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민주주의의 몰락
전간기 동안 유럽의 민주주의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맞았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민주주의가 독재주의, 군사주의, 전체주의 정권 앞에서 뒷걸음질치고 만 것이다. 1920년, 유럽 민주주의는 헝가리를 비롯해 이탈리아, 불가리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일어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는 대공황으로 중산층이 무너지며 다시 한 번 극우주의가 힘을얻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불만을 품고 과격화된 소수민족들이 민족적 분노를 표출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 P12
게다가 1938년 서구 민주주의 열강으로 손꼽히던 프랑스와 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 넘겨버린 일은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에게는 커다란 배신으로 다가왔으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가 후퇴를 겪게 만드는 데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시작된 이듬해 9월, 상대편이 전체주의를 내세운 독일이었던만큼 프랑스와 영국은 또다시 민주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릴 수 있었다. - P13
경제력
전쟁이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경제력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연합국이 부족한 군사적 요소들을 경제력으로 보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기때문이었다. 영국, 미국, 소련의 자원은 물론,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라틴아메리카가 자원을 내놓았고, 중동 지역의 자원까지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연합국의 힘은 규모, 질,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 P14
1938년은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반등했다가 다시 한번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인데, GDP도 8,000억 달러로 떨어진 상태였다. 또한 모든 설비를 가동해야 했던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달리 미국의 경우 농업, 공업, 광업 분야의 설비 다수가 유휴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실업자도 1,030만 명에 달하는 등 미사용 생산능력이 컸다. 1945년 미국GDP가 1938년 대비 84% 증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이유 때문이었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대규모 약탈과정복에도 불구하고 동 기간 GDP 증가율이 독일 24%, 일본 11%에 그쳤다. - P14
석유 문제
1939년 각국의 석유 보유량은 그 어떤분야보다도 가장불균형한 모습을 보였다. 전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미국에서 생산되었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대기업들이 남아메리카, 중동,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의 석유 자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을 제외한 상태에서 살펴보면 자국의 석유 수요를 해결할 수 있는나라는 소련이 유일했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석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독일의 석유 보유량은 몇 개월분 밖에 남지 않았고, 결국 1940년부터는본토와 유럽 내 점령지에 남아있는 석유가 부족해지자 루마니아의 석유자원을 끌어와야 했다. 그나마 히틀러가 자급자족론의 핵심 요소로 내세웠던 합성유 생산이1943년 정점을 찍은 덕분에 총 연료 수요의 40%를 충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1944년 5월 미국의공습으로 생산시설들이 파괴되면서 이미 기울어 있던 석유의 생산-수요 간균형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P20
6. 일본, 너무 먼 석유 생산지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의 석유 자원을 손에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석유를약 6,000km 떨어진 도쿄까지 가져오기 위한 수송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전쟁 전까지는 대부분 서방 국가들이 석유 수송을 도맡아왔던 탓에 일본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유조선 제작이 시급했다. 그러나 이렇게 급작스럽게 제작된 일본의 유조선도 1943년 이후 잠수함과 전투기를 앞세운 미국의 공격으로 상당 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의 잠수함 공격은 그 성과에 비해 독일이 대서양에서 펼친 유보트 잠수함 작전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 P23
1939~1945년의 무기 생산
경제적·기술적인 면에서 연합국의 최대 적국이었던 독일은 자국을 비롯한 유럽 점령지 전역의 자원을 모조리 동원했던 순간인 1943년부터 산업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이어진 뒤늦은 노력들은 독일의패배를 간신히 6개월 정도 늦춰주는 역할에 그쳤을 뿐이었다. 독일의 경쟁국인 미국, 영국, 소련은 독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들을 갖추고 있었다. - P24
2. 탄약 생산
소련은 탄약 생산에서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위업을 기록했다. 과거제정 시대에는 러시아제국의 총탄 생산량이 독일제국의 10%밖에 되지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생산량은 화학 분야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비슷한 수준에 달했다. 연합국 전체로 본다면 전체 전쟁 기간 기준으로 추축국에 비해 평균 세 배 더 많은 총탄을 생산했으며, 1943년 기준으로는 네 배, 1944년 기준으로는 다섯 배 더 많았다. 특히 독일은 부족한 강철과 비철금속 자원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 P24
3. 항공기 생산
1938년만 해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항공기 총 생산량은 연합국이 될 국가들에 비해 세 배 더 컸으며 품질면에서도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이는 추축국에 우월감을 심어줬고, 적극적으로 침략할 수 있게 만든 배경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1940년이 되자 추축국의 항공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1942년에는 1/4까지 떨어졌다. 1944년에는 1/3 수준으로 소폭 상승했지만 영국과 소련의 생산이 감소한 탓에 상대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일 뿐이고, 그나마도 미국의 막대한 생산량 때문에 크게 증가하지 못했다. (중략). 한편 뒤로 갈수록 독일은 더 많은 항공기를 생산했는데, (중략). 그러나 미국은 모든 종류의 항공기를 생산하여 연합국을 지원하고 있었고, 영국은 전투기와 전략폭격기 생산에 집중했다. 소련은 그 대신 모든 자원을 전략폭격기와 전투기에 할애했다. 실제로 당시 가장 많이 제작된 항공기 모델은 소련의 일류신II-2 슈트르모빅(Ilyushin II-2 Sturmovik 36,1837기)과 야코블레프 Yak-3(Yakovlev Yak-3, 31,000기)였다. - P26
노동력 투임 및 구조 비교
전쟁 중인 모든 국가들은 18~50세의 남성 인구 중 무려 25~40%가 전쟁에 동원된상황에서 어떻게 생산을 증가시킬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여기에대해서는 세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는데 새로운 노동력을 구하거나, 기존의 노동력을 다시 생산활동에 집중 배치하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농업이나 공공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했다. (중략). 게다가 농업 분야의 기계화율이 낮아 최소 800만여명의 농업 노동력이 필요했던 탓에 농촌 지역의 인력을 도시로 데려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병력 수요가 늘어난데다 기업가들도 숙련공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생산조직 재편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산업생산 속도도 1944년까지는 크게 증가하지 못했다. 영국의 경우 비교적 효율적인 하청 제도를 장려했고 이에 따라 수천 개의 소기업들, 심지어는 도박 업체의 전화센터까지도 전쟁 기업으로 전환하였지만 인력 부족 문제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41년부터 여성도 후방 병력 동원 대상이 되었는데(독일에서조차도 여성동원은 매우 점진적으로만 이뤄졌다), 실제 동원률은 50% 미만에 그치는 등 제대로실행되지는 않았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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