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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경험이 모두 그러하듯, 수용소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이렇게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우리는 이웃 사람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p.60

뭐든지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가, 나는 이런 자질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3개월 전에는 극심한 공포였던 현실을 이제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은 누릴 수 없는 과거의 편리에 대해 이렇게 금방 잊을 수 있다니, 얼마나 축복인가. 무엇보다도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던 이 거친 삶이 그래도 계속되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분명히 이런 자질 덕분에 인류는 그 숱한 역사적 비극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p.103

지금 이 삶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요즘 우리도 조금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코로나19는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자가격리를 강요했고 나도 어쩔 수 없이 10여일간 원래의 일상에서 벗어나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그야말로 죽이고 있다. 원래 집순이기도해서 답답해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지만 처음 1주일은 하던 운동도, 도서관이나 스타벅스에서 해왔던 독서도 일단멈춤 상태이다보니 언제까지 이렇게 심란하게 보내야하나 싶었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 안정감를 찾아가고 있다. 이번 일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 같은 다람쥐쳇바퀴같은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사람들과 밥 한끼 차 한잔 하는 일이나 전시회, 영화관 가는 일상이 얼마나 호사로운 일이었는가 깨닫게 되었다. 또 이 견딤의 순간순간이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는 반성의 시간과 함께 내가 한층 더 나은 인간으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된 건 아닌가,,라는 의미부여를 억지로 하게 하기도 했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상황..탓하기보단 최대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고 잦아들기를 다 같이 한 맘이 되길 바래본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스스로 믿는 것만큼 그렇게 도덕적이지고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자주 나는 인간의 지성과 관념이 모두 자신의 전체적 자아의 도구역할을 하는 것을 목도했다. 또한 이 전체적 자아는 오로지 자신의 복리에만 신경쓸 뿐 이웃을 존중하거나 공정하게 대할 자유는 없는 것 같았다.
현재와 미래에 닥칠 위험을 감지했을때 삶의 모든 우발적 사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놀란 우리의 영혼이었다.
우리의 진짜 자아가 가지는 근본적인 이기심이었다. 이 이기심은 우리 개인의 생각과 행동 저 깊은 곳에서 행위를 결정하고 방향을 정한 다음 일상생활에서 늘 목격되는 그런 실재적인 잘못된 행동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p.

실제적인 업무에 능숙한 사람들은 그들이 보기에 삶의 현실적 문제와 상관없어 보이는 도덕심이나 양심같은 문제에 에너지를 쏟는 도덕가나 종교인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이 여실히 보여주듯 이런 실재적인 일이 삶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들이 공동체의 협력정신에의해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는 삶의 주변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매일의 노동의 세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다. p.322

경험이 아니라면 공감을 통해서라도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래서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삶에서 정말로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깊이 확신하는 바와 같이 최고의 영적수준이란 이웃의 삶에서 필요한 물질들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구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웃이 필요로하는 물질을 주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관계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448

완전 공감한다. .이 글을 읽자니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누군가가 경제적 궁핍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위해 주님이 채워달라는 기도를 한다고. 본인들이 직접 도움을 줄 생각은 안 하고. 맞다.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현실이다. 나만하더라도 이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죄책감은 있어서 그들을 마주보지도 못 하고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요즘의 전 지구적인 바이러스 문제로 경제적 궁핍에 힘들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맘으로 나아가야 할까?

수용소 경험은 인간에 대한 두가지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인간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대단히 창조적이고 천재적이며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압박의 상황에 놓이면 어느 때보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수용소 생활이 깨닫게 해준 것이 또 한가지 있다.인간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모든 사람은 이런 영적 중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영적 중심을 통해 행위의 목적과 의미를 얻으며 그래서 존재의 일관성과 방향을 얻게 된다. p.451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듯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 (자기자신, 자신이 속한 그룹 숭배) 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종교적 의미에서 죄라 할 수 있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p.455

요즘 내가 가장 자주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요 문제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 중점을 두고 살고 있다보니 좋긴하면서도 맘 한 구석편엔 종교적 가르침과 일치하는 삶은 아니기 때문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도 100프로 자유롭진 못하다. 작가는 궁극적 관심이 안으로만 집약될 때 우리 관심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비인간적으로 되기 싶다고 말한다.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래서도 나도 고민하고 있고. 작가는 해결 방법으로 삶의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안에 두라고 말한다. 말이 쉽지 이 부분도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이게 쉬웠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 보단 파스텔톤의 세상이 됐을텐데.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앞에 나, 나의 미래, 고통의 문제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안에 앉아있는 것 그럴 때 내 맘 만지시는 주님의 인도 따라 순종하는 것, 이런 삶을 사는 날이 빨리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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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걸스러운 남독의 버릇에 숨은 동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피난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수련이다.
피난, 동기는 금방 짐작할 수 있는대로 가난과 외로움과 적대감의 그 화해할 수 없는 치욕의 세계로부터 되도록 멀리 달아나 몸을 감추고자하는 심리상태를 이른다.
수련, 동기는 피난의 공격적인 측면이다. 되도록 멀리 달아나 몸을 숨기되 언젠가 도망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를 상정하고 그 때 보복하기 위해 은밀하게 무기를 다듬고 무예를 익히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나 진지하지 않은 책 읽기를 수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난센스다.그것이 수련이 되기 위해서는 진지한 책읽기여야한다.
진지성이 결여된 책읽기는 무기를 다듬는 대신 비생산적인 울분만을 키울뿐이며 무예를 익히는 대신 부질없는 적대감만 부글부글 끓게 만들 뿐이다. p.118

거기다 말들은 또 얼마나 불완전한가. 이 말을 붙잡으면 저 말이 실해 보이고, 그래서 저 말이 낫겠다 싶어 그걸 내보내려고 하면 또 다른 말이 고개를 불쑥 쳐드는 식이었다. 궁리를 하면 할수록 이것도 저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완벽한 말을 얻으려는 욕심은 결국 아무 말도 선택하지 못하게 했다. 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하는 순간 진실은 탈락 되고 마는 것을. 나중에는 그런 지경에까지 빠지고 말았다. p.165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전체가 아니다.
크든 작든 모든 역사는 의미와 진실에 대한 기록이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 입장과 세계관에 따른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안다. p.196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란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았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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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 자신으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본래 그렇게 되어야 하는 나 자신,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렇게 본질에 꼭 맞는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변함없이 매일 수련하는 것이다. 삶을 동요하지 않는 일정한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높은 단계의 요가 수련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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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 이번이 정말 처음일까 그것은 고통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눈 뒤의 텅 빈 공백. 그리고 그런 이들을 정의하는 결핍.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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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르는 단호한 표정들에서 나는 내가 품은 호기심은 추잡한 것이며 나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가 한 모든 희생에 대한 도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p.106

아마도 그것은 내가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 내가 애절하게 원하던 나를 보호해 줄 사람, 멋진 투사, 나를 폭풍속으로 집어던지지 않을 사람, 그리고 내가 다치면 나를 고쳐 줄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p.160

종교극단주의 근본주의자. 피해망상증 환자, 안전불감증 환자, 아동 노동력 착취자, 종교를 핑계로 자식들을 무책임과 방관의 상태에 내던진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을까. 아파도 안 되고 (출생증명서, 보험이 없어서) 폐기처리장에서 일할 땐 목숨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기 몸을 지켜야 했으며 학습을 기대해선 안 되고..도대체 이런 일이 80년대에, 그것도 미국에서 일어났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아버지에겐 가족 모두가 본인 소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냥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동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와중에 몇명의 자녀는 책을, 학습을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피해 컴컴한 지하실에서 백과사전이라도 수학책이라도 읽으려고 애쓴다. (얼마나 버려지는 책이 많은데..트럭으로 갖다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 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p.287

이 부분을 읽다가 《어느 독일인의 삶》이 생각났다. 30년대 말 독일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 무언가가 벌어지는 것 같긴한데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던 - 그랬다간 그럭저럭 살만한 나의 일상이 엉망으로 되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귀찮음 때문에 - 한 여자의 변명이 떠올랐다. 끝까지 그녀의 자기 합리화로 마무리 지어졌던 책이었지만 사실 난 완전히 비난만 할 순 없었다. 내가 만약 그 입장이었더라도 어떻게 처신했을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라는 나와 다른 약자들이라도 인간적 존엄은 무시할 수도 모른척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렇게 조금씩 망상증환자 아버지의 교육에 갇혀 있던 타라가 조금씩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보통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학습하며 성숙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감동이다.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 때까지 한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p.312

이제 타라는 생각이란 걸 하게 됐다. 상황을 펼쳐 볼 수 있게 됐고, 자기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에 귀기울일줄 알게 됐고,다른 사람들의 관계에서 한발짝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줄 알게 됐다. 이제서야 나도 맘이 조금 놓인다. 온전히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 18세밖에 안 된 소녀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길에 한발짝 발을 디뎠다는 것 자체가 무지하게 기뻤다.

그러나 그 말들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생명이 없는 말들이 되어 있었다. 확신에서 나온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p.354

이 얼굴과 이 여자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 뒤에 있는 그 무엇, 앙 다문 그녀의 턱선에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이 얼굴과 이 여자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희망, 확신, 혹은 신념이었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찾지 못했지만, 그것은 믿음 비슷한 것이었다. p.444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 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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