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의식의 방 -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김서영 지음 / 책세상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 바꾸지 않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조차도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몸에 밴 무의식 속의 나를 바꾸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난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성격을 인지하고 있지만, 바뀌지 않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 하며, 외려 이를 잘 활용하여 세상에 적응해야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이 책은 서문에서부터 이런 나를 깨버린다. 기능형 인간이 욕망형 인간이 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얘기하며 꿈에 그 열쇠가 있다며 독자를 유혹한다.


그렇게 한껏 기대를 하게 만들어놨지만 정작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우리가 아는 만큼 읽히고,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의 틀 안에서 읽혀지는 것처럼, 꿈 역시 개인이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해석은 스스로가가 만든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비록 그럴지라도 작가의 시도는 기록되어지고 다른 이들과 공유될 가치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내가 믿는 나라는 모습대로 나의 꿈을 해석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나를 깨지 않는 한 나는 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고, 진짜 나를 찾기 위해 나를 의심하는 자세, 끊임없이 나 자신을 타자화하고 탐구하는 자세, 그리고 변화하려는 열정과 실천 이 모든 게 합쳐져 결과적으로 나라는 틀을 깨고 변태한 지금의 작가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신분석과 분석심리의 차이다. 작가가 정신분석만 고집하였다면 그러한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정신분석은 현재와 과거의 나를 진단한다. 하지만 온전히 분석하기보다는 꿈속 상징들을 '나의 언어'로 분석을 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나'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따라 분석결과가 달라진다. 긍정적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악몽을 꾸더라도 꿈속 상징들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부정적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좋은 꿈 속에서도 나쁜 면들을 찾게될 것이다.


반면에 분석심리는 꿈속 상징들을 나의 언어가 아닌 신화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신화는 비극적 신화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의미하는 바들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주를 이룬다. 이 때문인지 작가의 분석심리학적 분석은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의 차이가 빚는 해석의 극명한 차이, 그리고 이를 통해 이끌어내는 종합적 의견을 읽다 보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만일 작가가 분석심리학을 만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작가 본인도 이를 느꼈기 때문에 분석심리가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언급했던 것일게다. 그럼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해몽이라면, 그 해몽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꿈만이 답인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글쓰기, 무의식적인 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타인의 말을 듣는 것 등 사실 들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면, 나의 무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작가가 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잘 듣는 연습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10년 동안 '나'가 아닌 나의 무의식이라는 '타인의 말'을 듣는 연습을 한 것이다. 사실 나를 객관적으로 잘 보는 이는 '나'가 아닌 '타인'이고. '나'를 알려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타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 지점까지 다다르고 나니 어쩌면 꿈은 정신분석과 분석심리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게,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았던 타인의 말들을 무의식이 다시 들려주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작가가 꿈을 분석한 내용들을 읽어 보면 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들이다. 그 말들은 다름 아닌 친구기 친구에게 건네는 조언들이었다. 작가는 타인과 교류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이 점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전까지 남의 말을 안 듣고 살아왔다. 그러다 내가 부정했던 타인의 말 중 단 한 명의 타인의 말들이 계속 머리를 맴돌다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난 비로소 타인의 말을 듣기 시작했고, 그 시점 이후로 난 변할 수 있었다. 작가도 결국 타인의 말을 듣지 않다가 작가가 믿게 된 융이라는 학자와 그에 정통한 이부영 선생을 만나 비로소 타인의 말을 듣게 되고, 그때부터 자기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바뀔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우연히 친구들로부터 그들이 좋아하지만 연애에 성공하지 못한 남자들에 대한 꿈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꿈 속에서 그 남자와 현실에선 해보지 못한 연애를 하는 꿈을 꿨다고 했다. 너무나 명백한 꿈. 분석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연애에 성공할 꿈이어야 하는데, 그들은 연애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그들의 욕망이 은유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너무 대놓고 나타났다. 난 이런 사례들을 보며 이분법적인 사고의 오류를 인지하고, 꿈을 분석하는데에도 정신분석학적이나 분석심리학적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항 주식회사 -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 외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저항 주식회사들은 돈이 없어 허덕인다.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연예인이나 기업과 손을 잡고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단체에 대한 대중의 인상을 좋게 만들어 더 많은 후원금을 끌어온다. 연예인이나 기업들은 저항 주식회사들을 후원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 해결에 앞장서는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자본을 대중으로부터 끌어온다. 저항 주식회사와 기업이나 연예인 모두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대중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타락한 내면은 포장으로 가려진 시각적 자극을 통해 거짓된 이미지를 심는다. 쉬운 예로, 뽀샵질을 한 셀카사진처럼 조작된 이미지를 대중한테 노출시켜 이를 통해 대중을 현혹한달까?

정말 문제는 그런 행위를 통해 돈을 모으고 규모가 커진 저항 주식회사들은 점점 더 돈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저항적인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능력은 부재한 상태에서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적 자원이 있으면 될 거란 생각으로 돈만 모았고, 모은 돈으로 규모만 키웠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유지할 능력은 없는데 일단 대출을 해서 큰 집을 사버린 격이랄까. 규모만 커진 저항 주식회사들은 대중들의 해소되지 않은 사회의 고름들을 터트려 대중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고 저항 주식회사를 후원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유지비를 감당은 해야 하기에 점점 더 돈에 집착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그들은 기업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스스로를 브랜드화하고, 가치가 높아진 브랜드를 이용해 다른 기업이나 유명인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고, 자연스레 대중들로부터도 더 많은 후원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돈에 맛을 들인 저항 주식회사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의 상품을 광고해주기 시작했고,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데 기업이 아닌 저항 주식회사들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저항 주식회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단체의 가치관과 성격을 잃지 않고 반사회적 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길에는 기업보다 더 큰 적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국가다. 국가는 반사회적 운동,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국가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민감도는 그들이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예방"하고 있다는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주 쉽고 단적이면서도 강력하고, 게다가 세상에 만연한 예가 테러리스트다. 국가는 자신의 체제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틀린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이지만, 존재할 수 없도록 예방을 하고 있다. 계속해서 언론에 비춰지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내용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지면 어떻게 국가가 그들을 다루는지에 대한 본보기일 뿐이다. 또한 국가는, 사실은 국가를 지배하는 소수는, 그들이 지향하는 지향점이 자본주의에 반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이루어질 경우, 주동자를 잡아 본보기를 보여주거나 주동자가 속한 단체에 지원금을 차단함으로써 운동가들에게 처벌의 두려움을 심고, 이는 결과적으로 운동가들이 그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도록 만든다. 보건복지 등 다른 분야에선 하지도 않는 예방을 반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항 주식회사들로만 그치지 않는다. 반사회적 운동이 힘들 가지지 못하게 된 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파편화되어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까닭도 있기 때문이다. 혼자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그러한 기술들은 더욱 발전되었다. 또한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귀찮게 타인과 함께할 필요가 없어졌고, 정신적 거리도 멀어져 좋아하는 사람과만 만나면 되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죄책감(국가의 책임 전가) 내지 해결하고 싶은 욕망은 기업의 윤리적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덜어지거나 해소되었다. 이렇듯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불편하게 나와 다른 타인과 어울려야 할 필요도 사라졌다. 함께 저항하고 싶으면 잠깐 동안 모여서 함께 시위를 하다 금방 헤어져서 각자의 자취방으로 들어가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곁에 있는 누군가가 반사회적 분자로 낙인 찍히면 그를 피하기만 하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개인이 개인과 교류해서 함께 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운동까지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과 관계 유지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상당하다. 게다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받는 충격도 상당하여 개인과 개인이 교류하여 생성된 관계는 쉽게 와해될 수 있다. 하지만 삶을 함께하는 공동체라면 어떨까? 매일 부딪히며 사회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공동체들은 운동까지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고, 관계 유지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거의 없다. 매일 만나는 일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운동의 규모를 늘리기도 쉽다. 공동체들끼리 연대를 하면 각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 순식간에 운동의 규모는 불어날 수도 있다. 또한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받는 충격도 덜하다. 충격이 가해지는 면적이 넓으면 충격이 분산되는 효과라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게다가 공동체가 형성되면 소비가 이루어지는 비율이 공동체 내부가 되어 자본이라는 권력이 외부로 유출되는 비율이 개인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다.

나는 돈을 모은다. 돈을 모아서 어디에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쓰고 싶은 데가 없기 때문에 돈이 모이는 것이다. 저항 주식회사들이나 기업들이 공정무역, 착한소비, 리사이클링, 업사이클링 아무리 좋은 소리를 갖다 붙여도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을 굳이 더 비싼 돈을 주고 사야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권력이고, 소비, 즉 내 돈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행위는 권력을 넘기는 행위이기에 나는 소비행위에 신중을 가한다. 돈을 밝히는 누군가가 나를 현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게 되묻곤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길 바라며 소비의 행태를 바꾸고 있다. 나는 이런 나의 행동이 소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었다. 모두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현재의 소비행태를 바꾸진 않을 것이다. 대다수는 그럴 것이고, 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형태는 효과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저항의 시작은 사람을 향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쳐도 괜찮아 베를린
아방 글.그림.사진 / 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화가 다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면,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작가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도 특이한 사람들로 분류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은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사람이기에 비슷한 것도 많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눈에는 다른 것들이 더 들어왔다.

특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그들의 삶의 방식은

한국이라는 틀에 갇혀져 있던 작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나에겐 당연하게 생각했던 삶의 방식이지만

완벽하게 그들처럼 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나를 특이하게 생각하며 부러워 한다.


그런 나에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언제나 풀리지 않고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카우치서핑을 하며 타인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경험하고, 나의 삶도 나누는

그런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결국 답은 내 안에 이미 있겠지만, 그 답을 끌어내고 실천에 옮길 동기까지 얻으려면

역시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울이 되어줄 타인들은 여러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쉬는 자유분방한 도시 베를린이 제격이다.


작가가 보여준 베를린은 그만큼 매력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도 베를린을 매력적으로 느낄 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글솜씨가 그만큼 좋지는 않다.


어쨌거나 1년 반 뒤에 떠나게 될 내 여행은 내 안에 나도 몰랐던 수많은 편견들과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고, 결국에는 서로 껴안는, 나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여행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자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자에 앉은 사람 역시 움직이지 앉는다.
그래서 의자는 기다림이다.

의자에 앉은 사람은 의자와 하나가 되어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의 의자에 앉아주길 바란다.

타인이 먼저 다가오기 전까지는
앉아 있는 이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기다림은 어느덧 게으름이 된다.
먼저 다가가기가 점점 더 두려워지고,
먼저 다가와주길 바라는 게으름.

우리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밀을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와
의자에 앉은 엉덩이 사이에
감춘 채 깔고 앉아 있는 걸까?

그 비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
일어서지도 못하고선 엉덩이를 의자 위로
살짝 들었다놨다를 반복하며 망설이는가.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은
누울 수도(잠을 잘 수도)
서있을 수도(먼저 다가갈 수도)
없는 중간의 시간이다.

하루에 잠자고 먹고 씻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조차 대부분 앉아 있는 현대인들
과연 무엇이 두려워 의자에만 앉아
잠이 들 시간을 기다리만 하는 걸까.

의자에 앉아만 있으면 일어서는 법을 잊게 된다.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그 자신도 의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먼저 다가와 준 사람 앞에서 의자가 되어
고마운 사람을 유령으로 만들고 말 것인가.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더 늦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게으름을 경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 일러스트로 만나는 감성 여행에세이
봉현 지음 / 푸른지식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보통 여행기 책을 볼 때면,

그 사람이 겪은 에피소드에 빠지거나,

그 사람이 찍은 사진 혹은 그린 그림에 빠진다.

하지만 둘 다 빠지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둘 다 깊게 빠진 경우는 아예 없었다.


깨달음이 있는 글을 읽을 때면

뭔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문장들로 느껴졌고,

그림이나 사진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

나도 저런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는 부러움만 느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해보고 나니 나에게 남은 것은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여행기에서 신나게 떠들던 에피소드들,

재밌는 인연과의 사진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들,

그런 것들이 여행 후에도 내게 남지는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여행 에세이가 읽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 남의 얘기 같아서.

내게 남는 건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오랜만에 여행 에세이를 손에 든 건 호기심에서였다.

책이 너무 안 읽혀서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빌려볼까 하던 중에

최근에 받은 여행드로잉 수업의 선생님 여행기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근데 초반부터 작가는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

너무 갑자스러운 노출(?)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전혀 몰랐던 선생님의 면이 신기하여 깊게 읽었다.


그림도 읽었다.

내면을 드러내는 글만큼이나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들을 보며

앞으로 읽어나가며 마주치게 될 변화된 글과 그림들이

궁금하여 뒷장을 계속해서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내용만을 읽어나가는 것은

용기내어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모두 드러낸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빨리 읽다가도 되돌아가서 다시, 느리게, 읽었고,

가끔씩은 책을 내려놓고 감상에 젖었다.


누구나 인생의 어두웠던 때가 있기에

짙게 꾹꾹 눌러담아 쓴 작가의 진심은

종이를 뚫고 나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에 특별히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은 한 편의 여행 성장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며 내 안에도 내가 몰랐던 아주 맑고 밝은 아이가 있을 것임을 믿게 되었고,

외로울 땐 충분히 외로워해야 그 순간이 지나 외롭지 않은 순간이 오리란 걸 알게 되었고,

여행이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내가 울고 웃었던 인생의 순간순간이 전부 여행이었고,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그 순간에 충싫며

아주 예쁘게 웃고, 아주 서럽게 울고, 너무 아파 힘들어하고, 너무 넘쳐 행복해하며,

지금에 이르러 나는 예쁘게 웃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어서 친구들 생일이 오면 좋겠다.

이 책을 선물로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