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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지방소도시 출신으로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경기도와 서울의 분리 개념이 흐릿했다. 막연하게 지하철이 다니는 곳은 서울이겠거니,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지하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2호선을 타고 ‘신림’을 지날 때면 젊고 푸른 숲이 떠오른다던 김애란 소설의 화자는 갓상경한 지방민이었던 나를 그린 듯했다.
내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서울의 동네는 남가좌동이었다. 온갖 매체에 나오는 맛집이 있고, 예술인이 참여하는 문화 공연이 있고, 어릴 때 내가 목숨처럼 좋아하던 아이돌 가수가 운 좋게 이웃집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서울의 풍경은 좀 이상했다. 백련시장을 지나는 골목에는 이제 내 고향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미’니 ‘제비’니 하는 간판을 단, 필름지로 전면을 막아 놓아 가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상한 술집들이 밤이면 빨갛게 조명을 켜놓았고, 귀퉁이가 부서진 약국이며 보석방 간판 아래는 라커로 섬뜩한 엑스 표시가 쳐져 있었다. 김애란 단편 「기도」의 화자처럼 “수도가 이래도 되나?” 묻고 싶었다.
좀 살고 난 뒤에야 알았다. 서울과 경기도는 엄연히 다르단 걸. 서울 내에서도 동네들은 더욱 잘게 나누어졌다. 크게는 ‘강남’과 ‘강북’, 작게는 ‘압구정’, ‘논현’, ‘영등포’, ‘수유’ 같은 기표들이 갖는 기의들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신림’을 발음해도 ‘혀가 파랗게 물들’지는 않았다. 살아가며 서울에 대한 나름의 현실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상한 일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구조가 단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참에 이 책을 접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저자 류동근은 경제학자로, 나와 같은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서울’을 좀 더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열어 주는 기회를 마련했다. 물론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건조한 사회과학적 분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학자이지만 문체에 상당한 미감이 깃들어 있으며, ‘인문학적 상상력’ 또한 풍부하다. 그의 글은 인간적이다.
서울의 공간들은, 모든 공간들이 그렇겠지만, “이후의 시간에 그 공간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다양한 행위, 그 행위를 추동한 욕망, 서로 다른 욕망들의 대립과 투쟁, 정치‧경제‧문화 권력의 작용 등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보존되고 때로는 왜곡되면서 지금 여기” 있다. 저자에 따르면 서울은 그 자체로 ‘물신과 배제 논리’가 숨어 있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다. ‘물신’, 사물 내에 신성한 것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물신주의에 의해 사람은 목적성을 잃어 수단화되고, 이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배제된다. 이것이 지금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커다란 논리의 틀이다.
나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 책에 서술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가령 은마 아파트에서 배달원들에게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곧 사건들은 밀려드는 새 뉴스들에 밀려나갔다. 이런 사건들을 보고 단순히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넘어가는 것이 답일까? 내게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경제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좀 더 적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가령 은마 아파트 배달원들에게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 사건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물음을 던진다. “과연 이것이 ‘강남 부자의 전형적인 이기주의’가 드러난 까닭일까?” 책에 의하면 서울의 아파트는 단순한 하나의 주거 공간이 아니다. 90년대를 걸치며 중산층에 편입됐다는 표상으로, 꿈의 주거 공간이 된 아파트는 삼십 년쯤 지나고 나면 재개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아파트는 ‘대치동’이라는 교통과 교육의 요충지에 있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로의 상징성을 가지게 되고, 다른 아파트들이 거치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독특한 상태에 놓여 있다. 1970년대의 기준에 따라 지어진 이 아파트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주차 공간이 부족하며, 엘리베이터 또한 낡았고, 이동 동선 또한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트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에서 막대한 자본이득이 예상되며, 심지어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양한 메리트가 붙는다. 그러므로 이 아파트의 거주민들은 경제지리학적 이점을 누리는 대신에 낡은 주거공간의 불편을 감수한다. 그런 와중에 배달원들이 아침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일이 이들의 불편을 더욱 가중시키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이 사건을 단순한 부자들의 이기주의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취급해버리는 시각은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집이 경기도 저 끝 어디께였던 내 친구 중 하나는 출근길이 두 시간씩 걸려 회사에 도착하고, 또 두 시간을 달려야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네 시간을 자고 출근하는 생활을 이 년 정도 반복하던 내 친구는 결국 이십 대에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집이 경기도도 아닌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육 개월에서 이 년 주기로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면서 온 서울을 떠돌아다녔다. 내가 거친 주거 형태만 해도 기숙사, 원룸, 고시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얼마간 지내 본 고시원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이후에도 몇 번이나 회상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몇 개월간은 학교에서 살고 있는 곳이 한 시간 반, 또 과외하러 가는 집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리기도 했다.
책에 따르면 내 친구와 내가 겪은 두 가지의 사례가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포드주의에 따라 우리는 주거 공간과 작업 공간을 분리하게 되었다. 시끄럽고 힘들고 더러운 작업 공간에 대비되는 깔끔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집. 그곳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더욱 심기일전하여 잉여자본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면서, 이 도시는 지금 ‘배제'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 도시를 바꾸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 둘의 욕망이 충돌할 때 권리를 빼앗기는 것은 주로 돈이 없는 쪽이다. 즉,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은 우리가 겪은 고충의 원인 중 하나이다. 도심, 그러니까 직장이나 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 근처는 점점 지대가 높아지고 있고, 그 부근에서 괜찮은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만큼의 돈이 없다면? 노동자는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직장 근처에서 질 낮은 형태의 주거 공간인 원룸이나, 그보다 더욱 특이한 고시원(현재는 고시텔이라는 이름으로 공급되고 있다)을 선택한다. 여기에 투자할 여유가 없다면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한다. 즉, 도심에서 먼 곳에서 통근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면서 다녀야만 하는 것이다.
책에서 도움을 얻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내려가자면 끝이 없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서울의 공간 개편 계획 하에 빚어지고 있는 참사들. 가령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용산 참사.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은마 아파트 사건이나, 신현대의 경비 노동자 분신 사건. 대학 캠퍼스 내의 무분별한 건축과 외부 자본의 도입과 그로 인한 상업화. 대형화 되고 있는 교회들에 관한 문제. 대학이 인서울대학과 비인서울(지방)대학으로 서열화되는 가운데 보다 나은 학벌 자본의 획득을 위한 지방 학생들의 상경.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논리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배제와 물신의 논리’이다. 이것들이 우리를 끊임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인간을 그 자체로 인간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원래 기습작전을 가리키는 군사용어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한 바 있다. 주체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도록 만드는 시스템, 여기서 두려움의 핵심은 경쟁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예감이다. 양성 중에 있는 노동력의 소유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노동력이 제대로 판매될 수 있을지(혹은 이른바 인적자본에 투자한 만큼 적정한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노동력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그 판매가 지속될 수 있을지 불안하며, 다시 은퇴 이후의 삶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불안해하고,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것을 얻고 싶어 안달한다. (pp.122-123)
이렇게나 살아남는 일이 녹록치가 않은 와중에, “자본이 국가의 자리를 대신하는 듯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발현된 성공신화가 계속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데, 계속해서 허황된 꿈을 좇아야만 하는 걸까? 저자는 글쓰기의 여정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이 상징하는 능력주의, 즉 능력에 바탕을 둔 공정한 경쟁이라는 믿음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일정 부분 신화였고 이데올로기였지만, 일정 부분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믿음이 흔들릴 때, 그리고 완전히 무너질 때,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는 ‘선진’ 사회가 될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성공이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이미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성공을 얻기 위한 ‘능력’조차 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오히려 사회는 '체념의 균형'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pp.275-276)
이 책에서 찾은 탈출을 위한 또 하나의 실마리는 ‘도시권’ 개념이었다. 데이비드 하비로부터 정의된 도시권은 “일상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즉, “도시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노동에 종사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한 집단적 권리는 물론 어떤 유형의 도시 공간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집단적 권리까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다면 효율적인 개발, 자본 축적을 위해 ‘사람’이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생기는 문제들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더 나아가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터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주거지에서 일터까지 통근에 걸리는 금전적·비금전적 비용의 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과 젊은 세대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자본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쇼핑이나 여가조차도 점점 더 개인의 시간과 금전비용을 소모하도록 만드는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략) 요컨대 비굴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삶 혹은 먹고사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비굴함을 최소화하는 것은 평등주의적 열망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pp.281-282)
결국은, '저기, 그 건물 안에 사람 있어요.' 하고 싶다. 물신의 대상인 건축물들. 때로는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고, 누군가의 예술혼을 담은 작품이 되고, 과시의 상징이 되는 도시의 건물들. 때로 사람들은 높이 높이 올라만 가는 건물과 인간을 압도해 가는 인공 풍경 속에서 그 안에 자신들과 같은, 부드러운 살갗 아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다. 그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잊는 것만 같다.
과연 자본주의와 인간의 기본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나날들 속에, 어쨌든 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틀 안에서의 고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다소 온건한(!) 시각을 가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그가 내놓은 제안은 자본주의 그 이후의 도래를 주창하던 마르크스에 비해 다소 타협적이지만, 한편 지금의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도시권을 보장해나가자고 들면 당장 어떤 방안부터 시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이상적이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책은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 할머니의 마법 지팡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나는 그럭저럭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나가야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문제 해결의 출발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분석해 나가는 시각을 갖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잡한 머릿속에 단초 하나가 생긴 기분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