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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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봤다. 과거 한국의 김성종 작가의 책을 거의 전작으로 읽었었고, 그외에 아가사 크리스티와 같은 유명한 외국추리작가의 소설을 읽었으나 일본 추리소설은 읽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알라딘에서 일본추리작가 소설을 따로 묶어서 보여줬고 그중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작품이 판매량 등에서 1위여서 용기를 내어 구입하여 읽었다. 결과는 대단한 반전이었으나 실망 그 자체였다.

이건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추리소설이란 작가가 창조한 탐정과 범인과의 숨막히게 전개되는 머리싸움이다. 이게 통상의 추리소설의 모습이고 그 매력때문에 나같은 사람이 추리소설을 읽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탐정과 범인과의 지능적인 플레를 창조하는데 한계를 느꼈는지 이번에는 독자를 속이려고 작정을 했다. 그리 독하게 맘을 먹었으니 속아주는게 독자된 도리이겠으나 왠지 뒷맛이 찜찜한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숨막히는 긴장감, 하나씩 드러나는 어둠의 세계의 추악함, 명석한 탐정의 두뇌 플레이,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는 범인의 용의주도함,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히 읽을 뿐이다. 가독성은 좋다. 그리고 일반 문학작품과 같은 세밀한 문체나 묘사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사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그런것까지 기대한다는건 무리이리라. 그러나 추리소설에 거는 근본적인 기대조차 충족시켜주지 못한 이 소설이 일본에서 몇개의 상을 수상했고 팔리기도 꽤 많이 팔렸단다. 대체 한동안 추리소설을 전혀 보지 않은 사이에 이 바닥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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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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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열정이라는 작품이 오늘로 두번째이다. 2년전쯤 읽고 귀찮아서 리뷰를 안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고는 몇줄이라도 남기고 싶어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은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다. 왜냐면 자신의 친구의 부인과의 불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말 드라마 <애인>이나 혹은 유행가 <잘못된 만남>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그저그런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작품이 좋을까? 그건 이들 주인공들의 삶, 그중 특히 장군의 삶과 그의 인식이 드라마나 유행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장군과 그의 친구 콘라드는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장군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실적이었지만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와 콘라드는 예술적이었다. 그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최소한 한 사람에게는 감정을 내보이고 싶은 갈망을 그의 어머니쪽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었으나 본디 가난한 집안의 콘라드는 떨쳐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책임감에 힘겨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 불행했듯이 그가 크리스티나를 만나 고독속에 칩거한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대물림이었다. 사람이 바뀐다는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바뀜이란 이른바 '자기 정체성'을 의미하는 일이리라. 아마도 자기 정체성의 상실 내지 변화는 오직 현실세계에서는 완벽한 과거 기억상실로만 이루어 질 수 있으리라.  하리수가 성전환을 하더라도 겉만 변할 수 있듯 장군도 크리스티나도 콘라드도,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시간과 장소, 혹은 입는 옷과 사는 삶의 수준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그들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안타까운건 작가도 소설속 장군의 입을 빌어 말했듯이 이런 비극적인 만남이 지속적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으로 순수영혼들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다 하겠다. 현실에 대입을 해보면 과연 이런 영혼의 소유자와 용기를 가진 이가 몇이나 될런지.

장군이나 콘라드의 비겁함과 자존심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손을 내밀었던들 그녀는 그렇게 혼자 죽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지도 못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바보처럼 삶을 지속시키지도 않았으리라. 작가는 묻고 있다. 그녀에 대한 그들의 사랑 그리고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느냐고.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도망쳤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들이 41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과거를 껴안고 살아야 했느냐고. 과거나 미래에 사는 자는 결코 현재를 볼 수 없는 법이다. 물론 그에게 과거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그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연연하는건 누구나 다 알듯이 미련한 짓이다.

니체는 이런 인간들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들 말이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불해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 밖에 없다고 니체는 단언한다. 따라서 니체는 망각이야 말로 행복의 첫번째 조건이라고 말한다. 잊어버렸어야 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말로 계속해온 진실찾기 게임을 당장 그만두었어야만 했다. 결국 그가 원한 진실은 그 진실의 창끝을 상대의 가슴에 쏘아 던져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군의 고독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말 장군과 콘라드 그리고 나는 남을 위하여 한번 뜨겁게 타오른적 없는 연탄재만도 못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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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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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기전 이곳에 올라온 평들을 대충 훑어보고는 기대를 많이 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은 십분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총 다섯편의 단편이 있는데 그중 단연 압권은 '사랑 있는 내일' 이었다. 아마도 다른 분들도 대부분 공감하리라 믿는다.

다섯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각각의 주인공들 그 누구도 완벽한 Loser라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부적응자 일수는 있으나 '한시적'이라는 타이틀을 갖다 붙일 수 있을 만한 이도 많고 낙오자라는 말로 무시할 수도 있으나 '자발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마땅한 이들도 있다. 다만, 그것이 자발적이건 한시적이건 세상은 그런 그들을 총체적으로 '낙오자' 혹은 '사회부적응자'라고 매도하기에 Loser라는 단어의 범위에 이들이 포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다섯편의 단편의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어 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앞만 보고 한걸음 한걸음, 위로만 내딛으며 평생을 살아온 '네이키드'의 이즈미는 이혼과 동시에 무기력증에 빠진다. 충분히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이런 이즈미를 안따깝게 보며 낙오자라고 걱정하는 동창의 시각은 잘못됐다. 충분히 그녀에게 현재의 삶은 휴식일 수 있는 것이다.

'어딘가가 아닌 여기'의 가토씨는 전형적인 가정주부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가지고 먹고 살고 그런 남편이 구조조정을 당하여 돈이 궁해지자 근처 동네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번다. 본인도 인정하듯이 특별한 목표도 없고 만약 남편이 다시 돈을 잘 번다며 이런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도 없고 남는 시간에 푹 쉬고 쉽기도 한 지극히 인간적으로 나태한 평범한 중년 여자이다.

'죄수의 딜레마'의 미토는 약자로 남길 원하는 속물근성의 여성일 뿐이다. 그녀의 남자친구도 안타깝게도 같은 부류이기에 문제가 될 뿐. 얼마전 기사에 나왔듯이 남녀에게 있어 남자쪽 조건이 여자쪽보다 좋은 커플의 경우가 더 오래가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 미토도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

'플라나리아'의 룬짱은 암수술후 혼란속에 사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모습일 수 있다. 모든 이가 열심히 나서서 적극적으로 암과의 사투를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룬짱처럼 재수 옴붙어서 생긴 암때문에 짜증이 날만도 하고 그런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독설처럼 노악취미를 부려야 직성이 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문제는 '사랑 있는 내일'의 스미에다. 마지마가 주인공이나 그는 '네이키드'의 이즈미처럼 까지는 아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남자이다. 돈이 아닌 가정을 위해서지만. 가정이 사라진 지금 그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다만, 미스테리한 스미에만이 다르다. 그녀는 전혀 다른 부류다. 공원 놀이터 밑에서 노숙을 하며 술값대신 손금을 봐주며 살아가는, 나이는 예상과는 달리 마지마씨와 같은 36. 너무도 매력적인 캐릭터라 정신을 차리기 힘들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무척이나 아쉽다. 늘 그렇지만 재미있는 소설의 특징 그대로다.

어쨌든 이 단편들의 주인공의 공통적인 특징은 더이상 열심히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 안달릴까? 달릴 이유가 없거나 애초에 달리는 노가다를 싫어했다거나 혹은 달리다 지쳤기 때문이리라. 주인공들의 이름을 바꿔 서양식이나 한국식으로 지은 다고 해도 물씬 일본소설의 색깔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일본 소설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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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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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소설은 가독성이 좋다. 순풍에 돛단듯 술술 읽힌다. 나처럼 책읽기에 관해서만은 Slow Movement를 보여주는 사람도 3~4시간이면 읽을 정도이니 그것은 칭찬받을만 하다. 다만, 간혹 가다 주요 비유로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축구관련 내용에서 약간 가독성이 떨어지기는 하다. 그 이유는 축구에 문외한이라서라기 보다는 그 비유가 적절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첫 몇장을 넘기면서 과거 읽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후자의 경우는 야구를 주요 모티브로 삼고 야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내가 결혼했다''는 야구가 아닌 축구가 등장하지만 축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세상에 대한 비유로서만 축구가 존재한다. 따라서 축구를 몰라도 읽기에 부담이 없다. 삼미슈퍼스타즈야 일단 이 팀과 야구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기에 큰 차이가 있다 하겠다.

이 책의 개인적인 하이라이트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사실을 자신의 아내가 알게 된 때이라고 느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소설이 향후 가지게 되는 무게가 결정될 판이었다. 그저 그런 소설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심리, 그리고 그 반응, 갈등과정 등에 있지 않았나 본다. 하지만 이는 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었고 소설은 맥없이 아내의 임신이란 도구로 이 갈등을 바로 없애버린다. 맥빠지는 일이다.

따라서 다분히 작위적인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아내는 오히려 대단히 솔직한 캐릭터로 존재하나 그 상대방인 남편의 캐릭터가 엉망이 되버린다. 작가는 남편이라는 캐릭터를 위해 그리고 이 소설을 위해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이런 선택을 강요받고 그럴 수 밖에 없게 만들지만, 그런 상황이 너무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없어 아내의 임신 이후부터는 바람빠진 풍선마냥 맥아리가 없어진다.

일처다부제, 소재 좋았다. 아울러 작가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를 받쳐주는 각종 인류학 등의 지식들이 작가의 얘기처럼 피상적이지만은 않았다. 허나 남편이라는 주인공은 그저 안드로메다 쯤에서 날라온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었을 뿐이다.

아! 물론 소설이니 이런것쯤은 감안하고 봐야겠지. 세상 소설속 주인공이 모두다 현실이라는 범주에서 존재가능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 있는 소설의 내용은 보다 현실적이고 그리고 설득적인 캐릭터로서의 남편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걸 가능케 하는 마지막 관문이 바로 아내의 임신전 상황이었고 거기서 많은 독자는 무릎을 탁치며 작가의 인간심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상상력에 탄복할 수 있게 만들 그 무언가를 기대했다고 한다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결국 이 게임의 분수령이 되었어야 할 부분에서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소설의 후반부는 급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내가 중혼을 선택한 것은 둘 다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단한 살림꾼으로서 억척스럽게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랬던 아내가 과거와는 달리 남편의 아파트에 주로 거주하게 된다. 물론 남편의 땡깡이 있었지만 이에 굴복할 여자가 아니지 않았던가? (물론 작가는 이를 일종의 미래를 위한 장치로서 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

이런 갑작스러운 나약한 아내의 캐릭터가 미안했던지 아내는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날아가 몇달을 버틴다. 남편은 속이 타고 괴롭지만 방법이 없다. 이후 그 때문인지 아이는 아파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고, 또한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내는 뉴질랜드라는 그들만의 이상향으로의 이주를 제시한다. 결국 날라간다는 얘기.

뭔가 줄듯줄듯, 보여줄듯 말듯 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수많은 B급 영화들이 떠오른다. 애초에 작가가 해피엔딩을 염두로 두고 그것을 현실에서 가능케 하려고(이 소설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문제점은 결국 아이가 커가면서 과연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해외로 이주한다는 너무나 무책임한 결론으로 끌고 간다.

만약 작가가 일처다부제를 포기할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면 - 이 작품의 내용처럼 - 갈등이 좀 더 등장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희극이건 비극이건 그건 그 이후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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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 Page Proposal - 강력하고 간결한 한 장의 기획서
패트릭 G. 라일리 지음, 안진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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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 책의 제목을 보거나 내용을 읽고 회사에서 당장 이렇게 써야지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려주고 싶다. 왜냐면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 - 물론 상대방도 이 사람을 모른다. - 1장짜리의 기획서를 통하여 그 사람의 흥미를 끌어들여 새로운 비지니스를 시작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 1장짜리 기획서의 필요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뻔히 다 아는 상관에게 그리고 뻔히 앞으로 회사가 추진할 비지니스가 뭔지도 아는 상황에서 1장짜리 기획서를 제출한다는건 기름을 안고 불길로 뛰어드는 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구조조정이다, 경제불황이다 말들이 많은데, 한방에 가고 싶으면 뭔 짓인들 못하랴......

동서양의 문화차이를 뛰어 넘어 1장짜리 기획서가 먹히는 상황이 있는 법이다. 피차간에 알지도 못하고 전혀 관심도 없던 상황에서 갑자기 어떤 모르는 이가 찾아와서 100장 짜리 기획서를 던져준다면 과연 그 사람이 그걸 읽을까? 당연히 안읽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하직원이 회사의 비지니스에 관계되는 일에 대하여 100장짜리 기획서를 꼼꼼히 써왔다면 상관은 당연히 읽을 것이다. 왜냐면 그게 그 사람의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다. 1장짜리건 30장짜리건 그냥 각자 상황에 맞게 쓰면 그만이다. 과거 한국의 회사들이 화려한 모양새와 두꺼운 기획서, 그리고 멋진 파워포인트를 갖춘 환상적인 슬라이드쇼를 선보여 왔다고 비난할게 못된다. 왜냐면 그런 기획의 방식 자체가 서양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파워포인트를 사용했나?  또한, 미국에서 MBA등에서 미국물 먹은 인간들이 앞장서서 내용도 하나도 없는 기획서를 파워포인트로 멋지게 만들어서 설래발치기 시작했다. 그걸 우리도 멋지니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1장짜리 기획서가 유행한다고 해서 그걸 또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나중에 또 그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게 마련일 것이다. 그냥 자기 주관대로, 그리고 회사의 분위기에 맞춰 살아가길 바란다. 쓸데없는 모험은 화를 재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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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4-3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렇게 부정적인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리뷰가 좋더라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뻔하고 상투적인, 그래서 기분나쁘지만 맞는 말인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