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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 여자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적인 이야기
김박은경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11월
평점 :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진다니!! 뭔가 비장하기도 하고 멋있는 표현 같다. 책 안에는 작가만의 비밀이 가득가득할 것 같아서 목차를 보며 설레었다. 하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비밀스럽다기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고민하고 고뇌하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자사람으로서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보여준다.
책에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구, 영화 속 대사 등이 자주 나온다. 덕분에 작가가 소개해 주는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몰랐던 외국 시인이나 소설가도 검색해 보고 말이다. 하나의 책에서 작가가 추천해 주는 책이나 책의 글귀들을 마주하는 것이 좋다. 작가 역시 어느 작가의 책을 읽다가 책 소개가 나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책을 읽는다고 한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도 읽어봐야겠다. 사랑하는 건 맞지만 내일은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우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충격이다.
P.305 "사랑은 언제나 순간의 것. 영원히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비문에 속한다. 영원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 불가해한 것."
작가의 글은 다소 길고 문장의 호흡이 가파르다. 이런 글은 여유 있을 때 읽어야 좋다. 시간에 조바심 내지 않도록. 오후 주말에 침대에 기대어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도 좋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있을 때 말이다. 작가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쓴 것 같다. 왜 여기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생뚱맞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글의 제목을 보고 아하! 이래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식이다. 대놓고 자신이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지 말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아이들의 엄마로서 오롯이 희생하는 여자가 아니라서 좋았다. 아이들과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지금 작가가 하는 일을 중요히 여기고 작가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사랑하고 있어서 멋있고 부러웠다. 나로 인해 책임질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그들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비혼과 아이 낳기를 고민했다던 작가의 이야기는 우리 여성들 모두의 이야기이도 하니까.
P.170 "언제든 스스로를 믿을 것. 세상에 믿을 건 그것 하나뿐이니까. 거대하고 무한하여 상상 이상일 테니까."
어렸을 적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지금은 연로하신 아버지와의 일들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따뜻하게 한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버지는 딸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울컥해진다. 엄마한테 징징거리고 싶어도, 일찍 돌아가신 엄마는 이제 곁에 없어서, 그럴 수도 없는 딸의 서러운 마음이 느껴져서 더욱 슬프고 말이다. 엄마한테 잘해주지 못한 기억만 생각나서 후회하는 딸의 절절한 마음.
P.266 "기침이 멈추지 않으면 울고 싶어진다. 참을 수가 없고 숨길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기침을 해도 달려올 엄마가 없으니까."
P.332 "타인은 그야말로 '지옥'이고, 그 지옥에서 나는 을이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거취 같다. 그런 자리는, 그런 관계는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다."
나 외에는 타인이다. 가족조차도. 세상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싸우지 않고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타인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삐걱거릴 때는 거리를 두라고 작가는 말한다. 완전 공감이다. 거리를 둠으로써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이 여기서 이렇게 끝인 거구나 하고 자연스레 연이 끊기기도 하겠지만 연이 계속 이어져있다면 거리를 두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이어져가겠지. 누구에게 허락을 구할 일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사람 사이의 연을 갖다 붙일 수도 없는 노릇.
사는 게 바빠서 점점 잊히고, 서로의 손을 놓아버린 친구와 지인들에게 쓴 편지글 같은 글도 참 좋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나 어떻게든 잘 살고 있겠지라는 믿음이 동반된, 한때 시절 인연을 같이 보낸 동무에게 작가는 참 다정하게도 안부를 묻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글을 쓰고 기록하고, 읽기를 권장한다. 비밀을 만들고 공유하고 그것을 쓰라고.
작가의 독려 덕분인지, 잠시나마 나도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