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주식회사 -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 외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저항 주식회사들은 돈이 없어 허덕인다.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연예인이나 기업과 손을 잡고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단체에 대한 대중의 인상을 좋게 만들어 더 많은 후원금을 끌어온다. 연예인이나 기업들은 저항 주식회사들을 후원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 해결에 앞장서는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자본을 대중으로부터 끌어온다. 저항 주식회사와 기업이나 연예인 모두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대중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타락한 내면은 포장으로 가려진 시각적 자극을 통해 거짓된 이미지를 심는다. 쉬운 예로, 뽀샵질을 한 셀카사진처럼 조작된 이미지를 대중한테 노출시켜 이를 통해 대중을 현혹한달까?

정말 문제는 그런 행위를 통해 돈을 모으고 규모가 커진 저항 주식회사들은 점점 더 돈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저항적인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능력은 부재한 상태에서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적 자원이 있으면 될 거란 생각으로 돈만 모았고, 모은 돈으로 규모만 키웠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유지할 능력은 없는데 일단 대출을 해서 큰 집을 사버린 격이랄까. 규모만 커진 저항 주식회사들은 대중들의 해소되지 않은 사회의 고름들을 터트려 대중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고 저항 주식회사를 후원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유지비를 감당은 해야 하기에 점점 더 돈에 집착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그들은 기업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스스로를 브랜드화하고, 가치가 높아진 브랜드를 이용해 다른 기업이나 유명인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고, 자연스레 대중들로부터도 더 많은 후원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돈에 맛을 들인 저항 주식회사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의 상품을 광고해주기 시작했고,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데 기업이 아닌 저항 주식회사들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저항 주식회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단체의 가치관과 성격을 잃지 않고 반사회적 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길에는 기업보다 더 큰 적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국가다. 국가는 반사회적 운동,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국가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민감도는 그들이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예방"하고 있다는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주 쉽고 단적이면서도 강력하고, 게다가 세상에 만연한 예가 테러리스트다. 국가는 자신의 체제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틀린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이지만, 존재할 수 없도록 예방을 하고 있다. 계속해서 언론에 비춰지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내용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지면 어떻게 국가가 그들을 다루는지에 대한 본보기일 뿐이다. 또한 국가는, 사실은 국가를 지배하는 소수는, 그들이 지향하는 지향점이 자본주의에 반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이루어질 경우, 주동자를 잡아 본보기를 보여주거나 주동자가 속한 단체에 지원금을 차단함으로써 운동가들에게 처벌의 두려움을 심고, 이는 결과적으로 운동가들이 그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도록 만든다. 보건복지 등 다른 분야에선 하지도 않는 예방을 반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항 주식회사들로만 그치지 않는다. 반사회적 운동이 힘들 가지지 못하게 된 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파편화되어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까닭도 있기 때문이다. 혼자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그러한 기술들은 더욱 발전되었다. 또한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귀찮게 타인과 함께할 필요가 없어졌고, 정신적 거리도 멀어져 좋아하는 사람과만 만나면 되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죄책감(국가의 책임 전가) 내지 해결하고 싶은 욕망은 기업의 윤리적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덜어지거나 해소되었다. 이렇듯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불편하게 나와 다른 타인과 어울려야 할 필요도 사라졌다. 함께 저항하고 싶으면 잠깐 동안 모여서 함께 시위를 하다 금방 헤어져서 각자의 자취방으로 들어가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곁에 있는 누군가가 반사회적 분자로 낙인 찍히면 그를 피하기만 하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개인이 개인과 교류해서 함께 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운동까지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과 관계 유지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상당하다. 게다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받는 충격도 상당하여 개인과 개인이 교류하여 생성된 관계는 쉽게 와해될 수 있다. 하지만 삶을 함께하는 공동체라면 어떨까? 매일 부딪히며 사회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공동체들은 운동까지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고, 관계 유지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거의 없다. 매일 만나는 일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운동의 규모를 늘리기도 쉽다. 공동체들끼리 연대를 하면 각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 순식간에 운동의 규모는 불어날 수도 있다. 또한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받는 충격도 덜하다. 충격이 가해지는 면적이 넓으면 충격이 분산되는 효과라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게다가 공동체가 형성되면 소비가 이루어지는 비율이 공동체 내부가 되어 자본이라는 권력이 외부로 유출되는 비율이 개인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다.

나는 돈을 모은다. 돈을 모아서 어디에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쓰고 싶은 데가 없기 때문에 돈이 모이는 것이다. 저항 주식회사들이나 기업들이 공정무역, 착한소비, 리사이클링, 업사이클링 아무리 좋은 소리를 갖다 붙여도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을 굳이 더 비싼 돈을 주고 사야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권력이고, 소비, 즉 내 돈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행위는 권력을 넘기는 행위이기에 나는 소비행위에 신중을 가한다. 돈을 밝히는 누군가가 나를 현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게 되묻곤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길 바라며 소비의 행태를 바꾸고 있다. 나는 이런 나의 행동이 소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었다. 모두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현재의 소비행태를 바꾸진 않을 것이다. 대다수는 그럴 것이고, 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형태는 효과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저항의 시작은 사람을 향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