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 - 제28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김여정 지음 / 그린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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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다크 투어

<다크 투어>(김여정, 그린비, 2021)

 

 

제주 특유의 검붉은 흙에도 죽어 간 사람들의 피눈물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을 그저 스쳐가기만 했다.

144쪽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을 간직한 섬이다. 해마다 수많은 여행객이 아름다운 제주를 찾는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두 부류라고 한다. 올레꾼과 제주의 환경을 즐기는 관광객. <다크 투어>의 저자 김여정은 제주를 찾은, 표선을 찾은 이들 중 "바다와 땅의 기운을 받으며 천천히 걷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증언한다.

 

눈 안에 들어오는 오름, 바다, 들판, 한라산 등허리까지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43쪽

제주는 아픈 섬이다. 제주의 첫 관문인 제주공항부터 온통 학살지였다. 시인 이종형은 제주의 바람을 두고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주의 모든 곳이 바람의 집이었다.

<다크 투어>(그린비, 2021)는 엠네스티를 비롯한 NGO에서 활동해 온 저자 김여정이 국내 및 동아시아의 학살지를 찾아 반인륜적인 학살 사건을 알린다. 학살 피해자 가족의 일원이기도 한 저자는 국내의 목포와 제주, 인도네시아의 발리,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타이완의 타이베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평생 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 될 것입니다.

111쪽

타이베이의 역사는 이질적이지 않았다. 1947년 2월의 타이베이는 5월 광주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학살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행위는 타이완이나 한국이나 차이가 없었다."(129쪽) 지구의 어느 곳, 서로 닮지 않아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역사다. 5월의 광주는 고문을 모두 지켜 본 나무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 힘든 때였다.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굴비처럼 엮여 죽임을 당한 이들. 저자가 아는 송 선생님의 죽음을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기를 앞세운 꽃상여의 모습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불꽃처럼 산화한 그들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금지된 기억, 하지만 잊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기억

101쪽

어떤 이에게는 모든 음악이 진혼곡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이 진혼이었다. 저자가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은 발자취는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들의 발자국이었다. 이들의 발자국이 묻히지 않도록 나는 제대로 걷고 있는 걸까. 대단한 삶을 살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솔직한 삶, 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는 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말랑한 삶만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억울하게 스러져간 이들 앞에서 숙연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비겁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이 책의 독자여서 다행이었다. 저자는 가슴 아픈 글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라서 좌절했다고 한다. 그 좌절을 내가 겪지 않아, 그 아픔을 직접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기억은 지우고 싶어 한다. 아픔은 잊고 행복한 시간만 기억하고 싶어 한다. 특히 내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 타인의 고통은 '왜 아직까지 저러는대'라며 치워버리고 묻어버리려고 한다. 나도 그랬나 보다. 이 책의 독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행간의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바튼 숨을 내뱉아야 했지만, 눈으로 가슴으로 저자의 다크 투어에 동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학살의 실체, 부정할 수 없는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살아남은 자의 도리,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슬픔, 아픔의 감정을 글로 옮기면 간혹 그 슬픔에 눈물 흘릴 것을 애써 짜내려는 신파극이 있다. 이 책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억지로 짜내지 않는다. 그저 행간에서 전달되는 그 슬픔에 스며든다. 담담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부려 놓는 이야기, 그래서 더 한 걸음 한 걸음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모든 이가 이 책, 저자의 다크 투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의 지점,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길 위에서, 다크 투어를 하면서 만날 수도 있으려니. 그렇다면 적어도 아픈 영혼이 잠든 그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관광객으로만 자리하지 않을 터이다.

 

내가 다크 투어를 하는 이유는 반인륜적인 학살 사건을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살은 기록되고 진상은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잊히지 않고 반복되지 않는다.

- 9쪽

제주에 가 있는가, 목포에 있는가.

역사의 핏물이 흐르는 어느 곳을 걷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잠시 멈춰 기도하기를. 억울하게 산화한 이름 모를 이들을 위무하는 기도 말이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람의 집일 수도 있으려니.

 

비 내리는 바다는 호수처럼 잠잠했다. - P15

항일독립운동 하던 애국지사들이 갇혀 어머니를 목메어 그리워했을 형무소는 아파트로 변했고 그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목포 시민을 위한 체육공원이 되었지만, 형무소의 기록과 흔적은 방치되고 있었다. - P25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찰과 타멕의 눈을 피해 위령제를 지내고 피해자의 유품을 화장해 바다에 뿌렸다. - P69

학살자들은 증거를 지우고 침묵했지만, 발리의 산과 바다는 진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 P72

나는 말라야 정글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구눙 티쿠스의 작고 연약한 숨소리마저 세세하게 기록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 P101

오늘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 P111

서산대사는 "눈길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 내 발자국이 뒷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된다"고 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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