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 - 어느 사회주의자의 유언
제럴드 앨런 코헨 지음, 조승래 옮김 / 이숲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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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회평등

부르조아적 기회 평등은 형식적(제도), 비형식적인 기회의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실현되는 기회 평등이다. 신분제와 같은 형식적 제약이나 인종 차별과 같은 비형식적 제약이 제거의 대상이다.
자유주의 좌파의 기회 평등은 출신에 따른, 교육의 기회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을 제거함으로써 실현되는 기회 평등이다. 이때 결과는 전적으로 타고난 재능과 선택에 따른 것이다.
사회주의적 기회 평등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불평등의 요소로 본다. 기회의 평등은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으나 이때 결과의 차이는 선호의 차이를 반영할 뿐이다.


공동체

공동체에서의 인간 관계는 배려이다. 배려는 협동적이다. 시장주의자의 협동은 협동의 이익이 가져올 수 있을 때 이뤄진다. 공동체의 협동은 상호호혜에서 온다. 시장-수단적 배려는 내가 얻기 때문에 주지만 비수단적 배려는 네게 필요하기 때문에, 원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분석적 마르크스주의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어떤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사회주의는 무엇이 옳은가?
우리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갖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는 공헌과 보상을 별개로 간주한다.

자기소유권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소유는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존재에 대한 소유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
;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온전하게 개인의 것일 수 업다. 공간과 시간을 타인과 공점하는 한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는 모든 것은 공공적 성격을 띤다. 법적 또는 형식적으로 소유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결코 자기만의 것이 아니므로 개인의 판단에 의해 처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 - 로머의 구상

각각의 시민은 국가의 총자산에 대해 1인당 각자의 지분을 생득권으로 보장받는다. 시민은 주식 시장에서 자기 지분이 표시된 증권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다. 그리하여 기술이 좋거나 운이 따르면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주식과 지분을,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챙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팔아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다. 기업의 지분은 일상적인 돈으로 바꿀 수 없고, 또 돈으로 살 수도 없으며, 단지 다른 지분으로 바꿀 수 있고, 그 지분으로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시민이 죽으면 그 지분은 국고로 환수되어 새로운 생득권적 지분으 창출하게 된다. 반면에 노동 시장은 다른 방식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여서 그 불평등은 남아 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자본 대 노동의 구분이 낳는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따로 존재하는 자본가 계급은 사라지지만, 자본주의 시장의 효율적인 결과물을 다른 수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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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전상국 지음 / 세계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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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상국의 소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가 문제집에 실려 있었다. <우상의 눈물>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전상국의 다른 소설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도 국어 선생인데....
도서관에 들러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가 있는 소설집을 찾아 빌려 왔다. 1989년 발행, 3,500원. 출판사 주소가 낙원동으로 돼 있다. `낙원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동네가 종로구에 있었다. (낙원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다.)
책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끼친다. 코를 살짝 실룩거리게 하고, 목을 칼칼해지게 한다. 글자는 요즘의 책과 비교해보면 턱없이 작은 글쓰다. 노안(老眼)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눈까지 어질어질한다.
바빴다는 핑계 뒤에 있던 독서를 재개하는 것이니, 묵은 책 내 나는, 묵직한 전상국의 소설은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다만, 한장 한장 넘어갈 때마다 기시감이 든다는 게 함정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내 마음대로 바꾼다면 `굴레`라고 해야겠다. `죽기 한 달 전 즈음` 왕할머니가 들려주는 강 선생의 가계 이야기는 비록 확인되지 않는, 강 선생이 분신해 죽은 후 꿰맞춰진 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불`로 아울러진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일가족이 불태워진 `용멩덱이`와 분신한 강 선생. 미군으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튀기인 노린내 나는 깜둥이 수지의 엄마와 수지 엄마의 엄마의 버림 받고 난도 당한 그 삶은 겹쳐진다.
미국으로 압양된 수지의 마지막 말, `비록 흰배지빠귀 둥지에서 부화돼 길러졌다 해도 그 흰배지빠귀를 어미로 착각하는 일로 또다시 그 여자처럼 자학의 응달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굴레를 끊고 싶은 의지이다. 1인칭 관찰자인 `나(조 선생)`이 `유난히 비감스러웠다.`는 귀양리의 뻐꾸기의 소리는 `귀양리`의 소리일 테고, 우리의 왜곡된 현대사와 그 한의 소리일 것이다.

묵직하게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너무 묵직해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손끝이 떨렸다.

<썩지 아니할 씨>
도덕의 기준에서 인간의 범주가 아닌 행태의 인간인 장형부모인 큰형과 융통성의 불의함에 참을 수 없는 `나`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거 뭘까? 썩지 않는다는 그 씨가 혈연의 씨인지 운명의 씨인 것인지. 생각을 하개 하는데 생각나는 게 없다.

<투석(投石)>
집 안으로 날아든 고의적인 돌맹이와 우발적인 돌맹이로 온갖 추측과 억지들이 가족들의 틈 사이로 파고 든다. 날아든 돌맹이는 사적(私的)이었으나 가족들의 틈은 사적(史的)이었다. 반 세기 이상을 비정상적인 이분 사고의 틀에 가둔 이념은 돌맹이 하나에도 금이 갔다. 빨갱이를 돌맹이로 쳐죽인 게 자랑인 최 노인은 가족의 틈을 가르고 덧낸 돌맹이를 먼 골짜기 묵밭을 찾아 묻고 술을 붇는다. 그리고 말한다.
`다 미친 디(짓)거리야.`
한국 전쟁 전에도, 또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 갔다. 보도연맹의 학살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골짜기로 끌려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골로 간다.`

<퇴장>
˝이해(利害)에 밝아 그걸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 시비(是非) 가리기를 중시하는 사람에 비해 어떤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한테 이로운 것이라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면 물리치고, 반대로 그것이 자기한테 해롭다고 해도 옳은 것이면 목숨까지 내놓고 지켜내는 그것이 바로 확신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잠>
˝~ 세상 일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는 일에 대해 어떤 의식, 어떤 신념을 보이느냐 하는 그 의식이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무엇에 대해 많이 안다는 그 이상의아무런 의식도 보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공허한 울림이 되어 되돌아올 뿐이었다.˝

-작가의 말
소설은 칼이다. 은장도 같은 노리개로부터 살기 끼쳐드는 양날의 비수에 이르기까지 그 쓰음이 다양하다는 것이 전제될 때 소설은 분명 모양 잘 갖춘 칼이다.
그러나 작가는 칼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직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시우쇠를 달궈 온갖 혼과 솜씨를 다해 두드리는 묵묵한 도공(刀工)일 뿐이다. 도공이 칼 쓸 일만 생각하느라 칼 만드는 일을 허술히 한다면 그 대장간은 머지 않아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베고, 썰고, 깎고 혹은 찌르는 일은 칼을 쓰는 이의 몫이 아니겠는가.
갖가지로 쓸모 있는 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신명이 나지 않는다 해서 칼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야 없잖은가. 나는 대장간을 끝까지 지키며 좋은 칼 만드는 일에 신명을 바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장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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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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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사자의 서>
망자가 바르도를 떠도는, 영혼이 떠도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위화의 '제7일'도 그런 이야기이지만 단편이 이 글이 내게 훨씬 큰 울림이 있다. '제7일'은 중국의 현대가 배경이고 개인적인 내용이었고, <봄, 사자의 서>는 우리 사회에 흔하디 흔한(매우 슬프지만) 해고와 가족해체, 노숙, 죽음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보는 영혼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아픔이 전이된다.

<동백꽃>
‘당신들의 천국’이 폐쇄된 집단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동백꽃>은 폐쇄적인 곳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비유로 읽혔다. 전자는 권력을 통한 지배로, 후자는 돈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복종.

<왕들의 무덤>
예전에 강은교 시인이 살 만해지니 시가 안 쓰인다고. 문학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결핍을 정면으로 응시하든가 위장하여 덮어버리든가. 문학이 삶이기도 하니 삶도 결핍일 수밖에....

<파충류의 밤>
잠 못 드는 밤에 비가 내리는데 하필 읽은 게 이 글이다. 불면의 고통이 삶의 허함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누구든 지켜야 한다면, 누구에게든 연민이 있다면, 누구가 됐든 마음이 간다면 잠은 이루게 될 듯하다. 잠 한 줌은 삶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 이렇게 말하는 게 창작 의도의 왜곡이더라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진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칠면조와 노동자의 생경한 궁합만큼이나 삶은 대체로 이질적이고 우연적이고 당혹스럽다. 계획되지도 않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 삶은 누구에게나 균질하게 있으니 나름 이것도 평등인가 싶다.

<전원교향곡>
귀농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티비에 나온다. 티비에 나오는 건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희귀성 때문이리라. 귀농의 성공은 아주 드문 일이다. 티비가 성공을 담아낸다면 문학은 성공의 그늘을 그리는 것일지도......

<핑크>
핑크 덩어리로 표현할 만큼 뚱뚱한 운전할줄 모르는 여자가 한 남자의 시체를 차에 실은 채 저수지 바닥으로 밀어넣는다. 대리기사가 그 차를 몰고 오고 핑크 덩어리와 함께 돌아온다. 누구도 알지 못 했다. 만남이 이런 이별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우이동의 봄>
가난은 보이는 것에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냄새에도 있고 소리에도 있다. 가난의 말은 거짓으로 연명할지언정 인간의 모습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 문학은 결핍과 부재 위에 쌓아올린 탑인 듯하다. 결핍과 부재가 탄탄할수록 견고해지는 탑. 문학은 더러운 뻘흙에서만 피는 연꽃인 듯도 하다. 더럽다는 의미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 섞인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문학은 더러워야 하는 것이다. ‘칠면조’와 ‘육체노동자’처럼 이질적인 섞임의 더러움이 곧 문학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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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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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는가?
정의는 기어코 승리의 깃발이 되는가?
이 질문에 나는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 하겠다. 당신은 어떤가?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하고도 산골로 쫓겨 화전민마냥 사는 소설 속 이야기가 꼭 소설만은 아니지 않는가. 착하다 착한 만수의 태도, 지극한 성실함도 TV 어디에선 종종 본 듯하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희생하고 견뎌내고, 성실하고 쉬지않고. 우리 어머니가 그랬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 그 누구보다 근면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랬고, 정의로운 이해를 모아 파업에 나선 노동자가 그랬다. 불 보듯 뻔한 가시밭을 보고도 맨발로 앞서간 민초의 영웅들이 모두 투명인간이었다.
투명인간만이 투명인간을 본다 하였다. 투명해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위의 투명인간울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투명한 인간인가? 그리고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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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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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과 사랑'을 읽었을 때가 대학 시절이니 아마도 20년은 넘은 듯하다. 기억에도 없고 잔상도 남아 있지 않다. <소현>을 읽으면서 김인숙의 글들을 다시 찾아 읽고 싶어진다. 소현 세자가 처했던, 들어도 듣지 못하였고, 보아도 보지 못하였으되, 말하지 않아도 들어야 했고,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어야 했던, 그 상황과 맥락을 이렇게 적을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조선은 명을 가리켜 천조(天朝)라 했다. 천조는 천자의 조정을 제후의 나라에서 일컫던 말이다. 조선은 명을 천조로 섬기나 청에 볼모 잡힌 나라였다. 인터넷 용어에 천조국이 있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미국을 일컫는 표현이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유래야 어쨌든 저 당시 조선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가 결코 다르지 않아 보임은 나만일까.

'기다리지 못하는 자는 이길 수 없으니, 칼끝이 살에 닿을 때까지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때로는 칼날에 제 모가지가 베어져나가는 것을 보면서까지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으리라. 죽음보다 더한 것이 승리의 염원이라면, 그러하리라.'

말은 말로써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할 수밖에 없음으로 뜻이 드러나는 것이다. 도대체 충(忠)이 무엇이었기에 이리도 삭이고 담고 가야만 했는지...

'임금은 그 중에 숱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의심스러운 이야기들만 믿었을 것이다. 그러한 세월이었다.'

어디 말에 대한 믿음이 세월의 탓에만 있겠는가마는 세월의 탓이 제일 클 것이다. 풍문이 제일 믿음직하고, 음모론을 신뢰하게 되는 것을 어찌 개인의 심성 탓이라 하겠는가.

이 소설은 작가 김인숙에게는 처음 쓴 역사 소설이었으며, 소설을 써가는 5년 동안 '소현의 고독이 내 몸속에 들어와 늘 어딘가가 아팠다.'는 소설이다. 어떤 문장은 '수백 번쯤 읽고 수백 번쯤 생각'하면서 쓴 글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읽었다. 작가가 전해주는 소현의 고독으로 나 역시 고독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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