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정 확실시 된 시점에서 히틀러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생존보다 명예를 선택한 히틀러였다. 영화 <다운 폴>은 2차 세계대전 마지막 며칠 간을 다루고 있다. 전선들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베를린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독일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국가 사회주의와 광기


영화 내내 히틀러를 비롯한 군인들은 절대 독일이 항복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차라리 항복 할 바에야 자살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점점 포위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의 모습을 보며 초연함을 잃는 모습은 인지부조화의 끝을 보여준다. 술을 흥청망청으로 마시며 극도의 불안을 잠재우는 장성들. 대중 선동의 일등 공신이었던 괴벨스는 큰 소리치며 절대 항복은 안된다고 소리친다. 몇몇 제 정신이 박힌 장교들은 항복과 함께 정치적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없다. 수 천 수 만명의 군인들은 그 사이에도 죽어나가고 있었다. 수 천의 젊은 장교가 몰살 당했다고 보고 받은 히틀러는 황당무계한 말을 내놓는다. "젊은이들은 원래 그래야 하지 않나?"


영화 곳곳에서 광기는 발견된다. 국가 사회주의가 없는 독일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말하는 괴벨스의 아내가 대표적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들을 수면제로 잠재운 후 신경계와 호흡계를 마비시키는 알약으로 죽이고 만다. 히틀러의 자살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태연하게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괴벨스의 아내였다.


식사 도중 수류탄을 몰래 터뜨려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는 군인 또한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독일 패망 이후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상황을 멋대로 판단한 군인은 다같이 자살을 택하자는 말도 없이 몰래 수류탄을 터뜨렸다. 


라이히, 에리히 프롬, 한나 아렌트

당시 독일 국민들의 심리에 대한 분석은 이미 여러 각도에서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라이히, 에리히 프롬, 한나 아렌트가 있다. 라이히는 <대중 심리와 파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파시즘을 분석했다. 우수한 혈통을 이어가는 아리안 족이라는 신화 속에서 이뤄지는 성 억압이 수동적 국민을 양산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토대로 독일 제국의 정당성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 또한 약한 인간들은 죽어도 되며 유대인들은 혐오의 대상이다. 영화 속 전쟁에 불필요한 환자들을 몰살 시키고, 노인들에게 식량도 주지 않은 채 가둬두는 장면은 이러한 독일 국민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살 남짓된 꼬마는 히틀러의 칭찬을 받고 전쟁에 나가 더 많은 연합군들을 죽이겠노라고 결심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권력과 국가에 자유를 내줬다고 주장한 에리히 프롬의 분석 또한 영화 곳곳에서 포착된다. 히틀러에게 선물받은 독약을 성스럽게 여기며 독일 제국의 항복을 볼 바에 자살을 택하고, 수적 열세에 반드시 죽게 될거라는 자신의 운명을 알더라도 총을 들고 명예롭게 죽겠다는 군인들은 모두 자유를 국가에 헌납한 사람들이다. 

동시에 영화 초반 히틀러의 비서일을 하며 나치에 공헌했던 여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장면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국가 원수인 히틀러의 곁에서 일한다는 자긍심을 가졌지만, 먼 훗날 자신의 일이 홀로코스트에 봉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났을 때 자신의 무지함을 이유로 자신의 잘못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투쟁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유대인에 대한 분노와 독일인의 우월성을 믿었던 히틀러는 전 세계에 독일의 위대함을 똑똑히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자살하기 전까지도 이십여년간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독일 제국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치하에 사람들은 그저 부품에 불과했다.


나치는 사라졌는가?


광기가 일상화되는 나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라졌지만, 정말로 사라졌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유를 헌납하고 공동체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사고는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로 나타나는 속칭 '문빠'들과 탄핵을 부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로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들이 대표적이다. 사유가 사라지고 자유를 헌납하고 살아갈 때 나치는 부활한다. 히틀러는 선출된 권력이었다. 정당성을 앞세우며 사법과 입법 모두를 장악했던 국가사회주의당은 결국 6천만명이라는 사상자를 대참사를 가져온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전체주의라는 유령이 다시 부활하기를 노리지만 우리가 자유를 쟁취하려는 노력과 사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유령은 쉽게 부활하지 못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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