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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밖은 안녕
이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이주혜 작가의 신작 단편집. 작년에 그의 단편 <괄호 밖은 안녕>, <여름 손님입니까>, <이소중입니다>를 연달아 인상 깊게 보고서 소설집이 언제 나오나 기다렸다.
내가 이주혜 작가의 단편을 인상 깊게 본 건 서사의 방대함 때문이다. 단편을 읽은 건데 마치 장편을 읽은 것 같은 개운한 인상을 받으면서 이 작가에게는 서사를 짜는 내공이 있다는 걸 느꼈던 데다, 그 서사가 현재의 화자에게 주는 울림과 내가 공명했기에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그 요소에 매료되면서 내가 놓쳤던 건 대부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8편의 소설 중 6편이나 다 어딘가로 떠나면서 시작되고 있다(공간의 이동이 드러나지 않는 2편은 <초록 비가 내리는 집>, <순영, 일월 육일 어때>다). 게다가 <할리와 로사>는 전주를, <이소 중입니다>는 육지 끝을 가는 걸 제외하면 모두 일본이다(<안개의 기분>은 홋카이도의 구시로, <여름 손님입니까>는 일본 어딘가, <괄호 밖은 안녕>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맘껏 슬픈 사람>은 홋카이도의 샤코탄반도다). 작가가 일본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옆나라 일본은 영어권 번역가이기도 한 이주혜 작가(의 화자)에게 해석의 의무를 덜어주는 공간으로 기능한다(반대로 나는 오래전 상하이에 갔을 때 가이드 없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끌벅적한 시장 거리에 서 있다 문득 이렇게 혼자가 되는 걸까 두려운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는데, 그런 걸 보면 나는 지금의 나로서도 해석 가능한 공간에 있고 싶어하는 체질인 것 같다).
하지만 표제작에서 그러하듯 해석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국(공간의 이국일 때도 있지만, 과거 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인 ‘시간’의 이국일 때도 있다)에서 과거 기억이 되살아나 재해석을 요구해 화자를 괴롭게 한다. 기억은 마치 왼쪽에 쓰인 문장이 책을 덮으면 오른쪽에 맞닿는 것처럼 현재에 덮어씌워지면서 과거를 다시 읽길 촉구한다. 결국 읽어야 한다. 번역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뒤섞이고 만다. 출발과 도착이 뒤엉켜 디딜 곳 없는 바다 혹은 하늘에서 고립되고 만다. 이런 위기가 찾아온 것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과거의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소설 내에서 과거에 발목 잡히게 되고, 그렇게 번역이 시작된다.
그 과거로 꺾어지는 길목, 커브에는 낯선 존재가 기다리고 있다. 그 존재는 화자가 시간이라는 압력에 밀려 현재에 메어 있던 구속을 풀어내며 과거로 자유자재 이동하게 한다. 모자관계인 은재씨와 민해에게 성이 같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슴 키리가 그렇고(<안개의 기분>), 호텔에 찾아와 목욕탕을 안내하는 할머니와 결혼식장을 안내하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그렇고(<여름 손님입니까>), 산의 커브길에 주저 앉아 있었던 바디랭귀지를 잘하는 맨발의 여자가(<괄호 밖은 안녕>), 돌보는 사람이 세상을 뜨자 곰팡이가 피어가는 백 개의 화분이 그렇다(<초록 비가 내리는 집>).
익숙한 존재가 낯선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 민해에게는 죽은 척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은 것 같이 눈을 감고 평온해 보이는 은재씨가(<안개의 기분>), 하민지에게는 손님인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 이제는 여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초대한 또 하나의 엄마 같은 존재 양영란 언니가(<여름 손님입니까>), 하코다테를 찾은 번역가에게는 십이년 전 겨울 이곳에 같이 왔던 남편 석우와 딸 여준이, 그리고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육층 여자가(<괄호 밖은 안녕>), 조수석에는 시인을 뒷자리에는 소설가를 태우고 운전대를 잡은 번역가에게는 암 투병 후 육지 끝에 집을 짓고 그들을 초대한 철학자가(<이소중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양순덕 씨에게는 평생 남편에게 얽매여 살았던 자기 자신이,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했다가 유언장에 적힌 명료하면서도 섬뜩한 문장을 보고 악몽을 꾸게 된 남편 박천일 씨에게는 아내 양순덕 씨가, 학계에서 입지를 잘 다져오다가 폭력을 업은 권력에 의해 궤도 밖으로 밀려난 손우정 씨에게는 고고학자로서의 열정이 넘쳤던 과거 자기 자신이(<초록 비가 내리는 집>), 할리에게는 진주를 제 집처럼 안내하고 무언갈 보여주려 했던 로사가(<할리와 로사>), 너에게 외로움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밉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던, 이제는 낯선 곳에서 자기를 안내해주는 아들 윤이, 그리고 윤을 미워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던 그러면서도 자기를 사랑했던 엄마가(<맘껏 슬픈 사람>), 수은에게는 언니로 불리기를 거절했던 동경했으나 미워하면서 멀어졌고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순영 언니가 그렇다(<순영, 일월 육일 어때>).
(익숙한 존재든 낯선 존재든 간에) 화자가 그들을 통해 마주하는 과거의 낯섦은 현재에 느끼는 낯섦, 고립감과 연결되어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얽히고설킨 것들이 와해되면서 위안과 미소를 안겨주기도 한다. 경험할 때도 미지였던 기억이, 번역도 해석도 되지 않은 채 마구 퇴적되어버린 시간이 어떻게 지금 풀어질 수 있었을까. 지금의 몸이 지나간 기억을 다시 체험했기 때문이다. 마치 바디랭귀지를 통해 언어 없이 즉각 번역이 되는 것과 같이, 그래서 희곡 지문이 대본에는 괄호 속에 묶여 있지만 상연 중에 말보다 더 빠르게 전달될 수 있듯이, 몸이 곡진한 서사를 다시금 체험함으로써 재해석 재번역하는 것이다. 특히 소설은 화자가 겪는 이야기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도 읽으면서 어느새 공명하게 되는데, 그 기묘한 진리는 인간의 몸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비롯된다(몸은 언어보다 훨씬 본질적인 조건이니까). 소설 내에 인용되는 책과 작가들은 화자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명하는 존재임을, 몸으로 체험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섬세한 언어를 포섭하지 못하고 서투른 몸짓만 담을 수 있는 괄호를 통해서 언어로도 표현불가능한 이해불가능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는 나에게 쥐어진 도구가 없더라도 맨몸으로도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도구는 부차적인 것이며 삶이란 몸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그렇게 과거가 풀어지며 이 순간에 도착한다. 출입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는지 보는 순간,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을 떠나는 순간, 숙소에서 어떤 존재에게 안녕을 건네는 순간, 시간이 무심히 내일로 걸어갈 순간, 바깥의 화분들이 전날의 폭풍우를 잘 견뎌냈을지 궁금해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한의원에 누워 나란히 치료를 받으며 가능한 한 낯선 점심을 고민하는 순간, 괜찮지 않으나 외롭지 않은 순간, 다시 만난다면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며 본명으로 편지를 적는 순간. 즉 안녕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는 많은 말 대신 안녕이란 한마디만 해도 충분하다. 너무나 많은 원망과 미움과 오해의 말을 쏟아낸 그때(출발지)로부터 무척이나 멀어진 마지막(도착지) 순간, 서로에게 건네는 안녕이란 말 앞에 놓일 괄호 속을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다면 기꺼워지자. 안녕을 마주하고 또다른 안녕을 만나러 가자. 맘껏 슬퍼할 수 있는 자가 되고 또 맘껏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자.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보자.
+ <이소중입니다>의 해학은 다시 읽어도 훌륭했고(이런 미래형 문법의 소설을 좀 더 보고 싶다), 인물이 바뀌며 전개되는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은 영화 <침묵의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산뜻함이 있었으며, <할리와 로사>는 나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따듯하고 푸근하고 웃음 짓게 하는 소설이었며, <맘껏 슬픈 사람>은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는 존재인데도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두고두고 읽고 싶은 단편이었다. 소설 안에 NLPD 후일담 이야기, 싱글맘, 재일한국인 이야기, 여성 문학 이야기, 교수 성폭력 문제, 중국인 혐오 문제 등도 담겨 있어서 현재와 여러 방면으로 고루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