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적 윤리의 이분법적 관점은 선악이 모순적 대극이라는 원칙하에 합일보다 분열을 부추긴다. 그런 관점을 따르자면 선천적이고 자연스러운 생각과 감정은 살려낼 수 없다.
억압하여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억압된 것들은 결국 되돌아와 신경증적 증상으로 우리를 괴롭히거나 우리가 불신하고 저항하는 타인에게 투사된다. 
불쾌감의 흔한 원인이 고질적 도덕주의라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 P284

인간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대극의 형태를 띤다. 사는동안 무엇을 행하거나 어떤 경험을 하건 간에 그 반대 극이 무의식 속에 있기 마련이다. 진실의 양면성을 견뎌내야 현실과조화를 이룰 수 있다. 대개 우리는 서로 불화하는 두 가지 관점을 다 지지하면서 갈등을 얼버무린다. 일하러 가야 하지만 일하기 싫다. 이웃이 싫지만 그렇다고 무례하게 굴 수는 없다살을 빼야 하는데 먹는게 너무 좋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매일
모순과 더불어 살아간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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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휴브리스.hybris‘라고 칭했는데, 
이 단어는 때로 ‘자만 또는 ‘교만‘으로 해석할 수 있다. 
휴브리스는 한정적인 지식,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는 가정에서 
생기는 편협한 관점을 의미한다. 정신분석가 제임스 홀리스 James Holis가 지적했듯 이는 자기기만이다. 
현재 벌어지는 일을 전부 다 다안다는 생각은 
콤플렉스complex(한쪽으로 치우친 내면의 틀)의 표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의식이 아는 이야기 또는 안다고 믿는 이야기는 우리 안팎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이 인생 전반기에 휴브리스를 경험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듯,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은 삶이 안기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한다.
- P98

중년의 정체성은 자신의 과거를 관습화한 것이다.
정체성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과거를 답습하며 살면 현재를 완전하게 살 수 없다.
에너지의 구조화(자아를 갖는 것)는 일관적인 삶의 필수 요소다. 형식도 필요하지만, 의식 차원의 인격이 역동적인 
무의식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진로를 교정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바람직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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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언가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걸 먹든 저걸 먹든, 이걸 하든 저걸 하든, 이걸 생각하는 저걸 생각하든 관계없이 사람들은 죽어 가고 있다. 
내가 보기에 죽음은 삶보다 더 자연스러운 순간인 것 같다.

현대의 가이드북에서 독성이 있다고 인정되기 전까지 주름우단버섯은 맛있는 버섯이었다. 
그것은 어디서나 자라기 때문에 모든 세대에 걸쳐 
그것을 먹어 왔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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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그저 지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번창하리라 생각한다.
인간이 불멸인 이유는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고갈되지 않는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연민을 갖고 희생하고 인내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을가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의무, 작가의 의무는 바로 이런 것들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인간의 사기를 북돋우고, 과거의 영광이었던 용기와 명예와 희망과 자긍심과공감과 연민과 동정과 희생을 일깨움으로써 인간이 지속될 수 있게 돕는것은 시인과 작가가 가진 특권이다.
-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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