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 신라공주와 페르시아왕자의 약속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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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묘한 느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표지 속 아름다운 여인이 신라 공주라면 그 아래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속에 등장하는 각국 상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란계 소그드 바르후만 왕을 알현하고 예물을 바치는 모습의 상인들 중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모습은 그 당시 동이족의 복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한민족의 활동 범위가 페르시아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의 역사적인 고증 자료가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저자는 20여 년 전 아버지를 따라 이란에서 살았던 친구에게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십오 년에 걸쳐 자료를 찾던 중, 영국국립박물관에서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기록한 페르시아 대서사시 쿠쉬나메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계기로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허구적 전설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쿠쉬나메를 모티브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 1400 년 전의 사랑 이야기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를 쓰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기록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가 영국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적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 속에 뒷받침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중략)

산라의 혜초 스님이 비슷한 시기 페르시아를 방문했다는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이 쿠쉬나메와 일치한다.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에서 이슬람 군대와 전쟁을 벌인 사실 또한 중국의 힘을 빌려 아랍 이슬람과 전쟁을 했다는 쿠쉬나메의 내용과 일치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에 조우관의 모자와 환두대도의 칼을 찬 우리나라 사신의 그림이 벽화에 그려진 사실도 우연이 아니었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p.5

 

 

이야기는 1400 년 전 신라에 정착한 페르시아인의 후손인 다큐멘터리 pd 희석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과 역사적 고증과 저자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패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자가 정권을 잡기 전, 아버지를 따라 이란에서 몇 년을 보냈던 희석은 그 당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며 환대해 주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나라를 잃은 페르시아왕자를 외면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신라 대왕은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으며, 신라공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었다는 설화를 들려주며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70년대 중동 건설 붐과 강남 테헤란로가 만들어진 것이 필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랍 반란 세력에 의해 무너진 제국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은 황제의 부탁대로 훗날을 도모하며 사마르칸트로 갑니다. 소그드왕은 아비틴에게 가장 안전한 곳으로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있는 나라 바실라(신라)를 추천하며 바실라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해 줍니다.

사마르칸트에 온 신라의 사신은 젊은 화랑이었다. 십칠팔 세 정도의 어린 나이인 신라 사신은 새의 깃털을 양옆으로 꽂은 모자를 쓰고 칼을 차고 있었다. 칼은 신기하게도 손잡이 끝이 둥글게 되어있었다. 복장이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정했고, 예의가 바르고 총명하게 보였다. 아비틴은 신라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p.36”

 

 

당나라에 간 아비틴은 그곳에서도 지낼 수 없게 되자 신라로 가게 됩니다. 의상 대사로부터 먼저 아비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문무왕은 왕자를 환대하며 왕자의 지위에 맞는 대접을 합니다. 이렇게 신라에서 지내게 된 페르시아왕자 아비틴, 의상 대사를 통해 원효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원효와의 인연으로 요석공주가 살고 있는 요석궁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운명의 짝이 될 프라랑 공주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은 혼인을 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페르시아 식으로 이름을 페리둔이라고 지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왕실을 이어가기 위함이옵니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p.225”

 

 

그러던 어느 날, 아비틴은 아라비아 상인에게서 페르시아 유민들이 아직도 저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페르시아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떠나게 됩니다. 아들 페리둔을 데리고 말이죠. 프라랑 공주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약해진 탓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비틴은 페르시아를 되찾은 후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7991229일 왕이 죽어 원성이라는 시호를 붙였다. 유언에 따라 봉덕사 남쪽에 안치하고 서역인 석상을 세웠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p.360~361”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에는 화랑 죽지랑, 의상 대사, 원효, 요석공주, 설총, 문무왕, 신문왕, 경덕왕, 원성왕, 혜초, 고선지, 안녹산 등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과 고증 자료를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함께 합니다. 여러 가지 고증 자료를 통해 보건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장에 신라와 페르시아와의 연관성을 찾아줄 자료들인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14세기의 이야기집인 '아자히브'의 채색 삽화, '원성왕릉의 서역인 무인상', '입수쌍조문석조유물',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그리고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테헤란로 기념비'... 등등 '신라와 페르시아의 인연과 그 흔적들'을 실어놓았는데요. 특히 원성왕릉의 서역인 무인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과거로 여행을 갈 수 있다면, 1400년 전의 신라와 페르시아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말이죠. 지금까지 1400년 전 바실라(신라) 왕의 딸 프라랑 공주와 페르시아(파사국)왕자 아비틴의 사랑 이야기,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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