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문지 스펙트럼 4
윤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글은 글쓴이를 반영한다. 글쓴이의 모든 것이 아닌 일부를 담고 있다. 특히 글은 삶의 짧은 순간과 마음을 잘 나타낸다.

작가 윤후명. <귤>을 통해서 처음 만나봤지만, 그동안 이름은 숱하게 들어왔다. 어떤 인물이고, 무엇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풍문보다는 그냥 그의 이름말이다. 처음 접해본 윤후명이기에 주관적으로라도 평가를 내리기가 조금 뭐하다. 첫인상으로라도 이런저런 평가는 내릴 수 있지만 이렇듯 내가 평가를 유보하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윤후명에 대한 기대 혹은 긍정적 생각이 있었나보다.

<귤>에서 만났던 그의 단편들은 평소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글이었다. 몽환적이며, 한 곳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작은 바람에 쓰러지는 것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 존재에 대한 회의와 끝없는 방황. 이런 내용과 분위기 <귤>을 지배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이런 존재를 나타낸다.

'문득 내 눈에 그녀가 검은 숲에서 흰 숲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곳 사람들은 찌개를 못 먹어요. 검은 숲이 아니라 흰 숲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이루고, 여자도 못 찾고, 헤매기만 하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이제 마을에 도착하면 밤은 더욱 막막하리라.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현실의 삶도, 직장도, 정신적 지주도, 종교도, 나는 내 것으로 한 것이 없었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순간적이지만 완벽하게 평화로웠습니다. 먼 불빛이 일렁일렁 가까워지는 듯했다.'
- <귤>p112. 「검은 숲, 흰 숲」

아마도 책에 실린 글을 쓴 당시에 윤후명은 깊은 방황 속에서 세상을 떠돌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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