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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유령 - 버지니아 울프의 거리산책과 픽션들
최은주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7년 10월
평점 :
거리의 산책자, 그리고 픽션들
<런던 유령>(최은주, xbooks, 2017)
“사람들은 그저 그녀 삶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그녀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p.15)
세간 사람들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신경증을 앓았고 결국, 강물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로 회자된다. 그가 깊은 고뇌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작품활동으로 삶에 충실했던 작가였음은 희미하다. 마치 그녀 삶의 이야기가 그녀를 희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런던 유령>(xbooks, 2017)의 저자 최은주는 묻는다. 당신은 버지니아 울프를 아는가. 저자는 <런던 유령>에서 세간의 가십이 아닌 치열하게 읽고 썼던 작가, 거리의 산책자였던 버지니아 울프를 소환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상당수 작품이 런던을 무대로 한다.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레웨이 부인>, <파도>등은 울프가 평생 런던을 산책하고 사색하며 런던에 대해 글을 썼다는 반증이다.
최은주의 <런던 유령>은 울프가 배회했던 런던 거리와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에 천작해 버지니아 울프를 전개한다. 저자는 세 작품 속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이, 그리고 그 삶을 인식하는 ‘눈’이 있”다며 출판사 인터뷰에서 밝혔다. <댈레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난 런던 거리를 걷는게 좋아요”라며, 파티를 위한 꽃을 사고자 런던 거리를 걷는다. 규칙처럼 익숙한 동선. 하지만 “어떤 하루에 몰두해 집중적으로 묘사할 때 임의적인 성격이 거두어지면서 다른 날과의 차이를 일으킨다”(p.13)면 그 거리는 습관처럼 걷던 거리와는 다르다. 댈러웨이 부인의 ‘내면의 풍경’(p.13)이었던 유월의 어느 날이 그러하다. “다른 창을 통해 런던을 보”(p.10)는 “낯선 듯한 익숙함”(p.12)은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움직이는 삶을 동반한다. 책은 “<댈레웨이 부인>에서 <등대로>, 그리고 <파도>로 독서를 이어가는 동안, 읽기에서 그치지 않고 쓰기로 옮겨 갈 수 밖에 없는 어떤 욕망에 대한 추적이었”(p.252)음을 밝힌다. 욕망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소설 속 그녀가 아닌 또 다른 픽션의 ‘그녀’를 생성하게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거리 출몰’(p.48) 또한 움직이고 자각하는 삶과 무관하지 않다. 울프에게 “글쓰기와 걷기는 가지 않은 곳에 대한 모험이며 갇힌 시선의 맹목과 한계를 자각하는 일”(p.48)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출몰에 가까운 런던 거리를 배회하면서 맹목을 깨닫고 런던의 현실을 직시했다. 이는 발견과 창조활동으로 이어졌다. 울프에게 “산책은 그러한 힘”(p.251)었다.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걷기를 하면서 관찰자의 눈을 가진다면 능동적 활동이 되기도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종이 위의 인쇄된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활동은 수동적이다. 하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물음표 독서는 능동적이고 활기차며, 때로는 평정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울프는 “문학이 수동적으로 읽히는 것을 참지 않으며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읽고, 우리의 예상들을 경멸하고, 우리가 습관적으로 당연시하는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p.51)하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때 독자는 생각 속을 배회하게 되며, 자신의 삶을 깊이 응시하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 기법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의식의 흐름이란 두서없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는 “끝에 다다라서도 끝나지 않은, 충족되지 않음, 충족될 수 없음”(p.72)이 있다. 마치 런던의 안개 낀 거리를 걷는 듯 말이다. 이는 울프의 소설이 “해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불명료한 것”(p.201)처럼 “소설 밖의 삶과 소설 속의 삶이 줄곧 이어”(p.53)짐에도 있다. 이를 두고 최은주는 혼란함을 보여주는 소설을 정리하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라고 피력한다. <런던 유령>은 버지니아 울프가 독자에게 바랐던 독서의 방식대로 요약이나 해석이 아닌 정면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다루어 경험하도록 한다. 해서 책은 독자인 동시에 저자가 되게 하고, 버지니아 울프가 되어 여러 개의 픽션들을 만나게 한다.
최은주는 <런던 유령>을 낯설게 직조한다. 저자는 “중심 픽션들 사이로 작은 픽션들”(p.197)을 들어 앉혀 ‘장르 파열’(p.196)을 감행한다. 작은 픽션 속 ‘그녀’도 그렇게 생성된다. 저자가 그리는 그녀는 “불안하고 정처 없다. 낯선 고장에 처음 정착한 사람처럼 (…) 표정이 어색하고 불편해 보”(p.198)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거리감을 두는 태도가 관찰자적인 눈을 유지시”(p.198)키게 한다. 이는 댈러웨이 부인이 런던의 삶을 눈여겨 보고, 버지니아 울프가 런던을 걸으며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p.49)는 것과 동일하다. 최은주의 이런 시도는 독자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세계관과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p.15) 고백한다. 최은주는 수동적 읽기에서 벗어나 “온 정신을 쏟아야 비로소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p.15)고 조언한다. “쓰지 않는 순간에도 쓰기 위해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 그의 치열한 삶의 기록을 읽어내는 것이 어렵다고 밀쳐둘 것인가. 저자는 “책이 어려운 것은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스타일 때문”(p.21)이라고 한다. 의식의 흐름으로 서술을 하든, 소설 속에 또 소설이 들어와 앉든 울프가 건네는 낯선 스타일에 반응해보는 것은 어떤지. 독자를 경험하게 하는 <런던 유령>, 내적 활동을 요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적일 수 없는 ‘존재의 순간들’(p.97)을 정면에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툭하면 길을 읽고 만다. 그 길을 도로 거슬러 돌아가서 다시 읽어내면 비로소 책의 물질 위에 부동의 활자가 풀려나오듯이 스토리가 드러난다. 다시 읽어내면 내면의 품격이 드러날 것이고 또다시 읽어내면 너와 내가 보인다. 너는 거기, 나는 여기에 앉아있다” (p.254) 지금 <런던 유령>을 손에 들었다면 현실과 책 속 행간을 들락거리며 가장 큰 소음을 들을지도. 거리의 산책자가 되어 사건 순간에 부딪쳐 오는 내면의 포착을 경험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