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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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로 시작하는 작가님의 손편지, 이름을 모르니 작가님이 아는 가장 다정한 이름으로 불러본다며 쓴 손편지, 책을 다 읽고나니 편지에 담긴 작가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슬픈 호수에서 문장을 길어내었다는 작가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작가님이 손글씨로 쓴 이야기라는 '호수의 일', 어떻게 이렇게 긴 이야기를 손글씨로 쓸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호정이의 '호수'가 우리들의 '호수'였음을, 우리 아이들의 '호수'임을, 그래서 더 깊이 공감하며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음을, 그래서 손글씨로 꾹꾹 그 '호수'에서 일어난 일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춘, 첫사랑, 성장, 치유'라는 해시태그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풋풋하고 아름답지만, 아픔을 겪으며 성장했던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지금 그 과정을 겪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극적인 상황이 없었음에도, 한 자리에 앉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호수의 일'p.7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의사에게 들려주는 호정이, 하지만 호정이의 기억은 물감을 뒤섞어 놓은 듯 어지럽습니다. 어제 느꼈던 감정은 흐릿하지만, 어린 시절의 일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제 느꼈던 감정보다 그때의 일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린 호정이의 '호수'에 담기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컸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이 오면 호수의 얼음은 녹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나는 진주의 태동이 전해지던 손바닥의 느낌까지 기억하고 있다. 진주가 처음 집에 오던 날의 그 낯선 따스함도.

(중략)

어떤 발자국은 돌아 나왔지만 어떤 발자국은 결말을 알 수 없었다. 가장자리를 걷는 것도 아니고 호수 깊이, 도무지 바닥을 알 수 없는 호수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은 뭘까? 포근하게 보이는 눈밭 아래에 대체 뭐가 있을 줄 알고. 호수의 일'p.11~16

 

 

동생 진주의 생일을 맞아 호수로 간 가족은 함께 썰매를 탑니다. 하지만 호정이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 불안감은 어쩌면 동생 진주가 처음 집에 오던 날 느꼈던 낯선 따스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호정이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은 그런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진주의 어리광과 아빠의 '미안해'라는 말은 진주네 집이라서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쁜 동생 진주,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진주, 아빠에게 어리광도 부리는 진주, 호정이의 기억 속엔 온가족이 함께 하는 집은 없었으며, 진주네집처럼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안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배웠다.

(중략)

도대체 똑같은 대사를 날마나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엄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강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어도 그 눈빛을 알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 불안한 눈빛, 우리 애가 사춘기를 힘들게 지나네, 하는 눈빛. 사춘기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쩔 뻔 하셨나요?

호수의 일'p.61

 

 

일곱 살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호정이, 호정이는 할머니의 재산까지 쏟아 부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던 엄마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 집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엄마 아빠는 돌아왔지만 호정이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은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 아름다운 것에는 등수가 없다." 라고 하셨는데, 늘 두통을 달고 사는 호정이에게 선생님의 그 말은 거짓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절로 눈치가 보였던, 그래서 혼자서 엄마 아빠가 일하던 만두 가게를 찾아갔던 일곱 살, 그때부터 호정이에게 세상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을 엄마 아빠가 하는 만두 가게에 데려갔던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늘 당당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친구 지후와 나래, 자신과는 다른 친구들의 모습에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깊은 호수에 잠긴 것 같았다.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고요한. 햇살을 가득 받아 따듯한, 그리고 환한. 손끝만 움직여도 공기가 물결이 되어 은기에게 전해질 것 같았다. 여기, 호정이가 있어, 라고. 호수의 일'p.91

 

 

나래와 지후와 함께 하던 호정이의 '호수'에 잔잔하고 고요한, 따듯하고 환한 물결을 일으킬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전학 온 그날부터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갔던 은기, 어느새 호정이의 곁에 있게 된 은기, 어쩌면 호정이의 꽁꽁 언 '호수'는 은기로 인해 봄날의 호수처럼 잔잔하고 환하게 빛날 수도 있었습니다. 은기에게 일어난 그때 그 일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깊고 어두운 호수, 얼어붙은 호수에 잠긴 학교,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은기를 만나기 전의 얼어붙은 호수와 같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호수의 일'p.350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아무리 꽁꽁 언 호수라도 봄이 오면 가장자리부터 녹아내리는 건 자연의 이치, 호정이에게 봄은 은기였을지도, 친구 나래와 지후였을지도, 동생 진주였을지도, 엄마와 아빠였을지도 모릅니다.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 눈부신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호수, 어느 날 호정이의 호수가 다시 꽁꽁 얼어붙을지라도, 다시 봄 햇살에 녹아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슬프고 춥고 아프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엔 언제나 따듯함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에 둘러싸인 안전하고 따뜻한 우리집이 없었다는 상실감, 풋풋한 17살 청춘에 겪은 첫사랑의 아픔, 그럼에도 호정이 곁에는 언제나 늘 가장 먼저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아픔을 치유하고, 그 크기만큼 호정이는 또 성장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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