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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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  p141


연애가 담고 있는 감정은 무한하다. 차분한 만남부터 격렬함까지, '연애'라는 것은 어느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없는 마성의 단어다.
연애에 빠진 순간부터는 그 누구의 말도 귀에 진중하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연애와 관련한 충고라면 더더욱 그렇다.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연애'에만 직진했다가 모든 감정이 뒤흔들린 다음에야 발을 뒤로 빼게 된다. 그리고 나면 직접 경험했던 '연애'의 잔가지들뿐만 아니라 숲이 비로소 보인다.

숲이 보였을 때에 이르러서야 후회, 미련, 아쉬움, 경멸, 분노 같은 감정들이 쏟아진다. 비난을 막 상대방에게 퍼붓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기도 하고, 그 때 왜 충고나 조언을 귀에 담지 않았나 후회하기도 하고 최선을 다한 시간이기에 미련 없이 뒤돌아 서기도 한다. 처음엔 이 하나하나의 감정들, 사건들이 너무 특별한 일로 다가왔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니 사람 사는 인생사 중 하나의 문장 정도로 여겨진다. 어찌 보면 젊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대였던 케이시가 테니스 클럽에서 만난 수전 맥클라우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이 단순한 문장 하나로는 사귀나 보다, 연애하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흔한 연애의 시작은 아니었다. 수전 맥클라우드는 케이시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를 순수하게 남자와 여자로 놓고 보면 이들의 연애 이야기는 무지 설레고 긴장감 있고 다정하다. 문제는 이들이 이들만의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산다는 거다. 그러기에 케이시의 부모님, 수전의 남편, 수전의 딸들 등 부딪쳐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 p180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방과 함께 나누는 시간 안에 기억이 차곡차곡 쌓인다.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그 기억은 연애와 함께 공유된다. 서로에게 빠져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연애의 기억은 선명해진 상태가 되지만 서로의 관계 거리가 멀어지게 되면 그 기억은 희미해진다.
수전 맥클라우드가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떠나 케이시와 함께 동거를 하게 되면서 그저 두 사람만 서로 바라보며 집중했기에 지금 당장에만 꽂혀있던 시선이 점차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일상이 지속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둘만 함께 있다면, 사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전은 남편과 함께 살 때보다 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케이시와 함께 있으면서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수전, 두 사람의 연애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건지. 현실과 맞닿은 사랑을 지키는 방법을 케이시와 수전은 혹독함을 치뤄가면서 느낀다. 수전을 남편의 폭력에서 구해냈지만 케이시와 함께 지내는 일상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케이시의 하루하루도 점점 연애의 기억으로부터 눅눅해져 간다.

그의 사랑은 사라졌다, 쫓겨나버렸다, 달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하지만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랑을 대체한 감정이 전에 그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만큼이나 격렬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그의 심장은 전과 마찬가지로 동요했는데, 다만 이제는 그녀가 그의 심장을 진정시켜줄 수 없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마침내 그녀를 되돌려줄 수 밖에 없을 때가 왔다.
- p313

열 아홉살이던 케이시에겐 무지 잔혹한 연애의 기억이 생겼다. 단순히 사랑하다 이별하는 기억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사랑하는 사람이 빛을 바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연애라니. 케이시는 결국 수전을 그녀의 딸에게 되돌려준다. 필요하다면 그녀의 치료비도 지원하겠다고 연락하라고 말을 남긴다. 가끔씩 수전이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러 간다. 수전이 그를 기억해낼 땐 그녀와 나눴던 연애의 기억이 선명해지다가 수전이 그를 타인으로 인식하면 그 기억은 색을 잃어간다.

어느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연애의 기억은 어찌 됐든 흐려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서, 혹은 색깔이, 기억 속 내용이, 상대방에 대한 모습이. 그 기억을 방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잘 기억해내려 한 케이시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전과 함께 한 연애의 기억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 모습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빽빽하게 담겨 있는 걸 읽고 있으니 숨이 차오르기까지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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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나로 살 것인가 -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기술
로렌 헨델 젠더 지음, 김인수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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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변명의 유형이 있다. 변명은 매우 똑똑하다. 노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당신이 그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둘러대면서 못 하게 한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보험에 가입하는 순간, 변명이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짜가 아니다. 당신은 행복, 자존감, 자부심이라는 보험료를 치러야 한다.
- p85

진실은 자신이 책임지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얻을 수 있는 오묘하고도 귀한 선물이다.
- p242~243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의 느낌이 나는 책은 선택하지 않는다. 매번 그런 류의 책은 부지런해라, 발전해라, 무언가를 계발해라 등등 내 의지와 상관없는 -그 순간만 상관없을지라도- 조언과 충고를 일삼기 때문이다. 뭐든 하고 싶을 때, 내가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도전하고픈 열정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뭐 이기적인 변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나로 살 것인가'의 책을 받아들었을 때 살짝 거북했다. 대체 나에 대해, 내 인생 방식에 대해 뭐라 쓴소리를 해댈지 걱정도 됐고. 헌데 추천사를 읽으면서 자기계발서에 대한 내 선입견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크 하이먼이라는 의사가 쓴 추천사에는 이 책의 저자 로렌 헨델 젠더가 자신의 이름을 딴 '헨델 메소드' 코칭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 방법대로 코칭을 받자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했다. 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삶에 변화를 불러 일으킨단 말인지 궁금해졌다.

저자인 로렌 헨델 젠더는 잊어버린 혹은 놓아버린 꿈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본인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조언한다. 맞다. 인생에 변화를 맞이하려면 무엇보다 그 인생을 살아온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이 책에서 알려주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코칭 방법을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바라는 꿈을 적는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세부적인 영역에 대해. 그 후 나는 그 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점수를 매긴다. 꿈을 왜 이루지 못하는지의 이유를 적는다. 그 이유는 매순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뱉어내던 변명, 핑계, 거짓말 등일 것이다. 그 내면의 목소리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싸움에서 이겨내는 게, 이 목소리가 진정 내 목소리인지, 변명인지 핑게인지 잘 구분해내는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꿈에 다가가기 위해 해야 할 약속을 정하되, 벌칙도 함께 정한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루에 짬짬이 시간을 내어 적어본다. 그리고 적은 생각을 정리해본다.
가장 중요한 부분, 자신의 부모를 인정해야 하는 것.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부모의 모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부모의 유전자는 곧 내 유전자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싫은 모습을 부인하는 건 자신의 변화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또한 자신이 했던 거짓말들을 기억해내서 적는다. 과거의 일들을 정리하면 오히려 과거로 빠지는 게 아니라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면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러웠던,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들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정리된다. 

굉장히 구체적인 코칭 방법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방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건강하게 인정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건강하게 자기 자신을 다루면 미래를 대응하는 힘이 건강하게 길러진다. 

또한 부모님께 편지를 쓸 것을 조언한다. 편지로 부모님에게 실망했던 점, 싫었던 점, 고마운 점 등을 자세하게 적어 드린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진심이 담긴 글을 이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 헨델 메소드에 따라 코칭을 받은 사람들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와이프, 전 남편, 어린 시절 끔찍한 상처를 줬던 사람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보냈고 연락을 했다. 이로 인해 괴로웠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제일 솔직해져야 하는 사람은 나, 자기 자신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이해했다. 맞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다. 혹여 괴짜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더라도 그 기질을 감추지 말고 당당히 드러내는 게 옳다. 오롯이 나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건강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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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MB의 재산 은닉 기술 : 이명박 금고를 여는 네 개의 열쇠 - 이명박 금고를 여는 네 개의 열쇠
백승우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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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권한, 이익과 비용이 울타리 처져 있지 않고 애매할 경우 이렇게 비극이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다. 인간은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욕심이 끝까지 치달으면 모두 망한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 p272

공인은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시민이 권력을 위임한 대통령이라면 그 무게는 더 무겁다. 정직의 무게도 그렇다. 태산처럼 무겁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을 치르면서 모든 의혹에 대해 수없이 부인했다. 세 번 이상 부인했다. 정직했다면 걱정할 건 없다. 하지만 정직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가 치러야할 책임은 상상하기 힘들다.
- p279


공교롭게도 이 책을 다 읽은 어제, MB가 구속됐다. 구속영장을 받고 구치소로 향하는 MB의 모습이 생중계로 전파됐다.
권력과 돈이 이 세상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던 그가 구속되는 걸 보니, 아직 세상은 돈과 권력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당연하고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감히 '정직'이란 단어를 말해선 안 됐다. 증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정직'하다 했다. 가훈이 '정직'이라고까지 했다. 그는 '정직'의 지읒도 꺼내선 안 됐다.

'그래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 유행어처럼 돌고 돌았던 이 질문. 사람들은 다스와 관련 없는 기사의 댓글에 다스가 누구 것인지 뜬금없이 적어 내려갔고 다스의 주인에 대해 수없이 물었다. 정작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 MB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물었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

MBC의 기자 백승우가 MB에 대해 책을 냈다. 권력에 기울어진 방송국 안에서 망가진 뉴스를 직접 목도한 그는 MBC 파업이 시작되자 예전 MB에 대해 취재했던 자료들을 꺼내, 이에 대한 취재를 다시 시작했다. 예단하지 말자. 팩트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파헤치자. 끝까지 의심하자. 자신만의 취재 원칙을 내세우며 열심히 뛴 결과, 'MB의 재산 은닉 기술'이라는 책 한 권을 펴내게 됐다. 그는 말한다. 이명박과 이명박 일가의 '돈', '땅', '다스', '동업자'가 이명박의 재산으로 안내할 열쇠라고. 

한 나라를 대표할 권력을 가진 자가 나라 안팎의 안위를, 국민의 삶을 보듬고 살피는 것보다 제 이익의 '경영'을 나라보다 더 중요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더 그렇다. 뽑았든 뽑지 않았든 선출된 대통령을 믿고 나라를 맡길 수 밖에 없는 국민들이 느낄 배신감은 누가 해소시켜 줄 텐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시작이다. 철저한 수사로 MB의 은닉 기술, 은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길. 언론과 함께 일하는 기자들도 멍추지 말고 계속 이 수사에 관심을 쏟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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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정희와 나 :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구병모, 권여선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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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p195~196

사람과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실이 얽혀 있다.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가나 고민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일상이 될 때도 있고 평범하지 않은 이벤트가 될 때도 있다. 복잡한 세상 속, 빼곡한 인간관계의 실타래,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엔 이 실타래들이 이야기로 남겨 있었다.

수상작인 '한정희와 나'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TV 프로그램이나 뉴스, 인터넷 기사에서 접했던 느낌마냥 친숙한 이야기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내 이야기 혹은 이웃의 이야기일 법한 글들이 '한정희와 나'를 필두로 줄을 섰다.

벚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숱하게 걸어 다니는 길 위로 한 번뿐인 꽃잎들이 떨어졌다.
- p168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잎이 제 힘으로 다시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 한 번뿐인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된다. 
그런 일상에 마음을 도려내는 일들이 생긴다면, 일상은 어떻게 변할까. 상대방에게 내어준 마음이, 악의 없이 다가갔던 걸음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이해했던 과거가, 자식을 잃고 난 뒤의 인생이,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마음이,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집착이, 폭력을 침묵으로 일관해야 했던 어린 시절이, 이기적인 자기합리화가 뒤흔들어놓고 가버린 지금, 이제껏 살아왔던 지난 날을 이겨내야만 한다. 실패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실패만큼 혹독한 지금을 견뎌야 지금이 과거가 된다. 지금을 잘 견뎌내야 하는 것, 견뎌내야 할 우리, 이게 바로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집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글들이 모여 친숙한 위로를 건넨다. 위로가 가볍지 않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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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자본론 -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가
모종린 지음 / 다산3.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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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구조의 다양성과 밀도로 인해 우리는 우연한 볼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골목과 새로운 가게들이 열린다. 층별 입점 브랜드 안내서 한 장이면 모든 것이 한눈에 파악되는 쇼핑몰이나 백화점과 달리,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의 구석구석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즐거움의 세계로 안내한다.
- p24

인생을 큰 도화지 위에 그리라고 누군가 내게 말한다면, 나는 인생을 둘러싸는 가장자리를 수많은 골목길로 대신할테다. 어린 시절, 골목길은 놀이터였고 친구들을 불러내는 집결지였고 울고 웃었던 감정의 집합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골목길은 도시 안에서 사라지고 커다란 상점, 쇼핑몰 주변으로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는 오래도록 살아있는 골목길이 아닌, 각종 브랜드로 가득한 백화점, 쇼핑몰 등지로 바뀌었고 우리네 일상은 영구적이라기보다는 휘발성이 강한 그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건 몇 년 전부터다. 사람들이 특정 골목길에 몰려, 골목길 상권이 번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구마구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건 만날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닌, 그 골목길만의 분위기, 골목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 등을 찾는, 골목길 여행이 유행세에 오른 것이다.

걷고 싶은 거리는 대로와 신호등에 의해 발걸음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다. 골목과 골목이 계속 연결되는 길이 걷기 좋은 길이다. 우리가 홍대 주변을 좋아하는 이유도 골목길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 p22

'골목길 자본론'의 저자 모종린은 걷고 싶은 거리에 대해 위와 같이 말한다. 언젠가부터 걸어야만 해서 걷는 거리가 아닌, 걷고 싶은 거리를 찾아서 걷는 문화가 난 참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주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탐색한 후 옆 동네까지 범위를 넓혀 돌아보는 걸 좋아하기에 여행을 가도 예쁜 동네, 예쁜 골목길이 나오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골목길을 찬찬히 둘러보다보면 일상의 삭막함, 무관심함, 복잡함에서 조금은 멀어지는 여유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여유를 이미 맛본 사람들은 그래서 골목길을 더 찾아다니는지도 모른다. 빡빡한 시간 속에 촉촉한 여유를 심어놓기 위해.

헌데 골목길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상권이 금새 형성된다. 형성되는 것까진 좋은데 자본과 관련된 욕심, 이해관계가 얽혀 골목길이 오래가기보단 반짝, 붐을 일으키다 주저앉기도 하고 골목길에 오래도록 거주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본에 밀려 터를 잃게 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도시 정책이 어려운 이유는 성장하는 도시에서 젠트리피케이션과 듀플리케이션, 모두를 저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골목길 구조를 유지하는 동네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동네, 즉 젠트리피케이션과 듀플리케이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의 선택은 물론 제이콥스 모델이다. 도시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듀플리케이션을 먼저 막아내야 한다.
- p118

건강한 골목길을 위해서는 자본보다는 도시 그리고 골목길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길이 내내 품고 온 과거를 존중하면서 미래를 계획해야 애정하는 골목길들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뚜렷한 가치와 영혼이 담긴 한국의 길과 도시는 어디인가. 한국의 수많은 도시가 이야기 산업을 키우고자 하지만, 에든버러 같이 역사와 정체성을 보전한 도시만이 그것을 이룩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지역 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기에 앞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경관과 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도시를 육성해야 한다. 역사 속에 사는 것이야말로 과거가 현재로 이어져 미래를 창조할 풍부한 영감을 얻는 이야기 산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p171

* 본 포스팅은 다산 북클럽 나나흰 7기로 활동하면서 해당 도서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직접 읽은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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