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제어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어려서부터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다. 결국 동료들과 강도를 저지르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감옥에 투옥된다. 수감 중 우연히 알게된 정부의 비밀 실험에 지원하게 되는 데, 실험은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를 수 없도록 인간을 개조 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일명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이다.
알렉스의 눈을 고정시키고 일련의 영상들을 보여주는 실험자들. 뒤편에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흘러나온다. 실험은 대성공하게 되고 알렉스는 더 이상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된다. 알렉스는 여자를 보고 탐하려는 욕구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상대방을 공격할 수도 없다. 알렉스의 몸은 반 사회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설정된다.
이 실험의 주도자인 장관은 알렉스의 모습을 보고 실험 결과에 대만족한다. 범죄를 없애고 말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걸었던 장관은 이를 확장하려 한다. 하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고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철회하게 된다.
선악설
영화는 초반부부터 알렉스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다. 범죄를 저질러도 반성하지 않는 싸이코패스 알렉스는 흔히 말하는 성악설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는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범죄자를 말 그래도 '갱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알렉스에 대한 어떤 '불쌍함'을 그려내고 있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스는 장관에게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의 강제성과 부작용은 없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장관에게 약속을 받는다. 자신의 악한 측면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과연 알렉스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신의 본성으로 다시 택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에 후회는 없는 듯 하다.
권력의 범위
정부는 어디까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 할 수 있는가? 현대 국가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헌법 상 보장된 기본권을 공권력이 어느정도 까지 침해할 수 있는지다. 알렉스와 같은 범죄자들이 다시 사회에 나와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이 이들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하는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공권력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면 인간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공학적 접근은 반인륜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바꿔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CCTV와 같은 촬영 장비들은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더 이상 집을 제외하고 사생활을 지키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도로 곳곳의 차량들은 블랙박스를 통해 촬영하고 있고 CCTV 예산 또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긴 하지만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공익이 더 크기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두순
얼마 전, 조두순이 출소 했다. 나영이 사건의 주범인 조두순은 어린 아이를 성폭행해 장기를 훼손시켜 평생을 아프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검사의 실수로 인해 형량이 대폭 줄어 조두순은 무기 징역이 아닌 12년 형을 받고 만기 출소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싸이코 패스 성향이 매우 높게 나왔던 조두순은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았지만 결국 출소 했다.
앞으로 몇 년이내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른자. 왜 국가는 이런 범죄자를 방치해야만 하는가? 이는 전적으로 영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딜레마와 연결된다.
몇 명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가로 공동체는 안전을 얻는다.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혹은 전국 곳곳에 CCTV를 설치함으로써 치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정규분포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에 선천적으로 싸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자유를 자의적으로 침해하는 것은 부당한 일것이다. 그 침해를 대가로 큰 공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공리주의를 대가로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허용되냐는 사고실험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거진 모든 사회현상은 정규분포를 따른다. 양 극단에서 일어나는 이탈 행위들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한 사회공학적 사고는 위험할 뿐더러 불가능하다. 때문에 조두순과 같은 흉악 범죄자들에 대한 완전 격리를 시도하더라도 곳곳에서 부작용은 터져나올 것이다. 권력의 남용 문제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