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유는 글쓰기 또한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를 지우는형식이라 상상했기에 멸절의 한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티봉의 설명대로 베유는 "혹독한 내면적 정화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완벽한 표현을 획득할 수 없다"고 믿었다.(GG, 8) - P85

글쓰기가 번역이라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베유가 숭모의 대상으로서든 동일시의 대상으로서든 작가의 "나"를 지우려한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샤론 캐머런의 주장대로, 이멸절의 효과로 지극히 몰개성적인 문체가 드러난다. 베유가프랑스어의 대명사 ‘on‘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것 역시 사적 대명사(‘on‘이 들어간 프랑스어 표현은 영어에서 주로 부정사구문으로 번역된다)를 피하려는 의도에서다.⁴⁷

47 예를 들어 매카시는 베유를 번역할 때 전형적으로 부정사 구문을 쓴다. - P86

베유의 산문에 미학적 흡인력을 주는 이런 자질들은 심적인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 P86

마찬가지로 《중력과 은총》 전편에 걸쳐 근대 세계에서 도출되거나 근대 세계를 지칭하는 명사들은 몇 개 되지않는다. "무정부주의자들" "사회주의" "전체주의" "유럽"
그리고 "계급." 극단적인 희소성 덕분에 이런 단어들은 나타날 때마다 두드러지게 이목을 끌고 심지어 깜짝 놀랄 정도로 생경해 보인다. 베유가 자신을 반근대주의자로 설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베 - P88

베유의 산문에는 몹시 기초적이고 원소적인 구석이 있으며, 덕분에 베유는 친숙하고 아마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아득하게 거리감이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 구체성의 결핍 덕분에 베유의 산문은 번역이 쉽다. 특정성의 결핍 덕분에 문화적·역사적 차이의 감각이 아니라 그저 시간적 거리감만 창출하기 때문이다. - P88

베유는 <말의 힘>에서 추상에 대한 공포를 상술했다.
<말의 힘>은 베유가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와서 쓴 에세이로스페인 전쟁과 유럽의 전쟁광들을 트로이전쟁에 비유한 글이다. 베유는 추상 때문에 전쟁에 어떤 의미 있는 동기가 존재한다는 착각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 P89

베유는 자신의 시금석과 같은 개념들초연, 수난, 선악, 아름다움, 천형, 멸절, 죽음을 끝없이 되짚어 구체성의 질감을 부여한다. 명징하고 선명하게 설명하는 과정만이 이 "구체적 현실들"을 막대기, 동물, 연필과 같은 사물과 구분해줄수 있기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개념을 구체화하는 시도가 소위 베유가 자기주장을 밀고 나가는 강직한 태도에 깔려 있다. - P90

이렇듯 정의를 강조하면서 베유의 글에는 권위가 각인된다. 베유 본인이 《어느 신부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aPriest》에서 이 점을 주지시켰다. "앞으로 논하게 될 견해들은 내게 개연성이나 확실성의 정도가 몹시 다양합니다. 그러나모두가 내 마음속에서는 물음표를 수반하고 있지요. 그 의견들을 서술형으로 쓰는 건 오로지 언어가 빈곤한 탓이에요.
동사 활용형에 보완적 시제가 있어야 제 욕구가 충족되거든요. 성스러운 것들의 영역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범주적으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견해들도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물음표를 수반하고 있습니다."⁵⁰

50 Simone Weil, Letter to a Priest (New York: Penguin Books, 2003), 12. - P91

고통스러운 선명성은 베유의 문체에 대한 티봉의 논의에서 보았듯,
그리고 그녀가 사후에 남긴 에세이와 글에서 보듯 베유 자신의 미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베유가 단순성과 선명성을 추구한 배후의 한편에는 정치적 목표가 있다. 그리고 이 정치적 목표는 고통을주는 게 아니라 민주적이어야 한다.  - P91

베유의 전작은 물론이고 이 에세이의 직설과 명징성은 고유한 어법에서 나온다. 예컨대 선언문의 활용, 종속절보다는 등위절을 선호하는 경향, 병행 구문의 강조, 비유의 빈번한 활용(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와 같다)이다. 이러한 패턴의 어법은 베유 글의 균형과 수학적 엄정함을 생성하는 한편으로 권위적이고 가차 없는 어조를 창출한다. - P92

 베유의 산문 문체는 엄준한 단어 선택, 단순하고 직설적인 어법, 몰개성적인 대상을 상정한 화법, 반복과 재정의ㅡ 독자를 위로하고 꼬드기고 설득하거나 축소하고 미화하려는 일말의 시도도 하지 않고 난해한 화두에 곧장 직면하게 만든다. 베유가 빚어낸 명징하고 도발적인 문체는 윤리학이고 고통스러운 선명성의 정치학일 뿐 아니라 수난을 재현하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미학이기도 하다. - P93

베유는 산업 노동의 현실을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인민전선 Popular Front의 멤버들이 노동자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본 경험이 없다는, 그런 단순한 말이 아니다. "노동자 본인들도 그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하고 심지어 사색하는일을 쉽다고 느끼지 않는다. 수난의 일차적 효과는 생각으로하여금 꾸준히 도피를 시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유는 자신을 얽어매는 역경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SWR, 54, 강조는 필자) - P94

베유의 사유-동물은 욕망과 탐욕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구별된다. 사유-동물은 도망칠 수는 있으나 추구할 수 없다. 사유는 지극히 편협한 동물적 자질-고통의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로만 인간의 운동성을갖는다. 노동자는 기계보다 못한 존재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도구이거나 심지어 무용한 도구다. - P95

 베유는 당대의 여러 다른 지식인들보다 자동화 공정에 격렬하게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그 이유는 베유의 시각에서 인간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팔링 Robert Sparling⁵⁵에 따르면 자동화가 노동 혹은 소외된 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시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베유는 마르크스와 중대한 차이가 있다.

55 노동의 화두에 관해 베유와 마르크스의 관계에 대한 온전한 논의를 참조하려면 로버트 스팔링의 이론과 실천 노동의 품격에 대한 베유와 마르크스의 견해 Theory and Praxis: Simone Weil and Marks on the Dignity of Labor",
Review of Politics 74, no, 1 (2012년 1월호), 87-107쪽 참조 - P95

게다가 도구나 쓰레기라면 인간 행위주체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다. 이 인정(베유는 이 문제를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 더욱 상세히 묘사할것이다)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을 사물로 보게 된다.
그렇다면 사유는 사물, 몸에 살게 된 고통받는 동물이다. 사물인 몸 역시 자상, 타박상, 화상, 열기, 피로, 소음으로 늘 고난을 받고 있다. - P96

베유는 논의를 중간에 끊고 다시 한번 수난의 불가해성을 경고한다. 여기서 베유는 공장노동의 상황에 국한하지않고 수난과 사유를 좀 더 보편적으로 논한다. - P96

 공장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의미 있는 개혁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앎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 불행의 조건은 모두 은근히 인용되는 침묵의 영역을 창출하며, 이 침묵의 영역에서 불행한 개인은 섬처럼 외따로 격리된다. 섬에서 탈출하는사람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SWR, 64) 테니까 - P98

<공장노동>이 초연한 거리감을 유지한다고 해서 이에세이에 고통을 함께 하려는 감정(동정)이 결여된 건 아니다.
오히려 감상주의를 배제한 동정을 담고 있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베유는 작업에서 공감(감정)이 아니라 사려 깊음(사유)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수난의 사정 혹은 조건을 안다는 것을 수난자들을 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 P99

베유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나요?" 라는 물음이다. 그것은 수난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집단의 한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표본으로서 존재하는 게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느 날 천형이라는 특별한 낙인이 찍혀버린,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인식 말이다."⁵⁷

57 Weil, Waiting for God, in Simone Weil Reader, 64. - P100

 무엇을 느끼느냐, 혹은 어떤 감정이 드느냐는 물음이아니라 바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에 인간성을 복원해줄 수 있다. 이 물음은 서사를 도출하며,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수난자가 사유와 행동을 통합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수난자는 베유가 <공장노동)에서언급한 정신을 창출하게 된다. 사유와 행동이 동기화될 때사람은 정신mind을 갖게 된다. - P100

《중력과 은총》도 <공장노동>과 다름없는 몰개성적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공장노동>에서 주장하듯 수난자에게 의지력을 발휘해 주의를 기울이라는 언명을 주창한다.
흔히 나오지 않지만, "나"라는 일인칭이 보편적이거나 대표적인 "나"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개인적인 "나"가 끼어드는극소수의 순간들에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 P101

《중력과 은총》은 베유 신학의 역설을 조심스럽게 제련하는 사유 실험에서 수난의 본질과 신에 대한 베유의 사상을 시험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논리적인 강제와 순종하라는 간곡한 권고를 혼합한 구속적 의무들을 공표한다. 각각의 글과 나란히 한 세트를 이루는 단상들은 거의 항상 직설법으로 시작되며, 영의 자연법칙(예를 들어 중력 같은 것)에서도 종종 끌어오곤 한다. - P102

연역법

똑같은 수난이라도 동기가 저열할 때보다 고고할 때훨씬 견디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거나 진작하기 위해 잔인성을 구실로 삼는이유가 된다. 도덕적 취약성과 관련해 잊어서는 안 될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은 저열한 측에 힘을 보태주는 법칙의 구체적인 사례다. 중력은, 그 자체로, 그 힘의 상징이다. (GG, 46) - P103

. 베유의 글은, 형식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의지를 에워싸고 설득해 움직이게 만드는 논리와 의무의 비계를 거듭거듭 쌓고 지어 의지를 지탱하고 강화한다. 베유의 진화하는신학과 정치학에서 수난에 주목하고 수난을 체험하는 일, 특히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수난에 주목하고 실제로 겪는 일은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의지에 따라야 하며, 의지만으로는부족하다. - P104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 그랬듯 베유가 그 강력한 힘들을 직시하고자 자신을 단련할 때,
베유는 고통받는 타인을 거의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상호작용의 물리학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무관심의 자연법칙은 <공장노동>에서 묘사한 도망치는 사유와 침묵의 영역과 상당히 비슷하게 보인다.  - P105

《일리아드》는 베유가 보기에 서구의 전통에서 가장위대한 시다. 그러나 서구는 이러한 전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게 베유의 주장이다. - P105

 말 그대로, 진짜 시체가 에세이의 배경에 널려 있긴 하지만 베유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힘은 "죽이지 않는, 그러나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힘이다.(SWR, 165) 베유는 정복당한 전사, 사제, 노예와 병사들이두려움과 무력감에 금세 사물이 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하면 시간을 가로지르고 뛰어넘는다. - P106

승자의 자동적인 무관심은 전쟁에서 참담한 정치적결과를 낳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충동과 행동 사이에서 반추라는 아주 작은 간극을 끼워 넣을 능력이 있다. 반추의 여지가 없는 곳에는 정의나 신중한 배려가 끼어들 여유도 없다"(SWR, 173) - P107

"아마 인간은 모두, 출생이라는 행위 그 자체로, 폭력의 희생자가 될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이런 진실에 눈을 감을 수 있다."
(SWR, 173)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을 때, 우리가 고통스럽지않을 때, 우리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있을 때는 어김없이 우리와 천형을 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수난자들을 알아볼 수 없고 그들 역시 우리를 알아볼수 없다. - P108

 본질적으로 베유는 기독교의 비극적 감수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에세이 말미에서 베유는이러한 비극의 상실을 슬퍼하며 무섭게 불타는 분노를 아껴두었다가 인간이 지닌 자기기만의 능력에 쏟아붓는다. 그리스인의 삶에는 자기를 기만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 P109

자기망상의 문제는 베유의 글에서도 주된 관심사지만,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는 수난을 묵살하고 회피하고자하는 유혹이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번에도 베유는 일단 비극이 현실의 시험이라는 논의에서 시작한다. 수난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공간의 표식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현실을 부과한다.  - P110

 현실 파악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와 고통스러운 현실에 무방비로 노출되는것을 두려워하는 경우다. 두 경우 모두에서 현실 파악을 막거나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을 뭔가 비현실적인 것으로 대체해서 아픔을 덜어내는 기제는 상상력이다. 베유는 끊임없이 상상력을 의심하는데, 이는 미학적 창조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상상력의 일차적 목적이 우리를 방어막으로 에워싸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차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P111

 베유는 주관성을 꿈의 세계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제하고 세계의 주인노릇을 한다는 인간의 망상에 대한 질책이고, 부분적으로는자아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를 사랑해야 하고, 필연에 순종할 때에만 신이 창조한 세계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 P111

죽어간다는 것은 물리적 죽음은 물론이고 우리 각자의 자질과 이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애착이 영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을 포괄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공허를 채우려고 상상력이 나래를 펴지 않도록 계속해서 막아야 한다. 그 공허가 무엇이든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떤 운명의 장난이 우리가 우주를 사랑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주는 충만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GG, 64) - P112

《중력과 은총》에서 상상력은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현실에 대체재를 만들어낸다. 상상력은 창조적 기관 organ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가려 두려움의 대상인 현실을, 그 아름다움과 공포 모두를 보지 못하게 하는 파괴적 기관이다. - P112

 무기력의 신학적 쓸모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하고 제한적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천형이 지나고 남는 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고개를 들어 부재하는 신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수난을 활용"하려면 수난의 변모와 초월을 끌어낼 수도 있다.  - P113

우리는 이성을 따라 비극을 선택할 수 있고(그리고 베유는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논리로 우리를 설득했다) 논리적으로 더 정의로운 세계를, 그리고 더 직접적인 신의 체험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야만 한다. - P114

다이앤 아버스

카메라를 위한 감정

사진 찍힌다는 것은,
조금,
상처가 되는 것 같아.


다이앤 아버스,
마빈 이스라엘 Marvin Israel에게 보낸 편지 - P298

스타일과 공감의 문제

(전략). 왼쪽 구석에는 아이들로 보이는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이는 사진의 전경, 중앙에서 살짝 왼쪽이자 여러 등장인물이 만든 삼각형의 끝부분에 선명히 초점이 맞춰진 채, 다른 인물들이 없다면 텅 비어 있을 공원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는 느낌을 준다. - P299

이 사진은 다이앤 아버스가 찍은 <뉴욕 센트럴파크,
장난감 수류탄을 든 소년>(1962)으로, 가장 잘 알려진 아버스의 사진들 중 하나이다. 아버스의 사진과 글들이 최대 규모로 전시된 2003년 아버스 회고전 ‘폭로 Revelations‘의 박물관 도록에는 이 사진을 촬영했을 때의 밀착 인화지 contact sheet가 실려 있다. 이 아이를 찍은 11장의 사진들 중 오직 이 사진에만 뭔가 특출한 데가 있다. - P300

밀착 인화지는 아버스의 작업방식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촬영은 다른 많은 촬영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는데도 아버스의 인내심, 낯선 인물과 신뢰를 쌓는 그녀의 능력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밀착 인화지는 작업과정의 기록 이상을 보여준다. 이 사진을 연사로 보면 이 소년이 얼마나 특별하지 않았는지가 보인다. - P301

1972년 유작전 ‘다이앤 아버스‘와 2003년 회고전 ‘폭로‘ 사이에 두 권의 주요 사진집이 나왔음에도 이러한 분류가 계속 지배적이었다. 첫 번째사진집 《다이앤 아버스: 잡지 사진》 (1984) [이하 《잡지 사진》은 많은 잡지 중) 《하퍼스》와 《에스콰이어》, 《런던 선데이타임스》에 실린 사진과 에세이들을 모아 아버스의 상업적 커리어를 강조했다. - P302

 두 번째 사진집 《가족앨범》 (2003)은 아버스의 가족사진들을 모으고 아주 긴 시간동안 이루어졌던 가족 초상 촬영 작업에서 나온 밀착 인화지들을 복제함으로써 아버스가 가족 앨범과 스냅사진에 가졌던 지대한 관심에 집중했다.²

2 Diane Arbus, Family Album, ed. Anthony W. Lee and Hohn Putz (New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3). - P302

1967년의 ‘새로운 기록들 New Documents‘ 은아버스를 게리 위노그래드 Garry Winograd와 리 프리트랜더 LeeFriedlander와 함께 묶어 전시했는데, 이는 자르코우스키에 의하면 "삶을 개혁하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전시회는 5년 후에 열린 유작전 ‘다이앤 아버스‘로, 아버스를 일약 아이콘으로 만든 전시회였다. - P303

 자르코우스키는 아버스의 작품을 다큐멘터리 전통, 미국 개혁파와 (1960년대에 미국에 알려지게 된) 어거스트 샌더스August Sanders로 대표되는 유럽 분류파 양쪽 모두와 동일시하면서도 이에 들어맞지 않은 아버스의 작품 방식들도 지적했다. - P303

아버스가 다큐멘터리 전통의 사실주의적 충동을 이행했다는 것은 작품의 소재가 무엇이건 간에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르코우스키뿐만 아니라 최초의 아버스 비평가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전 손택을 통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아버스와 끈질기게 연관되었다. - P304

 손택은 아버스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고 수집하면서도 관객들에게 어떤
"온정적 목적"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지에서 아버스는 공감이 결여되었고, 그 사진들은 "무정함을 시험하는 제멋대로의 테스트", 즉 관객들을 추함과 고통에 익숙하게 해서 단련시키는 테스트였다.⁵

5 மSusan Sontag, On Photography (New York: Picador, 1973), 40. - P305

아버스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불러일으켰던, 그리고 다큐멘터리 장르를 통해 주목했던 불편함은 아버스를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중 하나로 공인한 2003년 전시회 ‘폭로‘에거의 만장일치의 찬사가 쏟아지면서 일소되었다.  - P305

 우선 그 불편한 강렬함은 아버스의 천재성의 일부로 당연시되었고, 천재라는 꼬리표 자체가 그녀의 독창성이 불러일으킬 호기심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196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적 이미지들이 더욱 광범위하고 다양해지면서 아버스의 소재들을 더 친숙하게 만들어주어 그녀의 작품을 변형시켜버렸다. - P306

하지만 결국 아버스를 온순하게 만든 것은 아버스의프로젝트에 부드러움, 열린 태도, 온정이라는 말로도 묘사될 수 있는 공감적 모티브를 귀속시킨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온정적 목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아버스가 위치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비평적 문제였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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