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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전상국 지음 / 세계사 / 1989년 2월
평점 :
품절
전상국의 소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가 문제집에 실려 있었다. <우상의 눈물>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전상국의 다른 소설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도 국어 선생인데....
도서관에 들러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가 있는 소설집을 찾아 빌려 왔다. 1989년 발행, 3,500원. 출판사 주소가 낙원동으로 돼 있다. `낙원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동네가 종로구에 있었다. (낙원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다.)
책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끼친다. 코를 살짝 실룩거리게 하고, 목을 칼칼해지게 한다. 글자는 요즘의 책과 비교해보면 턱없이 작은 글쓰다. 노안(老眼)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눈까지 어질어질한다.
바빴다는 핑계 뒤에 있던 독서를 재개하는 것이니, 묵은 책 내 나는, 묵직한 전상국의 소설은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다만, 한장 한장 넘어갈 때마다 기시감이 든다는 게 함정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내 마음대로 바꾼다면 `굴레`라고 해야겠다. `죽기 한 달 전 즈음` 왕할머니가 들려주는 강 선생의 가계 이야기는 비록 확인되지 않는, 강 선생이 분신해 죽은 후 꿰맞춰진 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불`로 아울러진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일가족이 불태워진 `용멩덱이`와 분신한 강 선생. 미군으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튀기인 노린내 나는 깜둥이 수지의 엄마와 수지 엄마의 엄마의 버림 받고 난도 당한 그 삶은 겹쳐진다.
미국으로 압양된 수지의 마지막 말, `비록 흰배지빠귀 둥지에서 부화돼 길러졌다 해도 그 흰배지빠귀를 어미로 착각하는 일로 또다시 그 여자처럼 자학의 응달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굴레를 끊고 싶은 의지이다. 1인칭 관찰자인 `나(조 선생)`이 `유난히 비감스러웠다.`는 귀양리의 뻐꾸기의 소리는 `귀양리`의 소리일 테고, 우리의 왜곡된 현대사와 그 한의 소리일 것이다.
묵직하게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너무 묵직해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손끝이 떨렸다.
<썩지 아니할 씨>
도덕의 기준에서 인간의 범주가 아닌 행태의 인간인 장형부모인 큰형과 융통성의 불의함에 참을 수 없는 `나`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거 뭘까? 썩지 않는다는 그 씨가 혈연의 씨인지 운명의 씨인 것인지. 생각을 하개 하는데 생각나는 게 없다.
<투석(投石)>
집 안으로 날아든 고의적인 돌맹이와 우발적인 돌맹이로 온갖 추측과 억지들이 가족들의 틈 사이로 파고 든다. 날아든 돌맹이는 사적(私的)이었으나 가족들의 틈은 사적(史的)이었다. 반 세기 이상을 비정상적인 이분 사고의 틀에 가둔 이념은 돌맹이 하나에도 금이 갔다. 빨갱이를 돌맹이로 쳐죽인 게 자랑인 최 노인은 가족의 틈을 가르고 덧낸 돌맹이를 먼 골짜기 묵밭을 찾아 묻고 술을 붇는다. 그리고 말한다.
`다 미친 디(짓)거리야.`
한국 전쟁 전에도, 또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 갔다. 보도연맹의 학살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골짜기로 끌려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골로 간다.`
<퇴장>
˝이해(利害)에 밝아 그걸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 시비(是非) 가리기를 중시하는 사람에 비해 어떤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한테 이로운 것이라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면 물리치고, 반대로 그것이 자기한테 해롭다고 해도 옳은 것이면 목숨까지 내놓고 지켜내는 그것이 바로 확신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잠>
˝~ 세상 일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는 일에 대해 어떤 의식, 어떤 신념을 보이느냐 하는 그 의식이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무엇에 대해 많이 안다는 그 이상의아무런 의식도 보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공허한 울림이 되어 되돌아올 뿐이었다.˝
-작가의 말
소설은 칼이다. 은장도 같은 노리개로부터 살기 끼쳐드는 양날의 비수에 이르기까지 그 쓰음이 다양하다는 것이 전제될 때 소설은 분명 모양 잘 갖춘 칼이다.
그러나 작가는 칼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직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시우쇠를 달궈 온갖 혼과 솜씨를 다해 두드리는 묵묵한 도공(刀工)일 뿐이다. 도공이 칼 쓸 일만 생각하느라 칼 만드는 일을 허술히 한다면 그 대장간은 머지 않아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베고, 썰고, 깎고 혹은 찌르는 일은 칼을 쓰는 이의 몫이 아니겠는가.
갖가지로 쓸모 있는 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신명이 나지 않는다 해서 칼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야 없잖은가. 나는 대장간을 끝까지 지키며 좋은 칼 만드는 일에 신명을 바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장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