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르는 단호한 표정들에서 나는 내가 품은 호기심은 추잡한 것이며 나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가 한 모든 희생에 대한 도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p.106

아마도 그것은 내가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 내가 애절하게 원하던 나를 보호해 줄 사람, 멋진 투사, 나를 폭풍속으로 집어던지지 않을 사람, 그리고 내가 다치면 나를 고쳐 줄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p.160

종교극단주의 근본주의자. 피해망상증 환자, 안전불감증 환자, 아동 노동력 착취자, 종교를 핑계로 자식들을 무책임과 방관의 상태에 내던진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을까. 아파도 안 되고 (출생증명서, 보험이 없어서) 폐기처리장에서 일할 땐 목숨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기 몸을 지켜야 했으며 학습을 기대해선 안 되고..도대체 이런 일이 80년대에, 그것도 미국에서 일어났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아버지에겐 가족 모두가 본인 소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냥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동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와중에 몇명의 자녀는 책을, 학습을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피해 컴컴한 지하실에서 백과사전이라도 수학책이라도 읽으려고 애쓴다. (얼마나 버려지는 책이 많은데..트럭으로 갖다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 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p.287

이 부분을 읽다가 《어느 독일인의 삶》이 생각났다. 30년대 말 독일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 무언가가 벌어지는 것 같긴한데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던 - 그랬다간 그럭저럭 살만한 나의 일상이 엉망으로 되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귀찮음 때문에 - 한 여자의 변명이 떠올랐다. 끝까지 그녀의 자기 합리화로 마무리 지어졌던 책이었지만 사실 난 완전히 비난만 할 순 없었다. 내가 만약 그 입장이었더라도 어떻게 처신했을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라는 나와 다른 약자들이라도 인간적 존엄은 무시할 수도 모른척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렇게 조금씩 망상증환자 아버지의 교육에 갇혀 있던 타라가 조금씩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보통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학습하며 성숙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감동이다.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 때까지 한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p.312

이제 타라는 생각이란 걸 하게 됐다. 상황을 펼쳐 볼 수 있게 됐고, 자기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에 귀기울일줄 알게 됐고,다른 사람들의 관계에서 한발짝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줄 알게 됐다. 이제서야 나도 맘이 조금 놓인다. 온전히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 18세밖에 안 된 소녀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길에 한발짝 발을 디뎠다는 것 자체가 무지하게 기뻤다.

그러나 그 말들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생명이 없는 말들이 되어 있었다. 확신에서 나온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p.354

이 얼굴과 이 여자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 뒤에 있는 그 무엇, 앙 다문 그녀의 턱선에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이 얼굴과 이 여자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희망, 확신, 혹은 신념이었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찾지 못했지만, 그것은 믿음 비슷한 것이었다. p.444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 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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