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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1. ‘몇 살이냐’라는 질문에 ‘이십n 살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순간 뻔하게 들려오는 반응이 있다. ‘내가 네 나이만 돼도 뭐든지 할 수 있겠다, 청춘 참 좋-은 때다.’ 과연 이 시대의 청춘은 ‘좋은 때’를 지나고 있는가?
2. 이십 대는 버릇이 없다. 이십 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 선서 날에는 하라는 투표는 안 하고 놀러 다닌다. 너무 흔하게 들어 온 ‘이십대 개새끼론’이다. 기껏 투표 했더니, 이번에는 우르르 여당을 찍는 정신머리가 잘못됐단다. 과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정말 ‘개새끼’들인가?
위 두 가지 질문은 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크게 분노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쉰 떡밥이다. 이삼십 대 막론하고 반응은 뻔하다. “우리 개새끼 아닙니다. 투표 했어요.”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이 대신 요즘 구직 시장에 뛰어들어 보시든가요.” 하지만 이렇게 바로 받아쳐 주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지라도 쉽게 입 밖에 내기는 힘들다. 이제 그럴 때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제 이 책에 제시된 수치들을 떡하니 들이밀 수 있어서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꼬인 생각이 들었다. 저자 후루이치는 흔히들 여기저기서 물어뜯기는 동네북 ‘젊은이’, 이 집합이 얼마나 허상에 가득찬 것인지를 밝혀낸다.
하나씩 뜯어 보자. 우리는 ‘좋은 때’를 지나고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책의 프롤로그에서도 서술하고 있다시피, 좋은 때라 함은,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집집마다 TV가 당연히 한 대씩 존재하며, 맘만 먹으면 ‘자라’나 ‘유니클로’에서 옷을 살 수 있고, 위(Wii)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으며 조금만 마음먹으면 해외를 드나들 수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저자는 “(이런 것들 없는)1980년대에 사는 젊은이가 되고 싶은가?” 하고 묻고 있다. 아마 대부분 이십대의 답은 물론 ‘아니오’일 것이다. 물론 반대편에는 삼저호황 버블경제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저성장시기를 거치고 있는 탓에 전체의 20% 정도만이 간신히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게 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른바 ‘취업 9대 스펙’을 갖추어도 원서질에 줄줄이 실패하고 대학원 같은 곳으로 도피하게 되는 현실 말이다. 그마저도 형편이 되는 경우에만 허락되는 도피처다. 그렇기에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지’는 않다. (물론 나이 든 편에서 말하는 ‘좋은 때’를 산다는 의미는 정확히 이런 의미는 아니겠고, 자신이 지나버린 과거의 기억을 한껏 미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십 대는 정말로 버릇이 없고 정치에 무관심하고 사회 참여율도 저조한가? 책에서 구구절절 들이밀고 있는 수치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론한다. ‘세계 청년 의식 조사’에 따르면 2008년의 이십 대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쪽이 57.9%로, 1998년 청년들에 비해 39.2%보다 높다. 일본의 중의원 선거 투표율 역시 1996년 40%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현재 50%까지 올라갔다.(p.109)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2012년 대선을 기준으로 이십 대 투표율은 65.2%에 달했다. 물론 이 때 역시 ‘이십 대만 투표율 70%를 넘지 못했다’느니, ‘생각 없이 여당을 찍었다’느니 하면서 새로운 식의 면박을 면치 못했지만 말이다.
사실 책에 제시된 여러 자료에 따르면 기성세대나 매스컴은 손쉽게 두들겨 패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젊은이’를 매번 소환해낸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예를 들어 책에 따르면 매번 ‘요즘 젊은이들이 소비를 하지 않으므로 내수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라는 명제는 틀렸다. 젊은이들은 충분히 소비하고 있다. 다만 그 소비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소비 경제가 죽어가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므로 누군가는 그 원인의 타겟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이렇게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에 이르는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을 구박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박 자료로만 가득 찬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학을 전공한 젊은 학자 후루이치는 ‘젊은이’라는 개념을 연령으로 정의하기를 유예한다. 그러면서 이 개념이 정확히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지, 여러 조사를 통해 그 정의 대상을 좁혀나간다. 책이 마침내 도달한 ‘젊은이’라는 개념은 ‘1억 명 모두가 중산층’ 세대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일본이 전후를 거치면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태어난 세대 모두가 비슷한 경제적 조건과 문화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실제 수치적으로 중산층으로 묶일 수 있는 계층보다 두꺼운 계층이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됐다. 즉, 균질화된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연령과는 크게 상관없다.
책에 따르면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reality)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부유층도 빈곤층도, 남성도 여성도, 일본인도 재일 한국인도 그 밖의 외국인도 모두 한데 뭉뚱그려,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하는 일은 매우 섬세하지 못한 분류이다. 몹시 동의한다.
그런데, 동네북처럼 까이고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토리' 세대니 자급자족하며 사는 '컨서머토리' 족이니 하는 별명이 붙어 가면서. 앞서 말한 대로 차나 집을 구매하는 등 큰 규모로 돈을 쓰지는 않지만, 충분히 게임 같은 걸 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주변 사람들과의 시간을 즐기고, SPA 브랜드를 이용해 충분히 자기 취향의 옷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크게 성공에 욕심을 내면서 달리지 않아도 행복하다. 심지어 일본에는 구직을 아예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살아가는 것도 보편화되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부모 세대의 지원과 도움이 크다. 이 역시 한국의 경우와 비슷하다. 버블 경제 때 기반을 닦아 놓은 세대의 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저자의 분석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그리고 책이 나온 이후에도 이들의 꾸준히 행복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찬호 해제에 기술되고 있는 대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의 경우는 이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게, 부모의 부를 어느 정도 공유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여가를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할 생각이라니?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다. ‘서너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 정규직보다 높은 임금이 보장된다’는 부분은 현재 고작 5580원이 된 한국 현실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행복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걸로 문제는 해결 되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한때 이렇게 적어 내려간 일이 있다. 모두의 가난 속에서 가난한 것과, 모두의 부유 속에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것은 성질이 다른 가난이라고. 과거에 함께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배를 곯던 실제적 가난보다 지금 집에 양문형 냉장고나 벽걸이 TV를 들여놓을 수 없어서, 단문형 냉장고(심지어 이름도 낯설다)나 브라운관 TV를 보아야만 하는 쪽의 가난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부모의 부를 공유할 수 없는데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내몰리는 경우는 흔히 ‘행복한 젊은이’에 묶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소외 속에서 다시 소외되고 있다.
정말로 ‘행복한’ 젊은이들이 ‘절망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풍경을 담담하고 분석적으로 적어내려간 책이다. 새삼스레 ‘그래서 희망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결국 이 책에서 내리는 결론도 비슷하다.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에 대한 해답으로, 류동근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 사회가 “체념의 균형”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식의 결론을 낸 바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책의 저자는 이제 갓 서른 즈음인 젊은 사회학자이고,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온 것은 2011년이니, 그는 정말로 놀라운 이십 대였다. 때로는 발로 뛰며, 손으로 찾아 나간 자료들의 풍부한 제시와 이를 다시 오목조목 엮어 나가는 지적 탐구 자세가 보통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는 아마도 충분히 즐기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인 듯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