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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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쪽 읽다가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펼친 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몰두하면 잠을 잘 수도 없이 쑤시는 다리에 대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 줄 읽고 바로 그건 무리한 기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추리소설을 몰아읽을 때 사놓고 이 책만 따로 묵혀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이건 쉽게 술술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고, 내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장르 소설이 아닐지도 몰랐다.

SF, 팬터지, 동화, 로맨스, 무협, 추리, 스릴러, 역사... 꽤나 세세하게 구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소설을 비롯한 여러 매체는 두 부류로만 나뉜다. 신경을 당겨서 읽는 책, 느슨하게 읽는 책.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작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 특별히 어느 쪽이 재미있다 없다도 아니고 가치있다 없다도 아니고, 그저 충분한 에너지가 없을 때는 볼 수 없는 소설/영화/기타 등등이 있고 그럴 때 오히려 충전지가 되는 소설/영화/기타 등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르 소설은 많은 경우 후자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밀라...'는 장르 소설이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길게 설명했지만 결국은 이 책이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소설이었다는 얘기다.

하필이면 정신을 집중해서 뭔가 하는 것이 무리인 상태에 이런 책을 잡다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이틀에 걸쳐서 느릿느릿 스밀라를 따라갔다. 확실히 그 정도 매력은 있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걸작이라거나 너무 재미있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쩐지 한 번 더 읽어봐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딱 잘라서 '이러이러했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는 찜찜한 기분. 그러나 여전히 읽을 만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은 상태.

단순한 감상은 적을 수 있다. 누구나 말하듯, 스밀라가 정말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 이건 사실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이야기. 읽기 전에는 이게 이렇게 하드보일드인지, 이렇게 스케일이 큰지 몰랐다는 이야기. 빛나는 구절이 많았다는 이야기. 읽으면서 영 호흡이 맞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결국 컨디션 문제가 겹쳐서 생긴 망설임일까? 아니,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호흡은 정말로 독특하다.

그놈의 찜찜한 기분을 해결해보려고 이렇게나 길게 내용없는 얘길 써봤지만, 여전히 해결은 안났다. 역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호흡을, 혹은 방식을 달리해서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다시 읽어도 별 다섯 개를 매기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별 셋은 도저히 줄 수 없을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찬찬히 곰씹게 되는 소설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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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 신화전기시리즈1
앤드루 달비 지음, 박윤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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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전기'라는 시리즈명과 마침 그리스 신 중에 제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디오니소스를 다루었다는 점 때문에 읽어봤다. 일리아드, 오딧세이, 신통기와 변신, 그리고 여러 희곡에 나온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두루 엮어 진짜 살았던 사람의 전기처럼 엮은 책.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이지 12000짜리 양장본으로 만들 내용은 아니다.

한 가지나마 명확한 장점이 있으니 조금만 소박하게 냈어도 평가가 높아졌을 것을... 그래도 양장본이라야 좀 팔린다고들 하니 한숨만 나올 뿐. 어쨌든 그 명확한 장점이란 이거다. "신화에 정본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

당연한 진리임에도 신화학(신화읽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이 아니라 '인도 신화', '중국 신화' 하는 식으로 엮어내는 신화책만 주로 접했을 경우에는 놓치기 쉬운 사실. 아니 이 나라 교육의 '정답 강박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군신화 중에도 다들 아는 삼국유사본과 다른 줄거리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알려져 있지 않은지. 그리스 신화처럼 이미 한 번 죽었던 문화라서 채록이 불가능하고 문헌으로밖에 알아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는데도 한 신의 탄생이나 업적에 관한 일화가 이만큼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장점에 비해 아쉬움은 너무 많다. 내용은 싱겁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조금만 깊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새로 얻을 사실이 거의 없다. 신화학적인 해석을 원했다면 더더욱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책 형식의 신화서적만 몇 권 읽어본 독자라면 이 책의 접근방식이 유효할 수도 있겠다. 자료 출처를 명확히 밝혀놓은 것도 깊이 면에 대한 보강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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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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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좋은 책.

한편으로는 사멸해가는 언어의 보호가 생태계 보호나 동물 보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쓴 책이지만, 현재의 언어 상황과 그 역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원인을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총체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 했다. 언어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어적인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은 생물학적/생태학적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과 거의 일치하며, 사멸해가는 소수 언어들의 상황은 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심과 주변, 다수와 소수, 지배와 억압의 체계 전체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나의 식물이, 동물이,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고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창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자 우리가 엿볼 수도 있었을 세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자는 것은 단순히 그 언어를 박제화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박제화도 차선책, 혹은 지연책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언어가 위기에 처한 상황 전체를 보고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호소다. 아무리 몇천명, 몇만명의 소수민족이 쓰는 언어라 해도 그 언어가 열등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유럽인들의 대량 학살 때문에 많은 언어가 사라졌고, 지금은 경제적인 압박과 제1세계의 산업에 유리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자 지원과 자본주의 논리와 되풀이되는 중심-주변의 폭력 때문에 또 많은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언어가 사라져갈 때 그 언어의 주인들은 언제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게 마련이다. 

고릴라의 멸종을 막는 것과, 숲과 초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 무기상들만을 위한 잔치로 전쟁을 벌이거나 무도한 독재자들을 지원하여 굶어죽는 아이들이 무수히 나오게 만드는 짓을 막는 것,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그럭저럭 살만한 사람들도 박탈감과 피로에 시달리게 만드는 시스템을 막는 것, 그리고 소수민족이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전통을 버리고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술에 찌들어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미국에서 흑인과 인디언의 지능평가가 낮게 나오는 이유는 그 지능평가의 기준이 '영어'와 그와 연결된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주변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
을 경멸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추레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무엇보다도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되지 않는 사회와 삶을 누리는 것, 이것들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며 당연히 해결 역시 단독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생태계의, 자연의 원리는 강한 것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사실 이것 자체도 약육강식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기이하게 해석한 것이지만)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점.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외에도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어쩔 수 있나'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수많은 탄압과 폭력의 일화들을 읽다보면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자행되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면)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인데 아닌 척 발버둥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암울한 생각마저 몰려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자들의 호소는 마음에 남는다. 

다소 감정적으로 썼지만 -_- 책은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고 생각해볼 여지도 많다. 이 책을 읽고 당장 위기언어 보호론자로 돌아설 필요는 없다.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며, 폭넓은 역사해석과 언어학/생태학에 관련된 풍부한 사례가 들어있고, 글도 재미있고 읽기 편하게 썼으니, 그저 재미있게 읽고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만 가진다 해도 책 한권의 몫으로는 족하지 않겠는가.

덧. 한국어는 위기에 놓여있는 언어도 아니고, 소수어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어는 사용자의 숫자상으로 세계 14위의 '덩치 큰' 언어이며, 아직도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분화과정이 지속되고 있는 비교적 안정적인 언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멸해가는 언어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먼 것만은 아니다. 영어 공용화론도 그렇지만 각종 지방 사투리들도 '단지 중심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해결책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공식적으로 부과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잠재우려고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해결책은 권력의 불균형이 시정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현대화가 반드시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국민 국가의 대안이 되는 다른 형태의 통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민 국가 체제는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아래서 생겨났으며, 정치적 통일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언어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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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
아이작 아시모프 외 지음, 정영목, 홍인기 옮겨 엮음 / 도솔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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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보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말 그대로 걸작이 줄줄이 실린 걸작선이건만 절판되어 한동안 구하지 못했던 그 책들이 아닌가. 하지만 앞에 '마니아를 위한'이 붙은 것은 섭섭하다. 이 안에 담긴 단편 중 3분의 2는 SF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읽는다 해도 감탄사를 발할 만한 글인 것을...

장편도 좋지만, SF라는 장르 최고의 묘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촌철살인의 시원함이 아닐까. 여기 실린 20여편의 단편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수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특히 좋아하는 소설은 어슐러 르귄의 특징이 너무나 잘 드러난 단편 '아홉 생명'과 에일리언의 원작 소설을 쓰기도 한 반 보그트의 '괴물'. 하지만 그 외에도 모두 훌륭하다. 너무나 통렬해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소 괴로워하며 읽었던 코니 윌리스의 '사랑하는 내 딸들아'나 날카로운 페미니즘 시각이 돋보이는 팻 머피의 '채소 마누라'같은 소설, 뛰어난 반전을 자랑하며 처음 읽었을 때 말 그대로 전율을 금치 못했던 필립 K.딕의 '두번째 변종', 장중하고 무거웠던 장편과 달리 유쾌한 렘의 '용과 싸운 컴퓨터 이야기'...... 즐겁고 따스한 '은하치과대학'이나 너무나 잔인한 상황이 설득력 있게 느껴져 읽고 나서 아연해졌던 '째째파리의 비법',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던 '나는 불타는 덤불이로소이다'......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걸작 한권이 재판으로 나올 때마다 이렇게 기뻐해야 하는 SF팬의 처지가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최근 필립 K. 딕의 단편선에 이어 이 책도 다시 나왔으니... 다른 책도 새로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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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얼굴
니겔 발리 지음, 고양성 옮김 / 예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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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끼리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서로 엇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지식을 지닌 친구들이었던 만큼, 명확한 결론을 얻어낸다기보다는 부담없이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남의 생각을 듣는 난상 토론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처 신화와 종교가 왜 존재하는가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친구 하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난, 신화나 종교는 다 죽음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봐.'

그 말에는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은 왜 죽는가? 그 질문을 빼고는 우리가 왜 사는가를 물을 수 없다.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붙어있다는 사실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신은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이 존재하며, 언제든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수 있음을 안다. 죽음을 내세로 가는 통로로 여기는 이도 있고,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은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경험한 순간부터.

아, 거창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죽음에 대한 철학을 구구절절 풀어보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또 저들에게는, 또 그들에게는 어떤 현상인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의 순간만큼 인간성의, 그리고 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은 달리 없다.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기간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치뤄지면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현지인들에게 불길한 일을 좋아하는 까마귀라고 불린대도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장례식이라는 절차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장례식만큼 마을 사람들간의 인간 관계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죽음만큼 삶을 잘 비추는 거울은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얼굴>- 개인적으로는 '무덤에서 춤추기'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지만- 은 어찌 보면 잡기에 가까운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가 조사 중에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나직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명한 학자의 근엄한 진술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죽음의 기원에 대한 동화같은 신화들이 나오고 뒤이어 신문에 실린 기사 한토막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온갖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죽음을 둘러싼 삶의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기록들. 그리고 그것은 학자들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수필과 기획 기사 중간쯤 위치한 듯한 애매함이나 산만한 구성이 딱 마음에 차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처럼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에서 밀어내려 하는 시대에 이런 책 한권쯤 봐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관심이 생긴다면 더 찾아보면 더 좋겠고 말이다. 내용은 쉽게 읽을 수 있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번역을 맡은 이가 인류학과 무관한 까닭에 일부 문장이 맥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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