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목의 책 두 권을 나란히 읽었습니다. 스티븐 파인먼의 <복수의 심리학> 그리고 마이클 맥컬러프의 <복수의 심리학>입니다. 제목과 소재가 같지만 서술 방향은 다릅니다. 사실, 원제 그대로 번역이 되었으면 내용이 좀 더 쉽게 와닿을 것입니다.
스티븐 파인먼 : Revenge
마이클 맥컬러프 : Beyond Revenge
전자는 복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겠구나. 그에 비해 후자는 복수를 넘어, 결국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겠구나 예측할 수 있지요(그리고 그 예측대로 글이 전개됩니다.) 번역제목은 이런 점에서 아쉽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심리학’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교양서가 인기를 끌 확률이 높아 상업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르지요.
파인먼의 책은 복수로 가득찬 인류의 핏빛 역사를 보여줍니다. 인류는 복수라는 틀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을 알려주지요. 옮긴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데 역자의 말에서 살짝 자신 없는 투로 ‘용서해야 하지만 그거 어려운 거 맞습니다. 하다못해 저주인형이라도 마련해서..’ 하는 부분에선 동의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맥컬러프의 책은 진화기제로서 복수와 용서의 장점을 알려줍니다. 복수를 통해 우리는 ‘복수는 공격자들의 두 번째 공격을 좌절시킨다’, ‘복수는 잠재적 가해자에게 물러서라고 경고한다’, 복수는 무임승차자에게 협력을 강요한다’는 세 가지 효용을
갖고 있기에 인간의 본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반면 용서의 기제 역시 큰 효용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관계 회복과 유지’입니다. 협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인 인간에게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 용서 역시 인간의 본능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 의문을 표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다만 용서엔 조건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인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용서는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마음속에 용서할 준비가 되면 가해자가 염려해줄 만하고, 가치 있고, 안전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마음속에 복수심을 품는다 해도 가해자가 처벌을 받거나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복수심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용서할 준비가 된다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사과하고 자기 비하 제스처를 표현하며,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등 심리적 조건을 만들려고 애쓴다.”(271쪽)
저자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선 복수가, 어떤 상황에선 용서가 유효하지만, 복수가 가져오는 비극과 손실을 생각해서 인류는 되도록 용서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낫고, 그를 위해서는 용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경사문으로 글 양 불리기 하지 않아도 그 방법이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임은 독자들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크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가 피해를 입었다는 모든 증거를 버린 일입니다. 통화기록, 문자기록, 가해자에 대한 신상정보, 구체적인 피해액수 모두를요(피해액수는 통장에 남아 있으니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지요). 이유는 복수와 내가 복수했을 경우 그 가해자가 다시 가할 보복 걱정 등에 매달려 인생을 쓰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글자 하나 더 보고, 반성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후회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여유가 있어서 충분히 고소 등 법적으로 걸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기준에 의해서도 저는 용서할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1. 가해자는 제가 염려해줄 만하고, 가치 있고, 안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2. 가해자는 저에게 사과하고, 자기 비하 제스처를 표현하며, 보상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용서를 역설한 이 책에서 어쩌다보니 제가 건진 메시지는 ‘나는 용서할 처지가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용서라는 것은 상호작용이지 가해자 혹은 피해자 한쪽의 일방적인 마음먹음으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 “영어에서 ‘위안’이라는 의미의 ‘solace’는 위로금을 뜻하는 라틴어 ‘solatia’에서 파생했다. 이것은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긴급 자금에서 지불한 아주 소소한 금액이었다.”(240쪽)
* “이슬람어로 ‘이슬람교’를 가리키는 ‘Islam’의 어근 ‘s-l-m’은 ‘평화’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salam’의 어근이기도 하다.” (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