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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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무늬』, 고종석, 개마고원, 2002'그러나 집단주의자가 집단을 사랑하듯 개인주의자가 개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나 강렬하고 자주 지배욕을 동반해서, 보상을 받지 못할 경우 흔히 배신과 증오로 전화하기 쉽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을, 그러니까 타인을 '존중' 한다'- <자유의 무늬> p252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개인주의적 상상력은 지금 공산주의를 대치해 지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커다란 집단주의, 예컨대 종교적 근본주의나 약화된 파시즘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지역주의나 이런저런 연고주의 같은 작은 집단주의에 대한 처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악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 도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 <자유의 무늬> p257

고종석은 자본주의를 무시하고 사회주의를 증오한다. 전체주의와 획일주의를 저주하고 권위주의를 혐오한다. 대신, 윗글에서 보여지듯 고종석은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영원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악을 목표로 삼는 도덕의 출발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최대의 선을 표방한다는 이유로 소수파를 제거하고 세상을 피로 물들인 야만은 셀 수 없이 많다. 유토피아니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만들고자했던 정반대의 세상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런 '사랑', '최대의 선'이 초래한 역사를 고종석은 단순한 오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은 일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최대의 선은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종석은 최소의 악으로써의 개인주의를 표방한다. 언젠가부터 똑 부러지게 말 잘하고, 신념에 가득찬 발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을 보면 불편함을 느낀다. 반대로 좀 어눌하고,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커다란 편안함을 느끼곤한다. 어눌한 사람은 상대방을 억압하는데도 어눌하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은 함부로 나대거나 까대는 일에도 능력이 부족하다. 십자군 전쟁, 문화혁명, 킬링필드, 마녀사냥, 유태인 학살, 빛고을 5.18....모두가 똑 부러지게 말 잘하고, 신념에 가득찬 이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거창하게 들먹이지 않더라도 '똑 부러지는 사람'들의 좀 심한 오류는 심각하다.

사람들로부터 똑 부러지게 말 잘하고, 신념 있어 보인다는 말을 많은 들은 그동안의 내 삶을 보면 그 오류와 허망함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거창한 사람들보다 어눌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거창함은 차별과 억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종석의 개인주의를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9할 정도는 지지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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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구) 문지 스펙트럼 10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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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들녘을 적시고, 사람들의 피와 땀을 담아 오늘도 끊임없이 흐르는 섬진강을 향한 동경을 품고 있다. 섬진강이 가지고 있는 아늑한 정서는 거친 내 정서를 부드럽게 해준다. 남도에 우뚝 솟아있는 지리산을 사랑한다. 자연적 조건만이 아니라 남도에서 피어난 질척하고 끈덕진 인간의 역사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내가 가지고 있는 남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홍성원의 <남도 기행>을 들게 만들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책은 남도의 살가운 자연과 끈끈한 그곳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목 하나만 바라보고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이다.

중단편 「설야」, 「남도 기행」, 「즐거운 지옥」, 「폭군」으로 구성된 이 책이 그나마 남도를 다루고 있는 것은 단편 「남도 기행」뿐이다. 그것도 남도를 생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이순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낚시 친구 선두 김씨의 말을 통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틀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대적 상황에' 둔감하게 살아가는 삶의 반성을 말하고 있다. 이런 단편 「남도기행」은 내 예상과 상상을 빗나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신선함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이 땅에 나타난 커다란 호랑이와 사냥꾼 노인의 집요한 대결을 그린 「폭군」은 이야기 자체의 흥미도 그렇거니와 삶을 반성하게 하는 힘있는 소설이다. 두메마을에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거대한 호랑이에게 적개심 대신 신령스러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 모습을 보며, 그동안 우리가 '독재자' '폭군' 아래서 수십년간 신음했던 원인을 반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호랑이와 그것을 꿰뚫어 아는 노인의 대결은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폭설이 내린 산속에서 쫓기는 호랑이와 쫓는 노인의 모습은 동양화적 이미지다. 마지막 순간에 결국 호랑이와 노인이 서로 부둥켜 안고 눈밭에서 죽은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삶을 통해 진지한 장인정신의 자세로 대상을 다루고, 사물을 대하지 못한 아둔한 우리네가, 끝내 서로를 존경하게 된 노인과 호랑이의 죽음을 어찌 쉽게 이해하겠는가.

결국 홍성원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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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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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95년 봄. 언제나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 게슴츠레한 눈빛을 하고 다니는, 일명 '구영탄'이라 불리우는 여자선배를 만나 친하게 지냈다.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구영탄' 선배는 어린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말은 내 마음에 착착 와 닿았다.

구영탄 선배는 저학년 시절에는 물론이고 그때에도 시집이나 소설책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 나처럼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땐 선배들이 그런 '나약한 책'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고 읽지 못하게 했고, 그 후 시집이나 소설책은 선배의 마음속에 절대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구영탄 선배가 이 이야기를 해준 것은 나도 '나약한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 아닌 명령에서였다. '넌 눈물이 많아서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친절한 말을 덧붙여서 구영탄 선배는 내게 금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선배가 그랬듯이 그 후 시집이나 소설책은 내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모든 시집이나 소설이 금서는 아니었다. 박노해, 백무산, 브레히트는 좋은 시인이었고, 그들의 시만이 예술이었다. 소설가는 막심 고리끼, 황석영, 조정래, 조세희 뿐이었다. 이들이 아닌 다른 작가의 글은 운동가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글이었고, 그야말로 쓰레기 중의 최고 쓰레기였다.

박노해가 언제나 박해받는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타령을 하는 시도 충분히 아름다우며, 노동자가 주인공이 아니고 계급투쟁에 관한 주제가 아닌 소설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 스스로 규정해 놓은 금서는 아주 오랫동안 해제되지 못했고, 그것은 내 문학적 취향과 관심을 상당히 좁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나는 문학을 단순히 도구적, 즉 사회변혁에 이바지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런 문학만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인식했다. 인간을 반성하게 하는 것은 여러 방법과 길이 있듯이, 문학도 세상을 성찰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를 고발하는 표현방식은 많다는 것을 몰랐다.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금서가 남아있고, 아직도 협소한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성석제의 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당연히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의미 이전에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서 의미와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지, 의미 속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황만근....>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해 읽는 내내 행복했고, 문학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허술하지 않은 탄탄한 구조의 이야기만이 섬뜩하리만큼 예리한 반성과 성찰을 불러온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거대한 소재와 의미심장한 주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의 가벼운 소재와 소시민의 삶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가 그 근거이다.

아이엄마가 된 구영탄 선배는 과연 금서를 해제시켰는지, 요즘은 시도 소설도 읽는지, 그래서 가끔 나약해진 마음도 느끼고 나약한 마음이 세상 살아가는데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궁금하다.

가끔 구영탄 선배가 그립다. 만나면 이 책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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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 (구) 문지 스펙트럼 6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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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빛은 강렬하다. 핏빛은 마음속 깊은 곳 예민함을 건드린다. 잔인하면서도 강렬한 핏빛은 生의 강렬한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삶을 꿈틀거리게 하고 가끔씩 분출되는 내면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것도 핏빛 붉음이다.

그와 반대로 핏빛은 암울과 죽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광주 망월동의 죽음 앞에 서면, 지리산에 올라 그 산을 적셨던 수많은 죽음을 떠올리면, 의병과 만주독립군을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그 순간, 내 안을 채우는 빛은 핏빛이다. 암울한 핏빛.

회화적인 느낌이 강한 <붉은 수수밭>을 지배하는 빛은 제목처럼 붉은 빛이다.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수수밭은 붉은 수수를 열매맺고, 빛을 받으면 붉은 파도처럼 일렁인다. 수수밭이 가지고 있는 붉은 빛은 수수밭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삶의 빛이기도 하다. 온몸의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간 루어한 아저씨, 붉은 수수밭 한가운데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의 열망을 간직한 채 죽은 할머니, 왜놈들과 싸우다가 머리가 깨지고 심장이 터져 죽은 까오미縣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용맹한 할아버지 위안아오의 삶도 열정의 붉은 빛이다.

이런 붉은 빛은 존경과 경이의 상징이다. 위대한 삶이 빛을 발한다면 그 빛은 붉은 빛일 것이다. 영혼이 이끄는 곳으로 가는,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땅히 가야할길이기에 묵묵히 걸어가는 삶은 위대하다. 그런 삶은 붉다.

내 삶은 전혀 붉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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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문지 스펙트럼 4
윤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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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글쓴이를 반영한다. 글쓴이의 모든 것이 아닌 일부를 담고 있다. 특히 글은 삶의 짧은 순간과 마음을 잘 나타낸다.

작가 윤후명. <귤>을 통해서 처음 만나봤지만, 그동안 이름은 숱하게 들어왔다. 어떤 인물이고, 무엇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풍문보다는 그냥 그의 이름말이다. 처음 접해본 윤후명이기에 주관적으로라도 평가를 내리기가 조금 뭐하다. 첫인상으로라도 이런저런 평가는 내릴 수 있지만 이렇듯 내가 평가를 유보하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윤후명에 대한 기대 혹은 긍정적 생각이 있었나보다.

<귤>에서 만났던 그의 단편들은 평소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글이었다. 몽환적이며, 한 곳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작은 바람에 쓰러지는 것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 존재에 대한 회의와 끝없는 방황. 이런 내용과 분위기 <귤>을 지배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이런 존재를 나타낸다.

'문득 내 눈에 그녀가 검은 숲에서 흰 숲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곳 사람들은 찌개를 못 먹어요. 검은 숲이 아니라 흰 숲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이루고, 여자도 못 찾고, 헤매기만 하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이제 마을에 도착하면 밤은 더욱 막막하리라.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현실의 삶도, 직장도, 정신적 지주도, 종교도, 나는 내 것으로 한 것이 없었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순간적이지만 완벽하게 평화로웠습니다. 먼 불빛이 일렁일렁 가까워지는 듯했다.'
- <귤>p112. 「검은 숲, 흰 숲」

아마도 책에 실린 글을 쓴 당시에 윤후명은 깊은 방황 속에서 세상을 떠돌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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