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당신 -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가족그림책 2
고은경 지음, 이명환 그림 / 곰세마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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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어제 떠올랐던 붉은 해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처음 떠오르는 태양처럼 아침 해를 새롭게 여긴다. 새해 첫날은 희망과 새로움, 탄생과 연결되고,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소멸, 슬픔, 사(死)가 존재한다. 새해 아침, 지인 가족 부고 소식을 접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그이의 마음은 희망으로 첫날을 맞는 이들과는 사뭇 다르겠지. 갑자기 딴 세상에라도 간 듯 그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위로될 수 없겠지.


나는 오늘 당신에게 <사랑하는 당신>을 전합니다.


당신이 손 떨린 글씨체로 남긴

레시피 공책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나는 눈이 따갑도록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은 고은경 작가가 호스피스 사별가족 모임에서 만난 어르신을 모티브로 한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국간장과 진간장이 헷갈린다. 아내와 영원한 이별을 한 할아버지, 일흔이 넘어서 하는 요리는 쉽지 않다. 아내가 레시피 공책을 남겨 꼼꼼히 일러주었는데도 말이다. 할아버지는 “남편은 일해서 처자식 배불리 먹이고, 아내는 자식 키우며 살림 잘하면 걱정 없이 잘 사는 거”라 여겼다. 아내가 들으면 다 늙어 주책이라고 하면서도 웃음 가득할 “사랑합니다”라는 그 흔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살면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함께 살림하는 행복’을 뒤늦게 알아챈다, 사랑하는 당신이 떠난 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지친 몸으로 딱딱한 바닥에 눕습니다.

나도 당신 곁에서 그만 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상실을 가장 크게 느낀다고 한다.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기에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또한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별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준비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할아버지는 아내가 떠나고 구멍 난 양말을 신을 때처럼 허전함이 불쑥 밀려오기도 하고, 불 꺼진 집처럼 마음이 어두워져 아내 곁에 그만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를 두고 정신과 의사이자 전 세계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실의 현실은 깊은 충격과 절망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 그림책의 할아버지가 아내 곁에서 그만 쉬고 싶은 마음처럼 말이다.


그림책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할아버지의 상실을 잘 드러낸다. 해서 어떤 독자들은 행간에서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동화되어 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냥 우울하거나 슬프지만은 않는다. <사랑하는 당신>에는 사랑과 따듯함이 베여있다. 이는 글 그림을 쓰고 그린 두 작가의 상실의 경험에서 오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진함일 수도 있다. 또 밝은 색의 그림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허한다.

 

 

나는 당신처럼 부지런히 사랑하며 살까 합니다.

 

 

아내가 떠나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떨리는 손으로 레시피 공책을 채워갔듯,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아내의 손맛을 흉내 내며 반찬을 하거나, 아내가 아끼던 화분에 물을 주면서 상실의 아픔을 조금씩 천천히 사랑으로 채워간다.

 

 

그림책은 홀로 남은 할아버지의 외로움에 시리기도 하고, 할아버지 마음 한켠 사랑하며 살겠노라 노란빛이 자리해 따뜻하기도 하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 완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과 이로 인한 상실은 누구나 겪게 된다. 하지만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기고 간 화분에서 새순이 돋고 꽃이 피듯, 오늘도 어디선가 지고 피는 꽃이 있으리.

 

삶에서 마주할 상실의 어느 날이 오기 전, 더 늦기 전에 당신에게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처럼 부지런히 사랑하며 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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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중할까요? 세트 - 전6권 왜 소중할까요?
리즈 레넌 지음, 마이클 벅스턴 그림, 임유진 옮김, 영유아교사협회 외 감수 / 곰세마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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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하나 주고 싶군요. 아무도 없나요?

-루이청강 중국 CCTV 기자: 한국 기자들에게 대신 제가 질문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그건 한국 기자가 질문을 할 건지 말 건지에 따라 결정되겠네요. 없나요? 아무도 없어요?


지난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은 서울 G20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하였다. 당시 폐막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자 자신에게 질문을 해 달라며 요청했었다. 하지만 한국 기자 중 어느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고, 급기야 중국 기자가 자신이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물었다.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그저 지나간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질문을 하는 능력은 타고난다기보다는 길러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질문을 많이 받고 자랄수록, 생각도 커지고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 김현섭의 <질문이 살아 있는 수업>에서

한국 기자들은 왜 질문하지 못했을까. 그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쩌면 질문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좋은 질문은 사유하게 하고, 궁금증이 생기게 한다. 질문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고 세상과 마주하는 방법과 태도를 만든다. 리즈 레넌의 <왜 소중할까요> 시리즈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을 수 있는 일상의 문제들을 질문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친구 왜 소중할까요?>, <가족 왜 소중할까요?>, <동물 왜 소중할까요?>, <우리 몸 왜 소중할까요?>, <성장하는 뇌 왜 소중할까요?>, <지구 왜 소중할까요?> 총 6권의 그림책은 인성, 감성, 생활을 이야기한다.


<친구 왜 소중할까요>(리즈 레넌 지음, 마이클 벅스턴 그림, 곰세마리, 2021)



친구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또래를 말해요.

-<친구 왜 소중할까요?>에서


6권 중 <친구 왜 소중할까요>는 ‘친구’라는 낱말 뜻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알 것 같은 낱말이지만 뜻을 명확하게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특히 막 배움에 접어드는 아이들이라면 더더구나. 이처럼 이 그림책은 배움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사려 깊게 살핀다. 그림책에서 다양하게 던지는 질문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친구와 친구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친구로 자리하는지, 내가 싫어하는 일을 친구가 하자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다양한 질문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친구와의 관계 맺기에서 벌어질 수 있는 기쁨, 슬픔 그리고 화난 마음 들. 그림책은 실제 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에 공감해 준다. 친구와 싸우거나 곤란한 경우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토닥인다. 이처럼 <친구 왜 소중할까요>는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친구라는 사회로 나아가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신발을 바꿔 신는 것처럼 불편할 수 있어요.

- <친구 왜 소중할까요> 본문에서


친구와 감정이 삐끗했을 때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편지를 쓸까, 전화를 할까, 아니면 아예 모른척하고 연을 끊을까. 그림책에서는 친구와 화해하기 위해 친구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일은 신발을 바꿔 신는 것처럼 불편할 수 있지만, 나를 들여다보고, 친구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또 ‘너 때문이야’라는 ‘너 전달법’이 아닌 ‘내 마음이 이래’라며 ‘나 전달법’으로 화해해보라고 한다.




<왜 소중할까요?> 시리즈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쉬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의 언어로 쉽지만 어른들도 사유할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질문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 시리즈는 매 권마다 그 분야 전문가들, 뇌과학자 정재승,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하정훈, 동물행동학자 박시룡 들이 감수하고 추천한다. 이 그림책을 신뢰할 수 있는 지점이다. 특히 6권 모두 누리 과정·초등 교과를 기반으로 한 ‘초등·누리 놀이배움지’가 수록되어 있어 그림책을 보고 부모님이 아이들과 활동하거나 아이들 스스로 놀이처럼 즐길 수 있다.


나는 그림책 토론 리더로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을 만나 활동한다. 짧은 그림책이라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는데 그림책을 이렇게 깊이 볼 수 있군요,라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질문 때문이다. 매번 질문을 만든다, 생각거리를 발제한다. 이 그림책은 그림책 활동가가 아니어도 충분히 깊이 볼 수 있도록 배움지가 수록되어 알차다. 그림책을 보고 아이에게 어떻게 질문하고 다가가야 할지 막막하다면 추천한다. 비단 초등 저학년을 둔 학부모님이 아니어도 시리즈 모두 곁에 두고 자주 펼쳐보게 될 수도. 뭐 이런 싱거운 질문을,라고 생각한 것에서 깊은 사유를 하게 될 터이니.



좋은 질문은 쉬운 질문으로 깊은 사유를 하게 한다.

좋은 그림책은 쉬운 언어로 모든 연령을 생각하게 한다.

- 하루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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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힐버트
바두르 오스카르손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아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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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공중에 붕 떠올라 내려오지 못한다면...

공중에 붕 떠있는 친구를 만난다면...

<나는 힐버트>는 북유럽 페로제도의 작가 바두르 오스카르손의 최근작입니다. 그는 전작 <나무>에서 힐버트와 밥을 데려와 등장시키는데요. 그렇다면 힐버트와 밥의 두 번째 이야기일까요.

<나는 힐버트>의 원제는 <Hilbert>입니다. 작가는 이 그림책을 두고 "무슨 이야기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주로... 힐버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히지요. 그렇습니다. 작가가 말했듯이 이 그림책을 처음 보고 읽었을 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가 여럿 나올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또 읽고 보게 되지요. 그래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작가가 밝혔듯이 그냥 힐버트 이야기입니다. 또 보고 읽습니다. 힐버트도 보고 밥도 봅니다. 힐버트 말도 듣고, 밥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할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그래서 자꾸 보게 되는 걸까요.

밥, 와서 나 좀 도와줄래?

어느 날 밥은 가게에 들렀다 가는 길에 힐버트에게 문자를 받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밥은 힐버트에게 전화를 하지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밥에게 힐버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그냥 와 줄 수 없느냐고 합니다. 왜인지는 와 보면 안다고 하네요. 쿨한 밥, "그래, 알았어"라고는 바로 힐버트를 찾아갑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달려와 줄 수 있는 친구 밥이네요.


"안녕, 밥"

"안녕, 힐버트"

밥과 힐버트는 서로 안녕이라며 인사는 했지만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는 말 문이 막히지요. 둘은 왜 아무 말 하지 못했을까요? 글쎄, 힐버트가 공중에 붕 떠 있네요. 힐버트 말에 의하면 그냥 달리고 높이 뛰면서 놀고 있었을 뿐이고, 그러다 한번 "높-이 뛰었는데" 그냥 둥 떠 버렸다고 합니다. 가스를 마신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높이 뛰었을 뿐인데 둥 떠 버린 후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할 수 있지만, 힐버트를 보고 웃을 수도 없는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힐버트는 전작 <나무>에서 이미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말했지요. 하지만 밥도 그림책을 보는 독자들도 힐버트의 말을 바람에 스치듯 귀담아듣지 않았지요. 설마, 그렇지요 새도 아닌 개 힐버트가 난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하지만 힐버트는 날았던 거지요.

난 원래 나는 법을 알고 있었어.

달려가다가 공중으로 슉! 뛰어오르는 거야.

그러면 날 수 있어!

-<나무>에서

밥은 어떻게 힐버트를 땅으로 내려올 수 있게 할까요? 밥은 그림책 시작부터 들고 다녔던 하얀 당근을 힐버트에게 내밉니다.

이 당근을 들고 있어 봐.

내려 올 수 있을지도 몰라.

밥의 당근은 요술 지팡인가요. 당근을 든다고 힐버트가 내려올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려옵니다. 밥이 내민 당근을 힐버트가 받아 들자마자 두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힐버트는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며 기뻐했지요. 하지만 밥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당근은 밥의 것이니까요. 밥에게 당근은 무엇일까요. 힐버트가 sos를 청했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달려갔던 친구인데 말이지요.





밥과 힐버트는 무거운 것을 들고 있으면 더 이상 둥 떠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밥은 곰곰이 생각한 후 어디론가 가더니 줄을 하나 가지고 오는데요. 과연 밥은 그 줄을 어디에 사용할까요. 알아채신 독자도 있겠지요. 맞아요, 밥은 힐버트의 발목에 줄을 묶고 당근을 돌려받았어요. 힐버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집으로 향할까요. 집에는 무사히 잘 도착할까요

이 그림책은 시종일관 힐버트 이야기를 합니다. 바두르 오스카르손은 전작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많은 색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색감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지요. 담백하다 못해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결한 글과 그림, 그래서 독자들은 더 많은 생각에 잠길 수도요. 단순해서 생각을 더 하게 하는 이 그림책은 반전이 있는데요. 열린 결말은 상상력을 총동원하게 합니다. 역시 바두르 오스카르손입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지만 바두르 오스카르손은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 지극히 사적인 리뷰입니다.


힐버트는 생각했어요...
조금은 날고 있는 거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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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 - 제28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김여정 지음 / 그린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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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다크 투어

<다크 투어>(김여정, 그린비, 2021)

 

 

제주 특유의 검붉은 흙에도 죽어 간 사람들의 피눈물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을 그저 스쳐가기만 했다.

144쪽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을 간직한 섬이다. 해마다 수많은 여행객이 아름다운 제주를 찾는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두 부류라고 한다. 올레꾼과 제주의 환경을 즐기는 관광객. <다크 투어>의 저자 김여정은 제주를 찾은, 표선을 찾은 이들 중 "바다와 땅의 기운을 받으며 천천히 걷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증언한다.

 

눈 안에 들어오는 오름, 바다, 들판, 한라산 등허리까지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43쪽

제주는 아픈 섬이다. 제주의 첫 관문인 제주공항부터 온통 학살지였다. 시인 이종형은 제주의 바람을 두고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주의 모든 곳이 바람의 집이었다.

<다크 투어>(그린비, 2021)는 엠네스티를 비롯한 NGO에서 활동해 온 저자 김여정이 국내 및 동아시아의 학살지를 찾아 반인륜적인 학살 사건을 알린다. 학살 피해자 가족의 일원이기도 한 저자는 국내의 목포와 제주, 인도네시아의 발리,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타이완의 타이베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평생 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 될 것입니다.

111쪽

타이베이의 역사는 이질적이지 않았다. 1947년 2월의 타이베이는 5월 광주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학살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행위는 타이완이나 한국이나 차이가 없었다."(129쪽) 지구의 어느 곳, 서로 닮지 않아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역사다. 5월의 광주는 고문을 모두 지켜 본 나무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 힘든 때였다.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굴비처럼 엮여 죽임을 당한 이들. 저자가 아는 송 선생님의 죽음을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기를 앞세운 꽃상여의 모습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불꽃처럼 산화한 그들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금지된 기억, 하지만 잊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기억

101쪽

어떤 이에게는 모든 음악이 진혼곡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이 진혼이었다. 저자가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은 발자취는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들의 발자국이었다. 이들의 발자국이 묻히지 않도록 나는 제대로 걷고 있는 걸까. 대단한 삶을 살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솔직한 삶, 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는 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말랑한 삶만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억울하게 스러져간 이들 앞에서 숙연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비겁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이 책의 독자여서 다행이었다. 저자는 가슴 아픈 글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라서 좌절했다고 한다. 그 좌절을 내가 겪지 않아, 그 아픔을 직접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기억은 지우고 싶어 한다. 아픔은 잊고 행복한 시간만 기억하고 싶어 한다. 특히 내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 타인의 고통은 '왜 아직까지 저러는대'라며 치워버리고 묻어버리려고 한다. 나도 그랬나 보다. 이 책의 독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행간의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바튼 숨을 내뱉아야 했지만, 눈으로 가슴으로 저자의 다크 투어에 동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학살의 실체, 부정할 수 없는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살아남은 자의 도리,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슬픔, 아픔의 감정을 글로 옮기면 간혹 그 슬픔에 눈물 흘릴 것을 애써 짜내려는 신파극이 있다. 이 책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억지로 짜내지 않는다. 그저 행간에서 전달되는 그 슬픔에 스며든다. 담담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부려 놓는 이야기, 그래서 더 한 걸음 한 걸음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모든 이가 이 책, 저자의 다크 투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의 지점,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길 위에서, 다크 투어를 하면서 만날 수도 있으려니. 그렇다면 적어도 아픈 영혼이 잠든 그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관광객으로만 자리하지 않을 터이다.

 

내가 다크 투어를 하는 이유는 반인륜적인 학살 사건을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살은 기록되고 진상은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잊히지 않고 반복되지 않는다.

- 9쪽

제주에 가 있는가, 목포에 있는가.

역사의 핏물이 흐르는 어느 곳을 걷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잠시 멈춰 기도하기를. 억울하게 산화한 이름 모를 이들을 위무하는 기도 말이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람의 집일 수도 있으려니.

 

비 내리는 바다는 호수처럼 잠잠했다. - P15

항일독립운동 하던 애국지사들이 갇혀 어머니를 목메어 그리워했을 형무소는 아파트로 변했고 그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목포 시민을 위한 체육공원이 되었지만, 형무소의 기록과 흔적은 방치되고 있었다. - P25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찰과 타멕의 눈을 피해 위령제를 지내고 피해자의 유품을 화장해 바다에 뿌렸다. - P69

학살자들은 증거를 지우고 침묵했지만, 발리의 산과 바다는 진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 P72

나는 말라야 정글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구눙 티쿠스의 작고 연약한 숨소리마저 세세하게 기록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 P101

오늘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 P111

서산대사는 "눈길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 내 발자국이 뒷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된다"고 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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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룡 교수의 끝나지 않은 생명 이야기 - 국가환경교육센터 환경교육도서 선정작
박시룡 지음 / 곰세마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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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박시룡 교수의 끝나지 않은 생명 이야기>(박시룡 글 그림, 곰세마리, 2021)

 

 

책을 읽는 도중 소개하고 싶어 안달복달할 때가 있다. <박시룡 교수의 끝나지 않은 생명 이야기>(박시룡 글 그림, 곰세마리, 2021)가 그랬다. , 재미있으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책을 꾸준히 읽게 하는 요소는 무엇보다 재미이다. 재미가 있어야 책을 계속 읽는다. 인류가 사는 이곳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2019년 독서실태조사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이유 첫 번째가 책 외 볼거리가 많다는 거였다. 재미가 없다면 읽던 책도 손에서 놓게 된다. 물론 목적에 의한 독서라면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박시룡 교수의 끝나지 않은 생명 이야기>는 동물행동학자이자 늦깎이 화가로 자신을 소개한 저자의 동물행동과 인간 사회에 대한 탐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은 박쥐, 괭이갈매기, 휘파람새, 바다거북, 코끼리, 황새 등 조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방대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동물의 의사소통, 사랑, 환경적응, 사회생물학적 행동 양식에 초점을 맞춰 풀어낸다. 책은 총 3부로, 1부에서는 동물들의 사생활로 행동 양식을 소개하고, 2부는 동물의 집단행동이나 공생의 규칙을 만들어 가는 동물들의 사회생활을 다룬다. 3부는 생물다양성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현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020년 지구촌 전체를 강타한 COVID-19는 인류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제 마스크는 인류에게 필수품이 되었다. 마스크를 하지 않고 집을 나서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지금 백신을 맞고 있지만 COVID-19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하다. 이처럼 21세기 주요 감염병을 일으키는 근원 중 하나가 박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박쥐는 인간에게 유익한 동물”(11)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바이러스를 일으키는 박쥐가 어찌 유익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를 두고 저자는 오히려 인간이 박쥐에게 유해한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박쥐와 같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식재료로 삼는 등 공생의 관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무분별한 개발만을 좇는 인간의 탐욕이 박쥐와 인간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을 뿐이다. 신종인수공통바이러스는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COVID-19는 인류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지만, “지구 온난화와 자원 낭비 문제에 대해 인류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면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저자는 동물행동을 탐구하는 일은 생물학자들만의 일은 아니다”(235)라고 한다. 인류는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일상생활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다양한 생물을 살리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행동은 갖가지 다양한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의 연속이다. (30쪽)

 

 

책에 언급되는 동물들의 다양한 행동양식은 흥미롭다. 사투리를 사용하는 휘파람새, 각인 행동에 의해 종이 다른 코끼리거북에게 사랑을 느껴 구애 행동을 하게 된 수컷 공작새, 수컷 실잠자리의 정자 경쟁 등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의 상식을 넘어선다. 호르몬에 의한 성전환으로 공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물들도 있다. 성전환자를 둘러싼 오해와 비난을 서슴지 않는 인류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지 않을까. 나는 소수자의 고통을 비정상이라고 낙인찍고 있지는 않은지. “언제나 인간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인간 자신.”(110)이라는 말처럼 또 다른 인류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위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황새들은 200년 후에도 이 땅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224쪽)

 

저자는 멸종위기종인 황새의 서식지 복원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 생태학에서 개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하나의 개체에게 일어난 일이 그 종 전체에 미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라는데. 하지만 극소수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희귀종의 경우 한 개체의 운명은 그 종 전체의 생사, 존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새를 비롯한 여러 생물들이 농약 중독, 전신주 감전사, 낚싯줄 사고 등으로 허무하게 죽어가는 현실의 문제를 그저 방관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200년 후, 황새들은 이 땅에 살아남아 있을까. 저자가 던지는 이 질문은 인류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문제이다. 어쩌면 이는 곧 인류의 존재 여부와 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 황새가 살 수 없는 땅은 인류도 살 수 없을테니 말이다.

책은 동물들의 행동양식과 사회생활의 정보 전달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류의 삶과 연결해 인문학적 사유를 하게 한다. 대량사육과 전염병과의 관계, 코끼리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 외다리 괭이갈매기의 숭고한 사랑 등에서 인류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마주한다. 해서 책은 문학만큼이나 뭉클하기도 하고 인문적 사유로 삶을 들여다보게도 된다. 이는 저자가 실제로 연구하고 탐구했던 진솔한 이야기여서는 아닐지. 책은 재미와 의미 모두를 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읽다가 손에서 놓겠는가. 환경교육도서 선정작이기도 한 이 책을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류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 한 권 읽었다고 삶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손길이 없어야 야생동물이 오히려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 인류가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도.

, 이 책은 부케처럼 군데군데 실린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다. 처음에 소개했듯 저자는 늦깎이 화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박시룡 교수의 수채화 그림과 끝나지 않은 생명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인간의 손길이 없어야 야생동물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46쪽)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인간의 손길이 없어야 야생동물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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