춤, 랜덤워크
・브라운 운동

실험과 관찰을 오가면서 원자의 존재를 입증한 여러 연구를 통해 실험과 관찰이 통합됐다. 원자에 대한 핵심적 실험이 이뤄진 시기는 1827년이었고 관찰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원자의 행태에 대한 이론은 20세기에 와서야 정립됐다. - P131

1827년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꽃가루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꽃가루에서 튀어나온 미세한 입자들(세포소기관 organelles)이 물속에 떠다니는 모습을 보다가 이들이 갈지자 형태로 불규칙하게 움직인다는 데 주목했다. 처음 그는 입자들이 살아있어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심한 과학자였던 브라운은 시멘트 같은 무기물에서 얻은 동일한 크기의 작은 입자들을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검증해봤고, 액체를 떠다니는 모든 작은 입자들(또는 공중에 떠다니는 연기 입자까지도)이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 P132

그러나 단일 원자가 이러한 운동을 가능하게 할 만큼 큰 타격을 주려면 해당 원자는 타격을 입는 입자들만큼은 커야 하고 그렇다면 현미경에 보여야 한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조르주 구이 Louis-Georges Gouy와 영국의 윌리엄 램지 William Ramsay는 각각 원자 운동 현상의 통계적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 P132

(전략). 그러나 구이나 램지 중 누구도 이 효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수학적으로 계산하지는 못했다. 숫자를 끌어들여 브라운 운동의 원리를 정확한 수학적 원리로 규명한 인물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1905년의 일이다(아인슈타인은 구이나 램지의 논문을 읽지 않고 혼자 힘으로 브라운운동의 원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랜덤워크‘라 일컬어지는 이 갈지자 운동이 타격을 가할 때마다 무작위 방향으로 입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맞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입자가 출발점으로부터 움직이는 거리는 직선거리로 측정했을 때 첫 번째 타격 이후 흘러간 시간의 제곱근에 비례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 P133

1926년 페랭은 물질의 불연속 구조를 밝힌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브라운이 봤다고 주장한 것을 그가 실제로는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그가 사용하던 현미경의 성능이 그다지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현미경 전문가인 브라이언 포드Brian J. Ford는 1820년대 브라운의 실험을 재현했다. - P133

034 시험관에서 유기화합물을 만들다
초자연주의의 퇴장

생물체에서는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지만 무생물에서는 일으키지 않는 특별한 ‘생명력‘이라는 생기론적 관념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여정에 필요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1828년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서였다. - P138

. 요소는 비교적 간단한 화합물(현대 화학식으로 표현하면 HN-CO-NH, 이다)로 밝혀져있었기 때문에 만드는 데 굳이 생명력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뵐러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확고부동한 생기자였다. 염화암모늄과 시안산은을 반응시켜 시안산 암모늄ammonium cyanate을 만들려는 실험에 착수했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 P138

뵐러는 베르셀리우스에게 자신이 "인간이나 개의 신장을 사용하지 않고도요소를 만들 수 있었다"는 소식을 편지로 알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견이 못마땅해 "과학의 큰 비극은 추악한 사실로 아름다운 가설을 죽이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 P138

그러나 생기론은 쉽게 폐기되지 않았다. 요소는 비교적 단순한 ‘유기물질이므로 특별한 예외적인 사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 복잡한 구조의다른 많은 화합물은 여전히 생명체가 아니면 만들 수 없었던 데다, 1840년대까지는 생명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혁신적 관념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1845년 또 다른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콜베Adolf Kolbe는 이황화탄소carbon disulphide를 아세트산acetic acid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무기물질로 유기물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 P139

베르틀로는 뵐러와 달리 어떤 화학적 과정이건 기계적인 과정과 관련된 힘처럼 실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의 작용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을 열렬히 지지했다. 전합성에 대한 그의 방대한 실험 프로젝트는 한 사람이 완성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의 4가지 원소(이를 합쳐서 CHON이라 부른다)로 유기물질을 만드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성과를 냈다. 1860년 유기물질의 합성에대한 그의 결정적 저작인 《합성에 기초한 유기화학 Chimie Organique Fondée surla Synthese》이 출간되면서 생기론의 종말을 알리는 종이 울려퍼지게 된다. - P140

036 얇은 얼음판에서 스케이트 타기
・대륙이 움직인다고 주장한 다윈

찰스 다윈은 진화의 작동방식을 설명한 ‘자연선택설‘로 널리 알려진 과학자다. 그러나 다윈은 진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부터 이미 지질학자였고, 그 유명한 비글호 항해 동안 남미에서 관찰했던 지질학 관련 지식을알린 업적으로 과학계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다. - P145

피츠로이는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며 땅이 곧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윈은 융기의장기적 함의를 깨달았다. 그 전에 이미 선구적 지질학자인 찰스 라이엘 CharlesLyell이 쓴 《지질학의 원리 Principles of Geology》를 읽었던 터였다.
이 위대한 저작에서 라이엘은 지구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경에 묘사된 종류의 재앙이 아니라 점진적 변화의 축적,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주변에서 보는 과정과 같은 변화 과정이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축적된 결과물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 P146

 허턴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정설로 인정받던 이론, 즉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는 견해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비교적 새로운 이 이론은동일과정설 uniformitarianism이라 알려진 가설로서 더 오래전에 확립된 ‘격변설catastrophist‘과 대조를 이루는 이론이다. 격변설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보이는그 어떤 변화와도 다른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 때문에 산맥과 해저와 지구 표면의 형태가 달라지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주장했던 이론이다. - P146

다윈은 내륙 지대를 탐험하면서 산맥 높은 지점에서 화석이 된 조가비들을발견했다. 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미세한 변화가 축적되면서 작용하는 진화 과정에 필요한 시간관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엄청난 융기가 연속적인 소규모의 융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변화는 지각 불가능할 만큼 느린 융기 과정에 의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 P147

"개연성이 아주 높은 가설은, 지하에 용암 호수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대륙을 느릿느릿 조금씩 융기시키는 힘과 열린 구멍으로 꾸준히 화산물질을 분출해내는 힘이 동일하다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많은이유로 자신하건대, 이 해안선 지각의 빈번한 흔들림은 땅이 융기될 때 반드시 발생하는 긴장으로 인한 지질 단층의 해체, 그리고 액화된 암석에 의한 단층의 유입으로 인한 것이다."¹⁵ - P147

15. Charles Darwin, Voyage of the Beagle (PenguinBooks, London, 1989; first published 1839 - P390

040 기후변화를 설명하다
・적외선 흡수력을 측정한 틴들

1850년대 말, 아일랜드의 물리학자 존 틴들John Tyndall은 왕럽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략). 그 이전의 과학자들, 특히 프랑스의 물리학자 조지프 푸리에 Joseph Fourier는 지구의 대기가 마치 담요처럼 작용해 열을 가둬 지구 표면을 덥게 유지하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 P158

틴들의 실험에서는 연구할 기체가 긴 놋쇠 관에 들어 있었고 관의 양쪽 끝은 적외선을 흡수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투명한 수정으로 막아놓았다. 관의 한쪽 끝은 열원과 접촉시켜놓았다. 관의 기체를 통해 들어와 있던 적외선은 다른쪽 끝에서 나와 열전퇴 thermopile라는 민감한 감지기로 들어가고, 열전퇴는 온도차를 전기로 바꾼다. - P158

이 장치가 바로 ‘분광광도계 ratiospectrophotometer‘다. - P158

틴들은 질소와 산소와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당시엔 탄산carbonic acid)와 오존과 메탄, 그리고 다른 탄화수소들의 적외선 흡수력을 측정했다. 그는 적외선을가장 잘 흡수하는 기체가 수증기와 이산화탄소와 메탄 같은 탄화수소라는 것을 발견했다. 지구 대기의 주요 성분인 질소는 적외선을 크게 흡수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시는 산소도 마찬가지다. - P159

턴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빙하기의 발생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틴들의 이론에 따르면 수증기는 적외선을 가장 강력히 흡수하지만 대기 중의 수증기량은 이산화탄소량에 영향을 받는다. - P160

틴들은 그 밖에도 밤의 기온 하락, 그리고 열로 인해 형성된 이슬이나 서리가 복사에 의해 손실되는 현상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시했고, 인간이 호흡을통해 내뱉은 이산화탄소의 양을 측정하는 기법도 개발했다. 이 기법은 오늘날에도 마취된 환자를 모니터하는 용도로 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철옹성 같은 혹한의 손아귀에 대한 틴들의 언급이 얼마나 과학적 합리성이 있는지 알려면 지구의 온도를 달의 온도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 P160

041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
• 파슨스타운의 괴물

관측 천문학의 현대화는 1840년대 들어 시작됐다. 당시 제3대 로스 백작(윌리엄 파슨스William Parsons)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을 제작해은하수 Milky Way 너머 현재 다른 은하라 알려진 천체들을 연구했다. - P161

. 그 절정은 ‘파슨스타운의 괴물‘이라 불리는 직경 72인치 (6피트 또는 180센티미터)짜리 반사망원경이었다(이 망원경에는 윤을 낸 금속제 거울, 약 3분의 2의 구리와 3분의 1의 주석을 섞어 만든 ‘금속경 speculum‘이 부착돼 있었다). 거대한 원통형으로 생긴 망원경은, 15미터 높이의 돌탑 두 개를 7미터 간격으로 세운 다음 그 사이에 세워놓았다. - P162

로스 백작은 성운 nebula (라틴어로 ‘구름‘을 뜻한다)이라는 하늘의 흐릿한 빛 뭉텅이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그는 36인치 (90센티미터)짜리 반사경을 이용해 게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해 게 성운Crab Nebula 이라 스스로 이름 붙였던 성운을비롯해 여러 개의 성운 그림을 그려뒀다(당시는 천체 사진술이 등장하기 전이었다).
72인치(180센티미터) 망원경 덕에 그는 성운 속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특히M51이라 알려진 성운 하나가 커피 컵에 휘저어 놓은 크림 무늬를 닮은 나선형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했다. 이 성운은 소용돌이 성운Whirlpool Nebula (또는 소용돌이 은하)이라 불리게 됐다. - P163

 아일랜드의 국회의원이었던 토머스 리프로이 Thomas Lefroy가 남긴 말을 보자.
"보통 망원경으로 보면 그저 조금 큰 별 정도에 불과한 목성이 이 괴물 같은 망원경을 통하면 육안으로 보는 달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인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 괴물로 천체를 관측하도록 마련해놓은 조작 장치 마디마디에도망원경 자체의 정교한 설계와 성능을 능가하는 천재성이 엿보인다. 무게가 16톤에 달하는 망원경의 조작 장치는 로스 경이 망원경을 한 손으로 가뿐히 움직이도록, 그리고 두 사람 정도면 어떤 높이로건 망원경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돼 있었다."¹⁹ - P164

19. Thomas Lefroy, Memoir of Chief Justice Lefroy(Hodges, Foster & Co., Dublin, 1871) - P164

044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다
•역학疫學의 창시자, 존 스노우

의학의 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중요한 발전중 하나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의사 존 스노우John Snow가 관찰과 실험을 결합하면서 이뤄졌다. 영국 북부에서 태어난 스노우는 1831년 고향에 콜레라가 발발했던 시기에 18세의 나이로 큰 도움을 제공했다. - P172

미아즈마 이론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스노우는 지역 주민들에게 정보를 얻어 지도에 희생자들이 살던 가구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콜레라 발병의 원인을추적했다. 그 결과 콜레라가 브로드스트리트 주변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알게 됐다. 이곳에는 주민들이 물을 끌어다 쓰는 펌프가 있었다. 스노우는 현미경으로 펌프의 물을 관찰하고 화학 분석을 시행했지만 콜레라를 일으킬 만한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 P172

콜레라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스노우 스스로도 인정했듯, 정점은 손잡이를 제거하지 않았어도 지나갔을 것이었다. 그는 또 이런 내용도 남겼다.
"전에 언급했던 바대로 콜레라 발발 직후 주민들이 그 지역을 떠나면서 사망자가 훨씬 줄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펌프 물의 사용을 중단시키기전에도 콜레라가 주춤해졌기 때문에, 주민들이 펌프로 쓰던 우물에 콜레라 독소가 여전히 활성화 상태로 들어 있는지, 아니면 어떤 원인으로 건물에서 콜레라 독소가 없어졌는지 확정하기는 불가능하다."²² - P173

22. Letter to the editor of the Medical Times and Gazette,
September 1854 - P390

(전략).
이로써 스노우는 역학疫學의 창시자가 됐지만, 콜레라의 원인을 찾기 위해콜레라 창궐 지점을 지도로 표시한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분명 서부에서 의사로 일하던 토머스 셉터 Thomas Shapter의 책에서 비롯된 것 같다. - P174

052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마이컬슨-몰리 실험

빛이 파동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 정립되고(실험 27을 보라), 빛의 속도가 맥스웰의 전자기 파동 방정식을 따른다는 것을 입증할 정도로 성확히 측정된 이후(실험 45를 보라), 당연히 도출되는 가정은 파동의 매개 물질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음파가 물이나 공기 또는 고체까지도 통과해 움직이듯 빛의 파동이 통과하는 매질 또한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 P202

프리즘과 거울을 이용해 광선을 둘로 쪼갠다.
둘로 쪼개진 광선은 각각 설치된 거울 사이에서 반사돼 다시 검출기로 돌아가므로, 각 광선은 정확히 똑같은 거리를 다른 경로로 이동한 꼴이 된다. 마이컬슨은 에테르를 통과하는 지구의 움직임(지구의 공전과 에테르 바람_옮긴이) 때문에 광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에 차이가 나고, 이러한 시간차로 인해 이중 슬릿 실험(실험 27을 보라)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간섭현상이 일어나 검고 흰 간섭무늬가 나타나리라고 추론했다. - P203

마이컬슨은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 경 Lord Rayleigh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와 에테르의 상대적 움직임에 대한 실험들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분명비관적입니다. 간섭무늬의 변화 값 예상치는 0.40 이었는데, 최대로 얻은 변화값은 0.02에 불과했고 평균은 그보다 훨씬 낮은 0.01이었습니다. 그것도 올바른 장소에서 얻은 값이 아니었어요. 변위 displacement는 상대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에테르 바람이라는 게 있다면 상대속도는 지구의 속도의 6분의 1 미만입니다."²⁴
마이컬슨-몰리 실험과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은 결과‘는 과학을 두 가지 즉면에서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았다. - P204

첫째, 이 실험은 빛의 속도가 (맥스웰 방정식이 예상했던 바대로) 절대 상수라는개념, 다시 말해 빛의 속도는 관측자가 어떻게 움직이건 상관없이 모든 관측자에게 동일하다는 관념을 확립시키기 위한 핵심 단계였다. (중략).
둘째, 이 실험은 에테르라는 관념을 없앰으로써, 전자기가 진공을 통과해 퍼져나간다는 장이론이 도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7년 마이컬슨은 ‘광학 정밀 기기와, 이 기기를 통해 실행한 분광 및 계량 연구의 공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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