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페이지 까먹는 게 싫어서,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말 말고는 정직하게 쓸 말이 없구나, 진짜 싫어서 아껴 아껴 읽었다. 읽다가 남은 분량을 체크하고 일부러 앞부분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장면을 다시 읽으며 최대한 독서를 마치는 시기를 늦췄다. 일단 제 지인분들은 제 원망을 좀 듣습니다 왜 나한테 이거 읽으라 안 그랬니...

작가 커트 보니것은 1944년, 그가 22세때 제2차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쟁에 나갔고 그 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독일군에게 끌려갔다. 이듬해 드레스덴은 연합군에 의해 폭격당하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미국인은 7명이었다고 하는데 작가 보니것은 그 중 한 명이었다. 당시의 경험은 1969년 <제5도살장 혹은 소년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이하 제5도살장)의 자양이 된다.

<제5도살장>은 액자식 소설이다. 바깥 액자엔 작가 자신이 등장하며 소설을 적게 된 이유를 밝힌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작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전선에 나서지만 드레스덴의 기억은 항상 그의 머리를 짓누른

(여기까지 적고 힘이 없어진다. 보니것의 문체는 살짝 물러서서 체념을 담아 우물거리지만 그 와중에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기 때문에 그 갭에서 유머가 생긴다. 이런 글을 내가 ‘~이랬다’ 하고 독후감을 적으니 작가에게 누를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하지만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이 글을 계속 이어간다 ㅠ)

다. 그러던 중 옛 전우 버나드 V. 오헤어를 만나 전쟁을 회고하고, 오헤어의 아내인 메리의 일침을 듣고 작품의 성격을 반전소설로 바로 고정한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통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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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전쟁 때 아이에 불과했다고요-위층에 있는 저애들처럼!”
나는 사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실제로 전쟁 때 어리석은 숫총각들이었으며, 유년의 맨 끄트머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쓰지 않을 거죠, 그렇죠.”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비난이었다.
“어-모르겠는데요.” 내가 말했다.
“글쎄요, 나는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틀림없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던 척할 거예요. 영화라면 프랭크 시나트라와 존 웨인, 아니면 다른 매력적이고 전쟁을 사랑하는 추잡한 늙은 남자들이 두 사람을 연기하겠죠. 그럼 전쟁은 그냥 멋지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또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전쟁에 위층에 있는 애들 같은 어린 아이들이 나가 싸우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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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소설은 안 액자로 들어간다. 안 액자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빌리 필그림이란 이름의 남자로 작가와 동갑이며(작가도 ‘나’로 작중 등장인물이다) 직업은 검안사이다. 그 역시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이며 이후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지만 정신은 언제나 그때 그곳, 드레스덴에 매여 있다. 그는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관찰되고 그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시간에서 ‘풀려나게’ 된다. 즉 본인의 의지는 아니지만 과거-현재-미래 어느 시점으로든 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시간은 마구 엉켜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나 하면 다음 순간 미국의 보훈병원에 누워 있고, 이어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감금되어 관찰되기도 한다. 소설의 구성 역시 트랄파마도어의 순환적 시간관을 반영하여 시작과 끝이 바깥액자 첫머리에 제시되어 있고, 독자는 서술자가 제공하는 시간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여기서 의문은, 왜 보니것은 목적론적 세계관-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헵타포드의 세계관과 유사하다-을 택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전쟁의 불가항성, 뜻도 없고 이유도 없이 당하게 되는 전쟁이란 재난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 같다. 전쟁발발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은 개인이 전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세상은 부조리하고, 부조리하며, 부조리할 뿐이다. 호박 속에 갖힌 무당벌레처럼 우주의 모든 존재의 시간 속 사건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자유의지란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전쟁은 벌어지고, 그저 사람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저 우주는 종말을 맞이한다. 이 모든 것의 집약이, 소설에 106번 등장한다는 서술자의 추임새 “뭐, 그런 거지(So it goes)”에 담겨 있다.

그렇다면 개체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트랄파마도어인이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그저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저 그 순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빌리는 어떠했던가. 그에겐 선택권이 없다. 빌리는 뜻하지 않게 이 시간대, 저 시간대로 끌려다니며 끊임없이 전쟁을 경험한다. 용감했던 군사 에드가 더비가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사소한 일로 처형당하는 것을, 그가 죽은 후 묻기 위해 삽을 들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며, 굶주린 채 공장의 몰트시럽을 몰래 떠먹어야 하고, 죄없고 힘없는 생명들과 동물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감정없이 지켜봐야 한다-만일 일일이 감정적인 대응을 하다간 빌리의 영혼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부조리의 세계에서, 트랄파마도어인과 같은 4차원의 감각을 타고 나지 않은 인간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가 뿜어져 나온다고 생각한다. 부조리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의 세계와 그 비극을 인지한 독자들의 자유의지가 서로 반응을 일으키며 전쟁은 인간이 초래할 수 있는 가장 큰 야만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제5도살장>이 문학으로서 가진 힘의 1/10쯤 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2/10은 내가 미처 발견 못한 의미에서, 나머지 7/10은 보니것 특유의, 힘 뺀 블랙유머가 가득 담긴 문체의 힘에서 나온다. 다음 주엔 원문으로 도전을 해봐야지.

마지막으로 <스콧 니어링 자서전>의 한 부분을 인용할까 한다. 보니것도 동의하며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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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에게 어느 편을 선택하겠냐고 물으면, 나는 평화를 선택하겠다고 대답했다. 조지 커크패트릭처럼 나는 왜 전쟁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어느 나라가 이기든, 피해를 입고 고통받는 쪽은 양국의 민중들이다. 실제로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군수품 제조업자들이고, 지는 쪽은 민중들이었다. 민중들은 전장에서는 죽음과 고통으로, 후방에서는 걱정과 사별로 대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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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랄파마도어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고,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빌리의 망상일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망상이라는 생각이다. 보훈병원 입원 당시 옆 침상의 동료 로즈워터가 읽던, 킬고어 트라우트의 SF소설 내용이 빌리의 세계와 비슷하다는 점, 비행기 사고로 두개골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그렇다.

* 커트 보니것 만세! 커트 보니것 만세! 커트 보니것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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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8-08-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커트 보니것의 유머와 문체 눈물나게 좋죠^^

조그만 메모수첩 2018-08-12 20:41   좋아요 0 | URL
독후감 쓰자마자 고양이라디오님 리뷰부터 제일 먼저 찾아보고 고개를 주억거렸었어요. 보니것 만세입니다 ;ㅁ;

노란가방 2018-08-14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게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즐거운 독서셨군요.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넣어둬야겠네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8-15 00:11   좋아요 1 | URL
보니것의 다른 작품들과 에세이도 찾아 읽어보려구요. 제5도살장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말투가 상당히 광고말투네요 ㅎㅎ)

북극곰 2018-09-17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세! 부르고 가요. ㅎ

조그만 메모수첩 2018-09-18 22:53   좋아요 0 | URL
만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