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기 혼자 힘으로 세계에 통일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성실과 무죄와 정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신 그 자체일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이후 반항은 그 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반항이 존재하는 것은 거짓과 불의와 폭력이부분적으로 반항하는 인간의 조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P491

그러나 반항하는 인간은 살인과 거짓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게 될 그 반대의 운동 역시 그의 반역할 이유를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P491

만약 그 자신이 결국 살인을 하게 된다면 그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기원에 충실한 반항인은 그의 진정한 자유가 살인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유라는 것을 희생 속에서 증명한다. 그는동시에 형이상학적 명예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칼리아예프는교수대 밑에 서서, 인간들의 명예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끝나는지 그 정확한 한계를 그의 모든 동지들에게 분명하게손가락질해 주는 것이다. - P492

역사적 살인

반항은 모범적 선택들뿐만 아니라 효율적 태도들을 아울러 요청하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기도 한다. 합리적 살인은 역사에 의해 정당화될 우려가 있다. 이때 반항의 모순은 얼른 보기에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 대립 관계 속에 투영된다. - P492

반항의 최초의 운동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적극적 가치는원리로서의 폭력의 포기를 전제로 한다. 이 가치는 결과적으로 혁명의 정착 불가능성을 초래한다. 반항은 끊임없이 이 모순을 그 안에 안고 있다. 역사의 차원에 있어 이 모순은 더 한층 굳어진다. 만약 내가 인간의 정체성을 존중케 하기를 포기한다면 나는 압제자 앞에 굴복하는 셈이며 반항을 포기하고 허무주의적 동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된다. - P493

역사란, 그것을 변모시키는 가치가없이는, 효율성의 법칙에 지배된다. 역사적 유물론, 결정론, 폭력, 효율 지향이 아닌 일체의 자유를 부정하는 태도, 그리고 용기와 침묵의 세계는 모두 어떤 순수 역사 철학의 가장 정당한 귀결들이다. - P493

가령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그는 끝까지 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역사를 선택한다는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만약 역사에 살인이 필요하다면 역사와함께 살인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살인의 정당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반항의 기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반항하는 인간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침묵과 타인의 노예화를 선택하는 셈이다. - P494

정의와 자유에 대해서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이 두 요구는이미 반항 운동의 원리 속에 포함되어 있고 혁명적 충동 속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 P497

 절대적 정의는 일체의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를 파괴한다.²⁹⁶ 자유에 의한, 정의를 위한 혁명은 결국 양자를 서로 적대 관계로 만들어 놓게 된다. 



296) 장 그르니에는 『자유의 선용에 대한 대담(Entretiens sur le bon usagede la liberté)』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하나의 논증을 보여 준다.
절대적 자유는 일체의 가치의 파괴이고, 절대적 가치는 일제의 자유의 말살이다. 마찬가지로 팔랑트(Palantc)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오직 하나뿐인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면 자유는 존재 이유가 없다."(원주) 조르주 팔랑트(Georges Palant, 1862-1925). 프랑스의 철학자, 생브리의 대학교 교수그는 카뮈가 좋아하는 작가이며 조르주 팔랑트의 제자인 루이 기유(LouisGuilloux)의 소설 『검은 피에 등장하는 인물 크리퓌르의 모델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생브리외에서 그와 알고 지냈던 장 그르니에는 1955년 자신의소설 ‘모래톱(Les Gréves)에서 조르주 살랑이라는 인물을 동해시 이 철학자의 모습을 환기시킨다. 팔랑트는 반항하는 인간의 마음가짐」(1902)이라는 글에서 반항하는 인간과 만족한 인간, 반동적 반항인과 능동적 반향인을 대립시킨다. - P495

그러나 이러한 이율배반들은 오직 절대 속에만 존재한다.
이 이율배반은 중재 없는 세계와 중재 없는 사상을 전제로 한다. 과연 역사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신과 일체의 초월성을 제거해 버린 역사 사이에 가능한 화해란 있을 수 없다. - P496

과연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나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충분한 하나의 전체로 생각하는 것도 역시 현실로부터 스스로 유리되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혁명은 신을 역사로 대체시킴으로써 허무주의를 피하고 참된 반항에 충실하다고 여긴다. - P496

이 사상이 보상으로서 역사의 절대적 합리성을 내세워 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이 역사적 이성은 역사 끝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되어 완전한 의미를 가질 것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절대적인 이성, 그리고 가치가 될 것이다. - P497

정치적 태도로서의 시니시즘은 오직 절대주의적 사상, 즉 한편으로는 절대적 허무주의로서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합리주의로서만 논리적이다.²⁹⁷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이 두 태도 사이에 차이점이란 없다. 이 태도들이 받아들여지는 순간부더 대지는 사막이 된다.
사실상 순전히 역사적인 절대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297) 우리는 또한 절대적 합리주의는 합리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점은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는 시니시즘과 리얼리즘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전자는 후자에게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한계 밖으로 후자를 밀어낸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절대적 합리주의는 결국 덜 효율적이다. 그것은 힘 앞에서의 폭력이나 (원주) - P497

만일 반항이 어떤 철학을 정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오히려 어떤 한계의 철학, 정확하게 계산해 본 다음 어느 정도의 무지를 인정하는 철학, 위험을 부담하는 철학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죽이지도 못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역사를 하나의 절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아니라 그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의 이름으로 역사를 거부하고 역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 P498

반항하는 인간들은 이후 신격화되는 어떤 역사에 항거하여 떨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혁명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특유의 속임수는 부르주아의 속임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고있다. 그들은 절대적 정의를 약속하면서 영구적인 불의와 한없는 타협과 비열함을 슬그머니 정당화한다. - P499

신과 역사 사이에서, 요기와 경찰 사이에서 반항은 하나의 어려운 길을 연다. 모순이 살아갈 수 있고 초극될 수 있는 그런 길을 말이다. 그러면 이제 예로서 제시했던 두 가지 이율배반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본래의 기원과 어긋남이 없고자 하는 혁명적 행동이란 상대성에 대한 적극적 동의로 요약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바로 인간 조건에 충실할 것이다. - P499

폭력에 근거를 제공하는 질서가 지도자 원리‘이든 이른바 ‘역사적 이성‘이라는 것이든, 폭력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라 사물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살인하게 될 때 그는 그 살인을 자기 자신의 죽음에 의해 인정해야 하는 극한적 한계라고 생각한다. - P502

목적이 절대적인 것일 때, 즉 역사적인 시각에서 목적이 틀림없는 것이라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타인들을 희생시키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다.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아닐 때, 사람들은 인간 공통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라는 도박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 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 - P503

허무주의적인 것이든 실증적인 것이든 간에 오늘날의 모든성찰은 때때로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사물의 절도의 존재를 드러내고 또 과학 자체가 이 절도를 확인해 준다. 양자론과 지금까지의 상대성 이론, 불확실성의 관계들은 중간적 크기들의 척도에서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척도다.²⁹⁸ 규정 가능한 현실성이 있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하고 있다. 

298) 이 점에 대해서는 라자르 비켈(Lazare Bickel)의 탁월하고도 흥미로운 논문 「물리학은 철학을 확충한다(La physique confirme la philosophie)」참조할 것(원주) - P509

물질적 힘들의 경우에도, 그 맹목적인 작동 중에 문득 그것 자체의 절도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기술을 뒤로 물리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은 이미 도르래의 시대가 아니므로 수공업적 문명을 꿈꾸는 것은 헛된 일이다. 기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날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이 나쁜 것일 뿐이다. - P507

이 절도의 법칙은 또한 반항적 사상의 모든 이율배반들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현실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니고합리적인 것이 온통 다 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를 살피면서 확인했듯이, 통일성의 욕망은 단지 모든 것이 합리적일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 P508

실존과 생성 변화의 차원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본질을 파악할 것인가? 그러나 존재란 실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항상 생성 변화중에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P508

도덕적 이율배반들 역시 이 중재적 가치의 빛을 받음으로써 해결되기 시작한다. 미덕이란 현실과 분리되면 반드시 악의 원리가 된다. 그리고 미덕은 현실과 절대적으로 일치하게되면 반드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 반항에 의해 태어난 도덕적 가치는 역사와 삶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 P509

 인간은 결국 전적으로 유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역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무죄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역사를 지속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 전적인 무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결정적 유죄의 광란 속에서 끝장난다. - P510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 안에서든 타인들에게 있어서든 짓밟히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인간공통의 존엄성을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 P511

절대적 부정

역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논리 정연한 공격은 사드의 공격으로, 사드는 델리에 신부와 볼테르에 이르는 리베르탱 사상의 논거들을 한데 모아 단 하나의 거대한 공격 무기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 P73

문학인

사드는 무신론자인가? 투옥되기 이전 「어느 사제(司祭)와 어느 죽어 가는 사람의 대화」에서 그가 자기는 무신론자라고말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그 뒤 그의 광적인 독신을 목격한 우리는 그같이 단정하기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가장 잔인한 인물들 중 하나인 생퐁은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 P75

적어도 사드가 신에 대해 품고 있는 개념은 그러므로 인간을 짓밟고 부정하는 범죄적 신의 개념이다. 사드의 말에 의하면, 살인이 신의 속성이라는 사실은 종교의 역사에서 충분히드러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말인가? - P76

사드는 자신의 절망적 세계관과 수인이라는 조건이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터인 이 개념을 정작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사드의 추론을 이끄는 것은 이중의 반항이다. 즉 세계의 질서에 대한 반항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이 그것이다. - P76

사드는 아마도 어떤 범세계적 공화국을 꿈꾸었던 것 같다.
그는 현명한 개혁자인 작중 인물 자메를 통해 그 공화국에 대한 구상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반항의 운동이 가속화하고 점점 더 한계를 벗어나게 됨에 따라 반항의 한방향이 세계 전체의 해방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P78

사드의 공화국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libertinage)을 원리로 삼는 것이다. 이 기이한민주주의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정의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정념들의 신이다." - P78

그러나 그의 사상이 가장 심오해지는 대목은 여기다. 그는그의 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자유와 미덕의 주제넘은 결합을 거부한다. 자유란, 특히 그것이 수인의 꿈일 때는한계를 모르는 법이다. 자유란 범죄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다.  - P80

그러나 사형에 대한 그의 증오는 우선 자기 스스로 죄인들인데도 자기들의 도덕성 내지 자기들의 명분의 도덕성을 너무나도 굳게 믿은 나머지 감히 남을,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징벌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였다. 자기 스스로 죄를지으면서 동시에 타인들을 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81

 의미심장한 일치지만, 공화국 최초의 폭동으로 인하여 『소돔의 120일³⁴』의 원고가 불타 버렸는데 과연 그 공화국은 당연하게도 이 이단적인 자유를 고발하고, 이 위험천만의 동지를 또다시 감옥 속에 처넣어 버렸다. 

34) 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사드의 대표작의 하나로 온갖 변태 성욕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소설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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