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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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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해지기 쉬운 불행을 그렇지 않게 진심으로 쓰는 김애란 작가의 장편소설. 고등학생 시절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을 때의 그 빠져나갈 길 없는, 너무나 선명하고 묵직한 불행들에 한동안 가슴이 저몄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 호기롭게 이 소설을 들어버렸다.

같은 반이지만 서로 친하게 지낸 적 없는 세 아이-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번갈아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고 겹겹의 거짓과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현재에 도달하는 이야기라서 복잡한 데다, 인물들의 사연이 비슷해서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갈수록 이런 공통점, 유사점이 결국 하나의 흐름이 되어 이야기를 아프고 아릿하게 만들었다. 별것 아닌 덤덤한 문장들이, 마치 소설 속 가난에 대한 비유처럼, 머리통이 터질 듯한 눈송이 마냥 천천히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세상이 부여하는 거대한 체념을 부모라는 보호막 없이 습득한 세 아이는 자신들에게 서둘러 찾아온 불행(부모의 불화, 부재) 앞에서 체념으로부터 본능적으로 터득한 거짓말로 자신을 숨긴다. 채운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다는 사실을, 소리는 자신이 손으로 죽음을 예상할 줄 안다는 것을, 지우는 학교로 돌아갈 생각 없이 공사판 노동을 하러 간 사실을 감춘다.

하지만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창조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없어도 되는 것(거짓)’의 탄생은, 그 즉시, 그것이 진짜처럼 ‘있어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유는 언제까지나 ‘거짓’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진실의 잔혹함을 회피하고자 세 아이가 각자 만든 하나의 거짓은 서로 교환되고 공유되며 부풀려진다.

거짓말을 하는 것만 알지 그걸 어떻게 유지하고 감당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아이들은 저마다 벌을 받는다. 채운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이 건네는 위로를 벌처럼 느끼고, 소리는 투병 중인 엄마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는 것으로 괴로워하며, 지우는 공사판의 고된 노동, 엄마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반려동물 용식이를 소리에게 맡겨두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다.

진실이 잔혹한 만큼, 거짓은 그것보다 두 배 고통스럽다. 거짓이라는 막의 허위뿐만 아니라, 그 허위 속에 본인만이 알고 있으며 떨쳐낼 수 없는 진실이란 알맹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숨 쉴 틈을 주는 건 다름 아닌 ‘이야기’다. 이야기는 아직 세상을 보는 ‘시야’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 놓고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는 ‘형식’이 되어준다. (진실의 내용이 포함된) 거짓의 무게에 짓눌리던 아이들은 애초에 거짓이라고 약속된 ‘틀’ 속에 진심과 진실을 몰래 털어놓게 된다.

지우는 만화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닥쳤던 불행을 풀고, 채운은 ‘바람영어’라는 인공지능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서툰 영어 문장으로 불행과 죄를 고백한다. 이 소설이 가슴이 아팠던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고백이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지우가 키우는 도마뱀 용식이, 채운이 키우는 리트리버 뭉치, 소리가 찾아간 어머니의 봉분… 아이들은 답을 들을 수 없는 그들에게 의지한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닌(혹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들에게 진심과 진실을 위탁한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자신이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는 대상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거짓 자체가 주는 긴장감과 그 거짓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지 하는 불안한 예감에 소설의 서사는 추동된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게임이 꿰뚫는다. 다섯 개의 문장 중 한 문장에만 거짓을 섞는 게임. 그 거짓을 알아맞히는 게임. 거짓을 알아맞히면 진실이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게임. 진실(4)의 비중이 거짓(1)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소설에서 이 게임은 학교 교실에서 소개되는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과 ‘가짜 같은 삶’을 사는 세 아이는 이 게임을 다르게 대할 것이라고.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그 게임은 황당하고 신기한, 마치 ‘가벼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밝히는 ‘게임’일 것이다. 게임이 끝나면 거짓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즐거운 진실들만 남을 것이다. 반면 ‘가짜였으면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세 아이에게 그 게임은 사람들을 향해 마치 ‘무거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고백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무대가 막을 내리면 거짓은 유일하게 붙들고 싶은 문장이 되고 나머지 진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으로 남을 것이다. 거짓과 진실에 부여하는 무게의 차이 때문이다. 무게가 달리자, 거짓과 진실은 모습을 뒤바꾸며 혼란을 야기한다.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한다.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거짓이라 여기고 달콤한 거짓을 진실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 아이에게 이 단순한 게임조차 게임으로 대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야말로, 이 소설의 불행이 납작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읽힌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무거움이 느껴졌던 건, 그리고 그 무거움에 마음이 기울었던 건, 세 아이에게 찾아온 거짓 같은 불행이 일시적이지 않으며, 엄정한 현실임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인 나 아니면 그 셋 모두를 응시할 시선이 없다는 걸 느꼈기에. 삶에 닥친 불행의 기운을 별다른 노력 없이 웃어넘길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삶에 닥친 불행을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아이들도 있다. 전자의 아이들에게 응원이 필요하다면, 후자의 아이들에게는 경청이 필요하다. 김애란의 시선이 그 경청에 특화되어 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아이들만 진실을 거짓으로 감추고 견디고 살까. 어른들도 거짓을 견디고 산다. 대신 어른들은 언젠가 그 거짓을 찢고 그 속의 알맹이, ‘진실’을 ‘고백’한다. 거짓의 형식이 아닌 진실의 형식으로. 자신과 온전한 소통이 가능한 이들에게. 채운의 엄마 태선은 채운에게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고 고백하고, 소리의 아빠 호민은 소리에게 투병 중일 때 엄마가 조력사를 원했다는 것을 알리고, 지우의 새 아빠 선호 아저씨는 지우에게 자신이 겪은 불행과 어머니 지연의 죽음이 사고였음을 알린다. 선호 아저씨는 진실을 고백할 때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을 이용하는데, 게임 규칙을 어기고 진실인 다섯 문장을 말해버린다. 그 장면에서 어른이란 규칙에 무조건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위해 규칙을 부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어른의 고백 과정이 나는 사뭇 슬펐는데, 아이가 감당한 불행을 알고 있던 어른들이 아이가 자신들을 ‘버리도록’ 선택권을 줌으로써 스스로 벌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어른이란 잘못에 대한 벌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소한 거짓말을 만든 세 아이는 결국 거짓의 끝, 감당할 수 없는 끝에 다다른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이 죄다 벗겨지고 진실의 알맹이만 남게 된다. 그러자 아이들은 묵묵했던 전과는 다르게 서로에게 말을 건다. 진실은-스스로를 감추려는 속성을 가진 거짓에게 포획되더라도 결국-스스로 드러나려는, 말해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감출 수 있는 거짓이 아니라 드러낼 수 있는 진실이었다. 거짓의 허위에 자신을 기만하며 진실을 한없이 유예하는 것보다, 진실을 그것이 잔혹하더라도 감당하며 드러내는 것이었다. 먼저 거짓을 찢고 진심을 고백한 어른들이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야말로 미약하지만 확실한, 보이지 않으나 느껴지는, ‘성장’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전서림 이달의 소설 다섯 번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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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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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 조지프 콘래드 (휴머니스트 제공 서평 도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대상인 커츠를 만났던 여정을 회고하는 영국인 선장 말로의 이야기. 처음엔 흥미롭다가 서서히 어두워져 결국 모든 게 분간이 안 가는 암흑에 놓였다 온 기분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악몽의 생생한 체험이다.

대항해시대, 다시 말하자면 대약탈의 시대, 제국은 암흑을 내쫓기 위해 기어이 세상의 모든 암흑을 찾아들어갔다. 그 당시의 삶-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상처가 인간들에게 새겨졌을 텐데-이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텍스트만으로 그 체험을 다 한 것 같다. 빽빽한 문단, 형이상학적인 문장들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어둠을 비집고 빠져나가려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읽었다. 그러다보면 이 소설을 고전이라 칭할 만한 섬세한 묘사와 통찰이 드러나 잠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탈식민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게 하는 부분들이 인간의 평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말로가 메모에 적힌 러시아어를 야만인들의 언어라 오해한 것, 식인종이 선원들을 먹으려 하지 않고 도운 것, 흑인 조타수가 죽기 직전 말로에게 보인 숭고한 믿음의 얼굴, 원주민들이 말로가 타고 온 배를 공격하도록 명한 커츠, 야만인에 동화되어 그들을 지배한 커츠의 모습이며… 조건이 사라진, 조건이 무화된 인간은, 자연의 인간은 서로에게 평등했다. 사실 인간은… 지극히 평등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커츠가 머물던 오지가 어둠의 심장을 의미한다면 지구 자체가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영국 템스강도 상당히 어둡다).

돌아가는 길에 커츠가 죽고 그의 짐을 인계받은 말로가 그의 약혼자에게 찾아가 커츠가 한 유언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말했다’고 거짓말한 부분에서는 사무치는 슬픔이 있었다. 그토록 거짓말을 혐오하는 말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어둠의 심장에서 커츠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끔찍하구나! 끔찍해.“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는 결국 어둠만 있었다. 커츠가 그곳을 찾아간 이유가 상대적 가난과 정의 때문이었음이 암시되는 후반부에서 신처럼 보이던 그에게서 문명의 타락을 떨쳐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라 도움이 될 만한 부록이 많이 실려있는데, 그중 콘래드에 대해 쓴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둘의 인연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두 남녀가 대화하는 식으로 조지프 콘래드를 비평한 울프의 텍스트도 새로웠다. 이런 방식을 차용해서 글을 써볼까 싶어진다. 역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황유원의 해설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어렵다고 인정하는 솔직함, 간단하면서도 치밀한 분석력이 느껴졌다. 이런 어려운 소설의 경우 해설이 정말로 이해에 가닿는 한줄기 빛이 되는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이니만큼 부록에서 이야기에 대한 두꺼운 논문 같은 분석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작가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구성해 독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앗아가지 않게끔 해서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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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동정탑 -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구단 리에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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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신주쿠 교엔 한복판에 교도소 탑이 세워질 예정이다. 명칭은 '심퍼시 타워 도쿄'. 그곳에 수용되는 범죄자들은 동정받아야 할 사람을 뜻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로 불릴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도심 내 교도소 건설 문제를 다루는 사회적인 소설 같은데… 자세히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범죄가 개인의 됨됨이가 아니라 사회구조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동정 받아야 한다는 뜨거운 논쟁 아래 그와는 좀 많이 다른, 건축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미래를 염두하고 설계하는 ‘건축’과, 사유의 건축물인 ‘언어’를 끊임없이 이어붙이려는 이야기이며, 인공지능마저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독백의 시대, 그러나 누구도 누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소음의 시대에 말이 갖는 이중성과 위험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다보니 아쿠카타와상을 두 권 연속 읽었는데 둘 다 뭔가 인물이 비틀려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물론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고 비약적인 전개, 독특한 사유와 고집스러운 철학, 의식의 흐름 전개와 모호하고 환상적인 서술,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상징들로 인해 이야기 자체가 어렵다. 인물들의 언어가 처음엔 다르지만 나중엔 죄다 비슷해져 작가라는 신이 너무 잘 보인다는 한계도 존재한다(AI를 사용해서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상 직후 논란이 되었는데 소설 내에서 AI가 비판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다지 분량도 없어서 문제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묘하게 문장이 술술 잘 읽히며 강렬하게 전달하는 게 있기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아래부터는 내가 이해한 걸 바탕으로 전개한 줄거리다.

‘심퍼시 타워 도쿄’. 왜 그렇게 부를까? 서른 일곱의 성공한 건축가인 마키나 사라는 어렸을 적엔 수학천재였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지배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축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축이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미래가 보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심퍼시 타워 도쿄(가칭) 건축 설계 공모에 출전하기 위해 신주쿠 교엔 근처, 탑이 들어설 곳이 보이는 호텔에 숙박하며 스케치를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샤워를 하다 문득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녀는 말이 곧 현실이 된다고 믿고,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가 일본인이 일본어를 버리려 하는 증거라 여기고 경멸하며, 머릿속의 검열관에 의해 차별의 말을 과하게 삼가하려는, 언어에 있어서 예민한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명칭은 명칭이고, 설계는 설계대로 하면 된다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명칭이 자꾸 걸린다.

어떤 건물이 지어질 이유에서 가장 앞서 놓이는 것은 그 건물에 살 사람이다. 여기서 그들은 바로 범죄자, 아니 호모 미세라빌리스다. 이 용어는 사회학자이자 행복학자인 마사키 세토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자신의 책 <호모 미세라빌리스,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서 범죄가 개인의 인격이 아닌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중첩적이고 연쇄적인 고리)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서, 범죄를 저지른 그들이 사실 최초의 피해자였을 거라며 동정받아야 할 인간으로 규정하며, '범죄자'라는 말이 가진 차별성을 배제하고자 호모 미세라빌리스라는 말을 생각해낸 것이다. 반대로 도덕적이며 행복한 사람들을 '호모 펠릭스'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호모 미세라빌리스를 동정할 것을 촉구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그는 믿는다.
그렇게 섬세하게 그곳의 거주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생겨났으니, 그 거주지 또한 색다르게 불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마키나 사라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떠들썩한 논란 끝에 지어진 도쿄 국립경기장을 보게 된다. 저녁놀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빛나는 국립경기장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신만의 강박적인 언어적 사유를 통해 바라보자, 그 경기장이 질문을 하고 있으며 북쪽 공원 일대에 세워질 그 탑이 그 해답이 될 거라는 생각에 미치고, 그 해답을 내놓을 사람이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떠올리며 드로잉을 시작한다.

다쿠토는 아름다운 외모와 옷차림 덕에 우연히 마키나 사라에게 호감을 사게 된다. 거짓말에 한번 올라타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줄어든다고 믿는 다쿠토는 자신이 고급 의류점에서 일하지만 가난하게 산다며 집세를 밝히기도 한다. 그는 올림픽이 인류의 평화,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고, 올림픽에서 치러지는 스포츠 경기는 그를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한다. 현대가 경쟁이라는 태그를 덧씌움으로써 지워버린 올림픽-평화의 연결고리를 감각하지 못한다. 또한 건축에 어떤 의미가 깃든다는 것, 언어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자꾸만 이상하게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결핍과 그림자를 본다.
그는 호텔에서 그녀가 노트북에 띄어놓은 건축 공모안에서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이름을 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도쿄도 동정탑'?이라고 바꿔 말한다. 그의 말이 자신이 여태껏 고민하던 명칭에 대한 해답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 탑이 세워지면 그 안에서 새롭게 바뀌어야 할 명칭들(교도관 같은)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만든 언어의 감옥에 갇힌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동정하며 막아선다.

저녁을 후에 그들은 교엔 산책에 나선다. 술에 취해 겁 없이 여기저기 활보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그녀가 추한 현실을 아름다움으로 장악하고 싶은 지배욕을 가졌으며(그 때문에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끊임없이 믿고 그 비전을 마치 '답을 확인하듯'(102) 따라가기에 미래를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교엔으로 진입한 그는 공간과 자신의 관계성이 역전된 것 같은 기분, 그리하여 자신의 언어와 사유가 이 공간에 치환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는 낮에 도쿄도 동정탑 건설 반대 시위 현장이었던 곳에 놓여있는 여러 플래카드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호모 미세라빌리스, 그들의 행복을 위해 탑을 짓는 게 인류의 평화 평등을 위한 길일까 묻는다. 타워의 명칭에 대한 해답은 찾았으나 거기에 살 사람들에 대해선 해답을 찾지 못한 그녀, 자신의 의견이 차별적인 발언이자 상처가 될 거라며 경계하던 그녀는 일순간 이곳에 도쿄도 동정탑이 들어선 듯한 묘사를 마치 질문에 답변하는 AI처럼 끊임없이 내뱉기 시작한다. 그 언어에 기겁하다가도 어느 순간 설득되어 마치 지금 눈앞에 도쿄도 동정탑이 세워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다쿠토는 그 건물이 ‘압도적인 파괴’(111)임을 느끼지만 그것에 집어삼켜지고 만다. 그리고 마키나 사라가 자기 자신을 두 팔로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누워있는 걸 발견한 순간, 환상의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탑이 모래로 뒤바뀌며 무너져내린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중반부다. 이후로는 4년후, 탑이 지어진 2030년으로 건너간다.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 받는 미국인 삼류 기자 맥스 클라인은 지상 71층짜리 원기둥 타워인 도쿄도 동정탑 취재를 나가 그곳의 서포터(교도관)로 일하는 다쿠토와 대화를 나눈다. 360도 어느 방향이든 입장가능한 자동문,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 등, 안과 밖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게 설계한 마키나 사라의 의도가 엿보이는 공간을 참을성 있게 잘 살피던 맥스 클라인은 70, 71층의 도서관에서 자유 복장으로, 남녀 구분 없이 평화롭게 생활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를 보며 결국 격노하게 된다. 범죄자 안락사 계획 등의 도쿄도 동정탑에 관한 음모론을 늘어놓고, 행복 증진을 위해 비교하는 등의 부정적인 말이 금지된 이 공간이야말로 예쁜 거짓말을 잘 하는, 진심을 능숙하게 숨기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담겨있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정식 명칭이 있으면서 도쿄도 동정탑으로도 부르며 언어적 혼란을 초래하고 언어를 무한히 생성하면서 감추려는 게 뭐냐고, 일본인이 일본어를 버린다면 무엇일지 묻는다. 그 질문에 AI를 활용하기까지 하며 답변해보려던 다쿠토는 결국 그녀, 설계자인 마키나 사라를 만나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인 기사를 검토한 다쿠토는 맥스 클라인에게 수정사항을 보낸 뒤에 마키나 사라의 전기 쓰기에 몰두한다. '같은 것을 보는데도 전혀 다른 생각'(138)을 하는 인간들에게 재미를 느끼면서도 만일 다른 누군가가 마키나 사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늘리는 말을 할까봐 그 전에 자신이 전기를 써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맥스 클라인의 비난을 떠올리다 자기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70층 도서관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마저 전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득 도쿄도 동정탑 개축식날 등장해 축사를 한 사회학자 마사키 세토가 부정의 말을 잊어버리라고 주창한 것과, 그가 그날 집 마당에서 살해당한 일, 그 살해자가 했던 증언-마사키 세토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랬다는-을 곱씹는다. 시간이 늦었다는 걸 깨달을 즈음 지진인지 모르는 충격, 혹은 현기증을 느끼며 주춤하다가 순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순간 전화가 온다.

그 전화는 마키나 사라의 전화다. 도쿄도 동정탑이 지어진 뒤 건축 일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춘 그녀는 여전히 동정탑이 보이는 호텔에 칩거하고 있다. 그러나 다쿠토가 "가끔은 살아 있는 사람과 말하지 않으면 노이로제에 걸린다"(159)며 맥스 클라인과 인터뷰를 성사해준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이 인류의 평화나 존엄에 진지하게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누구에게도 그 일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임했을 뿐이고 결국 자기는 비난 받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고 앞으로 건축을 하게 된다면 진정한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영어 인터뷰가 번역의 다리를 건너다 왜곡되지는 않을지 AI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다가 영원히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무력한 말에 대한 피로함과 지겨움을 느껴 밖으로 나가 저녁을 때운다.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우중충한 저녁, 그녀는 탑을 바라보며 예전의 국립경기장이 그랬듯이 이번엔 탑이 질문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답이 무얼지 헤아리며 다가간 탑 입구에는 수많은 경비원과 경찰들이 서있다. 다쿠토에게 전화한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탑을 올려다보며 탑의 미래-전에는 그것이 앞으로 이 도시에 미칠 영향을 상상했다면 이번엔-그것이 파괴될 미래를 상상한다. 건축물처럼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수직으로 서 있는 자기는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상상한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어 곁을 지나가던 남자가 지금 자신을 영원히 서 있는 동상으로 만들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두 눈으로 탑을 바라보는 마키나 사라 동상은 뭐라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으나 자신을 가리키는 수많은 손가락들을 의식할 것이다. 그러는 채로, 영원의 끝이 도래하기까지 탑이 건네는 질문의 답을 생각하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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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트리플 25
서이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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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 서이제 (서평단 도서)

디지털 시대의 문법이 반영된 서이제의 소설을 좋아한다. 고작 단편 네다섯 편정도 읽었을 뿐이지만, 전부 감탄했다. 글이라는 아날로그 매체에 디지털 문법을 가져와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만의 감각을 나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곤 했다. 이번 소설집은 그 생각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번 소설집은 기억을 테마로 세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 소설 모두 세 인물이 등장한다.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누군가. 한때 친했던 사랑했던 너와 나는 어느새 멀어져 있다. 너와 멀어진 채 살던 현재의 화자는 너를 호출하는 어떤 단서를 발견하고서 너와 지냈던 과거를 회상한다. 표제작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는 오래 전 찍은 영화를, ‘이미 기록된 미래’는 오래 전 너가 썼던 카메라를, ‘진입/하기’는 너와 내가 오래 전 살던 공간을 통해 기억을 반추한다.

새롭다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들은 미래, 새로움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고 단지 과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빤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이상, 이 소설들은 마치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내가 어떻게 지금처럼 될 수 있었나를 나는 여기서 떠올렸다.

표제작은 영화 스크린을 연상시키는 네모 박스가 세 번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그 부분에 다다랐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구성이며 결말이 좋아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이미 기록된 미래’는 사람들은 잠든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진술을 앞에 두고 마지막에 너가 남긴 마지막 사진, 내가 마치 자고 있는 듯 눈 감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끝나는데, 화자의 공허함이 크게 와닿았다. 망우삼림이라는 소재는 너무 사기다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곳이라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

‘진입/하기’는 무언갈 추구하고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옛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화자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를 거니는 풍경은 내가 전에 살던 동네를 무용하게 거닐던 밤을 생각나게 했다. 나말고도 그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위안이 되는 일이다.

뒤에 실린 에세이는 길게 쓴 작가의 말 같았다. 처음엔 재밌다 하면서 읽었는데 뒤로 가선 이 세 편의 소설이 이런 기억과 약속을 통해서 탄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 구상하고 준비했는지를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설에서는 이야기를 감속하는 방식의 서술과, 인물들을 보호하는 화자의 서술이란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감속과 보호가 화자와 독자의 거리, 베일을 더욱 줄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스텔지어가 떠올랐다. 문득 불러일으켜지는 무언가. 특이한 건 노스텔지어가 디지털 도구 매체를 통한다는 거다. 그때 들었던 음악, 보았던 드라마, 영화, 했던 게임, 찍었던 사진, 지지직하던 티비 화면. 화자는 그런 것들을 마주한다. 버리지 않은 이상, 기억에서 잊어도 데이터는, 기록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디지털 시대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억이란 어떤가. 한없이 친했던 그 사람의 이름조차도, 중요한 사건도, 왜 멀어졌는지도 기억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은 그대로 남아있다. 기억은 디지털로 보충되고, 디지털은 기억을 토대로 나의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기억과 디지털이 만나는 기묘한 순간.

디지털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대에 살았던 세대는 그 당시 기술에 자신의 추억을 덧씌웠다. 저화질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어린 나. 저화질의 나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요즘 디지털 기술은 선명하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선명하고, 귀로 듣는 것보다도 생생하다. 지금 바로 내 기억에 저장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선명하다. 최근에 태어난 아이들이 미래에 어른이 되어서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남은 영상, 사진을 보고 그때를 우리처럼 그리워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십년 전의 내 모습이 담긴 마치 어제 찍은 것 같은 사진을 보고서 말이다. 그리움마저 탈색된다면 그들은 무얼 어떻게 되돌아볼 수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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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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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 마거릿 애트우드

애트우드의 9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전에 장편 <<눈먼 암살자>>를 읽으며 애트우드의 장르적 상상력과 인물의 인생을 빈틈없이 전개하는 노련함에 감탄을 한 적이 있어서 이 소설집을 읽고 싶었다. 이번 단편집은 노련하고 우아하고 재치있는 문체에 장르적 색체와 지금의 현실이 적절히 가미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루수스 나투라>를 제외한 모든 소설에 나이 든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의 육체는 전보다 쇠락해졌을지언정 영혼만큼은 과거보다 날카롭고 풍부하다. 회상을 하지만 회한으로 쏠리지 않고 후회하지만 지금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거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 견디고 참았던 일들을 지금은 참지 않고 맞선다. 현재는 과거를 복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걸까?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어간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에 있게 되는 걸까?

<알핀랜드>-<돌아온 자>-<다크 레이디>로 이어지는 연작은 판타지 대작 ‘알핀랜드’를 쓴 작가 ‘콘스턴스’의 이야기, 아니면 그녀의 과거 애인이자 개차반 시인 ‘개빈’-을 우아하게 까발리는-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알핀랜드’라는 판타지 소설의 탄생 비화와, 자신과 자신의 문학에 심취한 여성들을 착취했던 문인 개빈에 대한 우아한 폭로, 판타지 소설 내에 판타지스럽게 반영된 현실의 설정, 과거 그 문인에 엮였던 세 인물의 현재까지 정말 능수능란하게 엮여 있다.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인물을 동원하며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전하는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놀라워하면서 읽었다.

<동결 건조된 신랑>은 재치있고 섬뜩한 상상력이 놀랍고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은 지니아라는 여자에 대한 세 여자 주인공의 판단이 결말에 이르러 통쾌한 복수와 함께 뒤집혀서 재미있다. <<도둑 신부>>라는 장편에 이 네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해서 궁금해진다.

<죽은 손의 사랑>이 제일 흥미롭게 읽혔다. 자신의 월세를 대 준 동거인들에게 지금 집필 중인 소설이 발간되고 향후 나오게 될 이익을 (자신을 포함해) n분의 1 해서 나눠주겠다는 (기한 없는) 계약을 덜컥 해버렸는데, 그 소설이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된다면? 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야기. 이 설정도 흥미롭지만 잭이 집필한 <죽은 손의 사랑>이라는 소설도 재미있고, 소설 집필 과정이 현실의 맥락과 번갈아 적혀있는데, 그 속도감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계약을 따지기 위해 그 동거인들 한 명 한 명씩을 찾아간다니.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다.

표제작 <스톤 매트리스>는 다른 단편들에 비해 짧지만 강렬하고 화나고 또 으스스한 이야기다. 주인공 버나를-고등학생 시절 강간하고 임신시켜-망쳐버린 개차반 밥. 노년에 휴식을 위해 떠난 패키지 북극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밥에게 그녀가 가하는 복수는 섬뜩하지만, 밥이 가했던 일보다 그럴까?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 범죄 은폐가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마지막에 실린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이야기다. 앞선 이야기들에선 노년인 주인공들의 인생 이야기였다면 여기선 노년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잔인한 시선이 담겨있다. 양로원에 불을 질러 노인들을 서둘러 죽음으로 내몰려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다니. 정부는 각지의 기상-폭풍, 홍수, 화재-같은 문제에만 전력을 쏟는 듯하다. 젊은 시위대가 양로원에 불지르는 장면은 <루수스 나투라>라는 가장 짧은 단편에서 생김새 때문에 악마로 낙인 찍힌 주인공을 죽이러 오는 마을 사람들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사와 악마로 대표되는 선악이란 개념은 주로 스스로한테 부여하기보다도(이것도 나름 문제긴 한데) 타자로부터,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성되는 것 같다.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는 것인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 심해지고 문화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지금의 현실은 이 소설 같은 일이 그저 소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백히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대신 몰아내기를 택하게 만드는 사회는 그 테두리가 공고해질수록 속은 빈약해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인생을 읽어가는 재미가 압도적이고, 과거 사연과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여 이야기가 풍부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애트우드의 이야기는 훌륭한 식사를 한 것처럼 즐거운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서평단으로 제공 받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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