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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ㅣ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평점 :

방황이 청소년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일컫는 그때가 방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기임은 자명하지요. 하지만 방황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보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갖고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도 방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P.6
흔히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말하지만, 오십 대에도 오춘기라 불리는 우울한 방황의 시기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정해져 있다는데,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않아서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그래서인지 "방황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보아야 합니다."라는 문장이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창비교육 테마소설 시리즈 <방황하는 소설>은 방황을 테마로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 등 7인의 작가가 그려낸 7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7편의 작품은 작가들의 소설집에 있는 단편들로 소설집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듯합니다. 꿈오리는 김금희 작가의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만 읽었기에 다른 작가들의 소설집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이야기를 통해 '나는 누구인지,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정지아 '존재의 증명', 뉴스 앵커가 된 기자 남준이 첫 직장 동기를 만나게 되면서 둘이 함께 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와 지금의 요즘 애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박상영 '요즘 애들', 폭발 사고로 무너진 건물에서 친구를 잃고 살아남은 지수의 트라우마와 방황을 그린 정소영 '엔터 샌드맨',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 특히 남자친구와의 결별 후 유학길에 올랐지만 그곳에서도 관계의 엇나감에 방황하는 옥주의 모습을 그린 김금희 '월계동 옥주', 누군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울을 떠나지만 그곳에서도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불안과 방황을 그린 김지연 '먼바다 쪽으로', 미국 여행 내내 불편함을 느꼈던 J 그리고 뷰티 편집 숍에서 일하며 만나게 된 세실, 그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마는 주희의 모습을 그린 박민정 '세실. 주희',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던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던 그녀가 자신의 아이 소리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최은영 '파종',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정지아 '존재의 증명'입니다.
단골 카페라고 해도 도와주세요, 내가 누군가요? 나는 기억을 잃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이 청년이 단골손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p.15
단골 카페에서 기억을 잃은 한 남자,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나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남자는 카페 직원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될 만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커피에 대해 잘 알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남자, 그는 지갑을 꺼내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됩니다. 주민 등록증이나 운전 면허증이나 카드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갑 안에는 지폐만 몇 장 있을 뿐, 그 흔한 카드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락처도 카톡도 문자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지운 것인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인지조차 모르는 남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경찰서로 향합니다.
"뭘, 어디서 분실하셨죠?"
"기억이요." p.26
자신의 이름은 물론 나이와 사는 곳까지, 그 어느 곳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남자, 주민 등록증 발급에 필수적인 지문조차 등록되어 있지 않는 남자, 그는 기억을 찾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남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면,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꿈오리 한줄평은 책속 문장으로 대신합니다.
삶은 방황이며 방황은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방황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방황은 새로운 발견의 시작입니다. 불확실한 길을 걸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방황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며 우리는 방황을 통해 미래의 목표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