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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1_몇 가지 개인적인 경험을 거치면서 언어라는 감옥의 한계성을 뼛속깊이 체험했다. 그렇다. 한동안 내게 언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었다. 너와 내가 마주 앉아서 '사랑해'라고 말을 하면 네가 생각하는 '사랑'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지칭하는 인식의 지평이 바늘 끝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반듯하게 포개어져 하나를 이룬다고 상상해보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2_이 책은 ‘한자의 탄생’이라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접근하기에는 다소 재미없어 보이는 제목을 달고 있다. 어쩐지 서점에서 이 책을 마주치게 되면, 제목이 나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한자 잘 모르면 얌전히 내려 놔’ 정도일까. 물론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약간의 한자 교양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한자가 익숙한 세대가 이 책을 읽는다면 더욱 즐거울 수 있겠다. 따라서 출판사측에서 이 책을 펴낼 때 애초에 상정한 독자층의 연령대는, 추정해보건대 한자 사용이 익숙한, 즉 1988년 한겨레가 종합일간지 중 처음으로 신문에서 한자를 빼버리기로 한 후 신문 지상에서 한자가 사라지기 이전 풍경이 익숙한 세대쯤일 것이다.
그러나 읽어 본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추천하건대, 이 책은 한자뿐 아니라 언어와 인류 문명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탕누어는 자신을 ‘직업 독자’로 자처하는데, 그는 전문 연구자가 아님에도 갑골문을 가지고 즐겁게 놀 만큼, 그야말로 ‘문자 덕후’인지라 문자로 하는 예술인 문학에 대해서도 식견이 꽤 높다. 따라서 책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이 꽤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소통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책으로 읽었다.) 그러므로 한자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읽을 가치가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스마트폰에는 필기 인식 기능을 제공하는 네이버 한자사전이 있다.
#3_제목을 보고 이 책을 고른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책은 한자의 전반적인 발전 양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제공해 이해를 돕는다. 가령 나는 한자와 한문을 교양 수업을 통해서 배우면서 한자의 형성 원리 여섯 가지를 무미건조하게 외웠다. 상형지사회의형성전주가차 상형지사회의형성전주가차. 아마 많은 이들이 한자를 배우기 이전에 이 조자 원리를 달달 외웠을 것이다.
하지만 탕누어는 이 무의미하게 암기되었던 단어들을 건드려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의 눈에 상형은 가장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조자 방식이다. 가령 책의 프롤로그에서 소개되고 있는 ‘바라볼 망’, 望은 높은 곳에서 커다란 눈을 머리 대신 달고 있는 사람이 아래를 바라다 내려 보고 있는 장면을 문자로 만든 것이다. 즉,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들은 문자라기보다는 도형(圖形)에 가깝다. 또한 지사의 방식을 설명하면서는 옛사람들과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표현되고 있는 ‘표시선’, ‘강조선’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일은 예술적이고 아름답지만 힘이 들기 짝이 없는 일이다.
상형과 지사로 글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 더 이상 녹록치가 않자, 사람들은 마치 ‘수선공’처럼 이미 가지고 있는 단어의 재료들을 통해서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뒤의 두 가지 방식이다. 두 글자의 의미를 합쳐 새로운 뜻을 만드는 회의를 지나 형성, 즉 한 글자 안에서 음을 담당하는 부분과 뜻을 담당하는 부분을 나누어 부품처럼 조립해 조자해내는 방식이 나타나자 단어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이는 가히 혁명적인 조자 방식이었다. 더불어 엄밀히 말해 조자 방식은 아니지만, 의미가 옮겨져 나가는 전주와 자신들의 음만 빌려주는 가차를 통해서도 문자들은 더욱 생명력을 얻고 크게 번성해나갔다.
#4_이 책을 읽을 때 덤으로 주어지는 것은 탕누어의 아름답고 세련된 문장을 읽는 재미다.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원문의 섬세함을 짐작할 수 있는(역자 후기에서 번역이 어렵다고 알려진 저자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곳곳에는 작가의 위트가 넘치는 것에도 나는 큰 즐거움을 느꼈는데, 원래 큰 악의 없이 비꼬기를 좋아하는 본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나도 포함인데, 사실 우아하게 비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탕누어는 이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가령 그는 지금은 ‘두려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도록 가차(그는 이를 문자의 ‘납치’라고 표현한다)된 글자 구(舊)가 원래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부엉이를 상형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서술하면서도, 뒤이어 한마디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구舊’자는 쓰기 불편하지만 항상 사용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자다. 이 글자의 원래 자형은 아주 아름다운 (부엉이 모양을 상형한) 형태였다. 부엉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완구로 만들어지는 동물 중 하나다. 나무로 만든 부엉이도 있고 플라스틱이나 도자기, 쇠로 만든 것도 있다. 남을 해치고 싶다면 첫째, 출판사를 차릴 것을 권하거나 (요즘은 인터넷 관련 사업을 하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둘째, 부엉이를 조형한 완구를 수집할 것을 권하면 된다. 틀림없이 파산할 것이다.” p.116
이 책을 ‘문학’에 관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소통과 단절이 동시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학은 줄곧 ‘병 속의 편지’와 같은 처량한 느낌을 지녀왔다. 소식을 병 속에 담아 먼 곳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연(공동의 기억)을 가진 사람에게 흘려보낸다. 여기에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의지도 전혀 필요치 않고, 다른 사람들을 빈부와 지우(知遇)의 차이로 구분하려는 오만함도 필요치 않다. 문자 암호의 본질은 우리가 사용할 문자와 그 전달 여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독자를 구분하거나 암호를 해독할 대상을 찾을 필요는 없다.” pp.82-83
#5_평생 모국어만 사용해 온 사람이 걸리는 언어적 불감증, 이것에 대한 자각을 느낀 건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힘들여 읽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나의 이런 상태를 자각한 후 텍스트를 '정해'하는 새로운 방식의 읽기를 모어 텍스트를 접할 때에도 계속 시도하는 중이고, 따라서 모어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됐는데, (엄밀히 말하면 탄생 후 단어의 정의 하나하나를 처음 몸으로 습득할 때 느꼈을 것이 분명한 그때의 감각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자각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서술을 이 책에서도 발견했다. 그는 ‘유암화명(柳暗花明)’이라는 단어의 실제적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을 서술하면서, 외국인들은 이 언어를 배울 때 이 안에 “willow도 flower도 있다는 걸”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사자성어가 대만에서는 클리셰처럼 쓰이고 있어서 그는 이 단어를 습관처럼 쓰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언어 문자를 1,000년 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새가 노래하지 않고 꽃이 향기를 내뿜지 않는 것처럼 단순한 도구적 부호로만 사용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런 식으로 화를 낸 바 있다고 한다.
“내게는 인류의 가장 특출한 재능 중 하나인 글자 사용과 어휘 구사의 능력이 마치 전염병에 감염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전염병은 언어의 혼란을 초래하는데, 그 징조는 인지력과 실물감의 부족 현상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동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표현이 가장 일반적이고 개인적인 색채를 전혀 갖추지 않은 추상적인 공식으로 간소화되고, 의미가 약화되며, 표현의 칼끝이 둔화된다. 그 결과 문자와 새로운 상황의 충돌로 분출되는 불꽃이 꺼지게 된다.” p.195
#6_한편 탕누어가 말하는, “지나치게 무거워 음울하고 퉁명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한자와 대비해 다소 “쉽게 흔들리는” 병음 문자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책을 읽는 내내 아이러닉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한자’에 대해 ‘한자’로 이렇다 저렇다 서술해 놓은 것을 나는 한글 번역을 통해 읽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한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언중 친화적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탕누어가 침이 마르도록(아니, 아마 손가락이 아프도록) 예찬하고 있는 대로, 한자는 아름다운 발전 과정을 겪은 문자다. 특히 갑골문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글자들에는 그 하나하나 태동된 시절에 대한 풍경들이 박제되어 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 병음 문자와는 다르다. 어차피 문자가 깊은 사유의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본다면 한자가 일상어를 담는 그릇이 되는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의 기본적인 창제 정신이 “불쌍한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를 쉽게 쉽게 이르도록 하자”는 홍익인간의 정신이라면, 내가 지금 타이핑하고 있는 이 문자 안에서 이는 정말로 충실히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읽는 내내 계속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7_처음에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자. 언어는, 탕누어가 책에서 표현한 방식대로 얘기하자면, 넓고도 넓은 바다를 떠다니면서 자꾸만 떠가고 있는 ‘그 자리’를 포착해 표현하려는 부질없는 행위이다. 내가 ‘바로 여기!’라고 말할 때 이미 내가 짚은 그 자리는 흘러가고 없다. 우리가 시간을 명명할 때 ‘지금’을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하자면 문자는 “비완벽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내가 계속해서 느끼고 있는 불편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한때는 부질없이 텍스트 자체의 신격화에 목을 맸던 적도 있다. 단지 남들보다 약간 더 문자에 익숙하다는 것에 높은 우월 의식을 느끼면서, 이 시대 아이들이 독서를 하지 않음을 몇몇 친구들과 둘러 앉아 개탄하곤 했다. 하지만 곧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게 됐다. 책을 약간 더 많이 읽을 줄 아는 인간과 하나도 읽지 않는 인간 사이에 뭐 그렇게 큰 차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나마저도 수많은 발신자들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무수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상대방 쪽에서 저지르는 오류로 무수한 상처를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언어라는 것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다. 하물며 그 언어를 가두어 종이 위에 붙잡아 놓는 작업인 글쓰기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글을 읽는 행위는 또 얼마나 부질없는지, 아니, 아예 인간과 인간이 이 쓸모없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교류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 끝없는 회의를 느꼈다. 조금이라도 언어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같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탕누어는 답을 내리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완벽에 대한 갈망이 부여하는 긴장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시원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자 자체'가 인간에 비해 얼마나 대담하고 너그러운지에 대해서 저술한다.
“요컨대 문자는 일종의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완벽을 의식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유가 위축되고 용기와 활력을 잃는다. 확실히 문자는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활력이 넘치며, 약간 덜 온순하고 공경스러울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소탈하여 어떤 것들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다. 의미의 새로운 땅과 국경을 탐색하는 작업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여러 차례 실험을 반복해도 한 번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과거의 경험들이 잘 말해준다. 이렇게 문자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당당하게 결석을 한다. 덕분에 우리는 고개를 돌려 문자가 없는 원초적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머리를 싸맨 채 의미의 분할에 몰두하거나 문자의 미궁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p.332
결국 완벽한 언어도, 그 언어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문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고, 바꿀 수도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자신이 지칭해야 하는 대상의 본질을 향해서 끊임없이 맞추고, 맞추고, 맞추어 나가도록 인간이 무수한 변형을 가할 때 참을성있게 기다려주며, 인간이 부르지 않으면 나타나지도 않는다. 아, 머릿속에 그려보니 이건 꽤 숭고한 풍경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는 아니어도, 이 언어의 불완전함에 대한 어떻게 할 수 없는 미움을 조금쯤 내려놓기로 했다.
#8_마지막으로 언어(책에서는 ‘문자’라고 말하지만, 이를 언어의 제유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를 대하는 나의 강박적 태도를 좀 느슨하게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그의 결론 중 일부를 옮겨 적는다. 이는 언어가 본래 존재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리고 지금, 현재의 언어가 가진 '순결'을 지키는 데 목을 매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자는 삭제될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문자의 역사에 무수히 발생해왔다. (중략) 우리가 보호할 것은 문자가 아니다. 문자보다는 우리 자신을 더 멍청해지지 않도록, 세대가 더해갈수록 더 바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듣기에는 고귀하고 감동적이지만 실제로는 우습기 짝이 없는 구호를 생각해내곤 한다. 환경보호론자들이 “지구는 하나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어쩌면 무의미한 구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지구가 비눗방울처럼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만 부주의하거나 세심하게 돌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발해 산산조각 나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우주의 아주 미세한 푸른색 소행성인 지구는 이미 50억 년 넘게 살아왔을 정도로 견고하고 튼튼하다. 적어도 사람이나 그 이상의 존재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중략) 진정으로 보호하려 노력해야 할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보호하려 노력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연약한 생명과 너무도 연약한 우리의 지혜이다.” (pp. 334-335)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