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봉기 (대중의 반역, 대중의 반란)
La rebelión de las masas (The Revolt of the Masses, 1930)

출처 : 위키백과


스페인은 철학이 발전하지 않는 유럽 국가 중 하나다.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말이다. 그런 스페인에 가장 유명한 철학 자 중 한명이 오르테가 이 가세트다. 또 오르테가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읽힌 저서는 <대중의 반역>이다. 한글로 읽으면 반역이라는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거 같아서 영어로 한번 보자면 'The Revolt of the Masses'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에 이은 대중을 탐구하는 저서에 대한 포스팅이다. 대중은 오늘날에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되곤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주체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선출된 권력이다. 때문에 대중들의 힘은 신성한것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동전엔 양면이 있듯 대중은 선동당하기 쉽다. 악의적인 지도자에 의해 대중 운동은 사회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대중의 지혜는 그리 믿을 만한게 못될때가 많다. 루소의 일반의지를 따라가다간 공동체가 이도 저도 아닌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을 통해 오늘날에 급속도로 사회 전반에 나타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사회가 올바르게  굴러가기 위해선 대중이 정치 엘리트에 복종하고 연대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창조적인 삶이란 정력적인 삶이고 정력적인 삶이란 다음 둘 중의 한 상황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곧 지배자이든지 아니면 지배의 전권을 인정받은 사람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든지. 다시 말해서 지배하거나 복종하거나 둘 중 하나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것은 잠자코 지내는 것이 아니고 - 잠자코 지낸다는 것은 비천한 것이다 - 그와는 반대로 지배자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 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 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p.199)"


대중의 등장


대중이 사회에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은 역사에서 존재감이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확대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을 통해 기술하고 법 앞에 평등을 지시함으로써 개인 모두가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적으로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직면하는 상황이다. 


모든 인간이 법률적으로 똑같다고 해서 정말로 똑같을까? 오르테가는 인간의 외양적 지위가 아닌 내부적 심리 상태를 통해 고귀한 인간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첫 번째고, 그저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두번째다. 오르테가에게는 니체의 냄새가 난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며 생의 철학을 주창했던 니체와 같이 오르테가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퇴폐적인 인간과 고귀한 인간은 구분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인데 이 당시는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씨앗이 꿈틀대는 시기였다. 한 마디로 대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동시에 대중들이 선동당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대중의 반역>을 통해 대중의 아이러니를 말하려 했다.


과도민주주의


고귀한 인간은 적고 우매한 대중들은 넘쳐난다. 후자의 인간들은 매 사에 참견하며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도 민주주의라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정책이라는 것은 충분한 숙고를 통해서 발의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숙고하지도 않은채 우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우기기도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중이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는 왜곡되기 쉬우며 과도한 참여로 국가 정책이 꼬꾸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상태는 나날이 좋아져 이제 모든 대중들은 과거 루이 15세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인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고 과도한 참견을 낳는다. 다만, 이들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데카당스와 공허한 대중들


이들의 정신 상태는 전적으로 혼란의 상태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대중은 책임지기를 회피한다. 단지 권리만을 주장할 뿐이다. 과거로부터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전통을 무시한다. 자신의 물질적 풍요가 과거 세대의 산물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으며 감사하지 않는다. 전통을 무시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도덕 관념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정신적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몰개성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르테가는 삶에 대한 지침을 언급한다. 


"인간의 삶은 영광스런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찬란한 운명이든 평범한 운명이든,
본질적으로 뭔가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의 실존에 새겨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삶이란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 때문에 행하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오직 내게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에 투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긴장도 없고 '형태'도 없이 헐거워 진다(p195)"


"요즈음 수많은 인생들이 투신할 곳이 없이 자신만의 미로에 빠져
헤메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중략)

각자의 삶이 해방을 얻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사일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뭔가를 채워야하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내면의 진실에서
나온것이 아닌 헛된 것에 몰두한다. 

(중략)

삶이란 뭔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며
목표를 향해 길을 가는 것이다.
목표는 내 길이 아니고 내 삶도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을 제공해주는,
따라서 내 삶 밖의 저 멀리에 있는 그 무엇이다. 
내가 이기적으로 내 삶의 내부에서만 걷기로 한다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아무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그 내부를 거닐다가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다.(p156)"


지배자에 복종하라


오르테가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어려움을 바탕으로 좋은 삶을 이끌어 낸다.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면서 무언가를 위해 봉사했을 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화 된 개인은 대중으로서 살아가게 되면 명확한 목표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앞서 말했던 데카당스적 개인이다. 이런 상태는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 개인은 지배자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에 복종하지 않고 모든 개인이 원자화 되게 된다면 유럽은 덕과 영광을 모두 잃어야만 할 것이고 이는 모든 인간을 공허한 상태로 만들어 놓을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배자에게 복종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연대하고 책임을 치는 동시적 참여를 하라고 오르테가는 요구하고 있다. 


https://larus3.tistory.com/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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