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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사원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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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장편 시리즈 ’풍요의 바다‘ 3권 <새벽의 사원>. 관능적인 에너지가 느껴져 <봄눈>(1권), <달리는 말>(2권)보다 그의 다른 작품들(<오후의 예항>, <짐승들의 유희>, 그리고 아마 <금각사>)이 떠오른다. 물론 시리즈에 요구되는 유기적 연결성이나 이야기의 총체적인 진행이 이전 소설보다 더 뚜렷해져서, 소설의 초반부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문장이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전 이야기와 달리 불교적 색채와 회의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데, 그건 ’환생자(기요아키-1권, 이사오-2권)‘를 바라보는 ‘인식자’에 불과했던 ‘혼다’가 중년에 이르러 소설의 완전한 초점 화자로 등장하고, 이국의 공주로 태어난 환생자가 혼다에게 타자처럼 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타자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대상화, 작가만의 미학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절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성’을 믿던 혼다, 그러나 환생자로 인해 이성의 균열을 느끼고 ’감성‘과 ’순수‘의 본질, ‘윤회 사상’의 의미에 대해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혼다는 이사오의 죽음 후 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출장 차 태국에 방문했다가 자신이 이사오의 환생자라 주장하는 일곱 살 태국 공주 ‘잉 찬’을 만난다.

역사에 관여하려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 믿는 혼다, 그래서 환생자들이 시대에 맞서 보였던 태도(불가능에 매혹당한 감성의 기요아키와, 극도의 순수를 추구해 행동으로 보인 이사오)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금의 혼란을 비교하며 역사와 환생에 대해 곱씹던 혼다에게 환생자가 넙죽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너무 쉽게 성사된 만남은 어떤 뚜렷한 결과 없이 끝난다. 공주가 너무나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연찮게 얼핏 본 잉 찬의 알몸에서 환생자의 증표와도 같은 왼쪽 옆구리의 점 세 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사오를 통해 환생의 존재를 알아버린 지금 시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도모하고 추구할 수 있을까?

일을 해결한 혼다는 인도로 넘어가 바라나시와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교 사원, 그리고 인도에서 오래전 추방된 불교의 성지 아잔타 동굴 유적을 방문한다.

죽음에조차 무관심한 듯한 사람들, 죽은 듯이 보이나 살아있는 사람, 강 앞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사원 불 등 삶과 죽음이 한 들판을 이루고 있는 세계 같은 갠지스강 유역의 분위기는 혼다에게 감성과 이성 너머, 윤회라는 ‘초이성’의 존재를 공포스럽게 실감하게 하는 체험이 된다.

반면 불교 성지인 아잔타 석굴에서 혼다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 마지막에 만난 폭포에서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임을 깨달았던 미와산의 삼강 폭포, 기요아키가 죽기 전 언급했던 폭포를 떠올린다(이후 혼다가 ‘야뢰야식’의 실체를 깨달을 때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나라는 격랑에 휩싸이는데, 혼다는 그때부터 서재에 박혀 본격적으로 윤회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윤회의 목격자인 혼다의 의문은 하나다. 불교는 자아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윤회 사상에 관계된 ‘업’ 사상을 계승해서 인과적인 윤회(선에는 선업, 악에는 악업을 주는 식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이야기부터 인도 설화까지, 기나긴 탐구와 성찰 끝에 혼다는 불교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간 소승불교에 ‘종자훈습’ 개념을 제시해 철학적 결실을 맺은 대승불교의 ‘유식론’에다가, ‘무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야뢰야식’이라는 궁극적 의식을 설정해 앞선 수수께끼를 푼다. 야뢰야식이 윤회환생의 주체이며 그것이 생사를 윤회하는데, 인과의 방식보다는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맞닿은 듯 동시공적으로 현현한다. 야뢰야식은 그 의식의 거처인 ‘세계’와 존재적으로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현재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폭포의 모습과 같다. 그런 흐름 속에서 ‘깨달음’이 발생하여 윤회는(그리고 세계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혼다는 이렇게 초이성의 실체를 도출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인데, 2부는 이와 또 다르게 다르게, 말하자면 ‘의아하게’ 전개된다.

전쟁이 끝난 뒤 혼다는 1900년대 초부터 진행되던 한 소송에서 쉽게 승소해 변호사로서 거액의 돈을 얻고 별장을 꾸린다. 바란 적 없던 우연한 기회로 삶의 안정이 확보된 것이다. 이는 패전한 뒤 연합군이 주둔하고 일왕이 힘을 잃는 일본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나라 현실과 혼다의 삶의 대비-는 극대화된다.

별장에서는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후지산’이 뚜렷이 보인다. 후지산은 혼다의 기억 속 태국의 새벽의 사원,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의 사원과 묘하게 겹쳐진다. 신성한 대상이 건축물에서 자연물로 바뀌면서 혼다에게는 때아닌 쾌락, 욕망의 충동이 일기 시작한다.

그건 나이가 들어 불가능이 확정된 그에게 환영처럼 솟아난, 불가능을 쫓고자 하는 쾌락이다. 세속적인 쾌락, 지적인 쾌락 등 다양한 쾌락 중에서 혼다는 불가능한 쾌락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열여덟 살이 되어 일본에 유학을 온 월광 공주 ‘잉 찬’이다.

친구, 서생의 아들로 모습을 드러냈던 윤회자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싶어 의아하다.

기요아키와 이사오의 경우, 혼다가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죽음)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엔 애초부터 윤회자와 거리를 두고 허무에 대비해 이런 욕망을 발명해둔 게 아닐까 싶다. 윤회자의 입장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윤회 주체를 타자화하고 윤회의 목격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로 바뀐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 윤회를 못하는 인간이기에 이런 식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는 한껏 아름다워진 잉 찬에게 그 세 개의 점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도우면서 동시에 방해하기 때문이다(이렇듯 혼다가 천착하던 윤회는 혼다에게 어느새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어 있다).

욕망에 눈 뜬 혼다. 당혹스럽긴 하나, 사실 혼다가 쾌락을 추구할 거라는 징조는 소설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이성의 문지기로서 법을 수호하던 그는 소설 초반에 법의 규제에 인간성의 장난이 있다고 통찰하기 하고, 자신이 그 어떤 물질도 쥐어본 적 없다는 걸 사뭇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인물들이 탐미적인 예술가들(히시카와, 쓰바키하라 부인, 이마니시, 마키코)이고 또 그런 호칭에 걸맞은 행동들(불륜, 관음)을 보여서 혼다가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혼다는 잉 찬 자신이 모르게 잉 찬을 관찰함으로써 그 세 점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어 한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관음증적인데, 그런 데엔 또 이유가 있다. 그런 관음의 형식이야말로 초이성적인 쾌락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가 윤회, 불교와 결합하는 순간이다.

혼다는 인식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런 욕망을 설계한 뒤로부턴 잉 찬의 부재를 즐기기도 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한다. 다데시나로부터 받은 서적에서 본 공작명왕의 이미지를 잉 찬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다만 1대 월광 공주의 반지를 잉 찬(2대 공주)에게 끼게 해 그녀와 ‘연결’돼 있고 싶어한다. 그건 반지가 그 둘 다 이 세계에 존재함(한쪽은 윤회를 거쳐)을 증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가능성을 향해서 치열하게 달려가는 질주라면, 치열하게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불가능성에 닿으려하는 혼다의 사랑, 그 불가능을 완성하고 보존하려는 사랑은 사랑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다. 혼다는 잉 찬을 욕망하고 그를 통해 소유할 수 없는 윤회를 욕망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을 예민하게 알아챈 이웃 주민 게이코, 잉 찬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게이코를 통해 혼다는 이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애초에 불가능을 전제하고 있다. 불가능을 꺼뜨리는 순간 불가능을 포함해 모든 가능마저 무너지는 모순. 결국 이 욕망은 실현되면 그가 원했던 것과 달리 세속적인 쾌락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물론 그렇게 수준이 격하되는 쾌락에도 혼다는 유혹을 느끼는 듯하다, 워낙에 완벽을 일구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잔인하게도 ‘자살’로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혼다는 생각한다. 인식의 촛불이 꺼져가는 순간에야 진정한 어둠을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인간이 그 촛불 자체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세계라는 상호의존에서 육체는 가장 먼저 버려질 껍데기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껍데기다. 혼다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 나른하게 앉아 그 불가능이 성사되는 지고지순한 행복을 꿈꾸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혼다는 구멍 엿보기를 시작하나, 잉 찬이 게이코와 동침하면서 왼쪽 옆구리의 세 점을 드러내 혼다를 배반해버린다(잉 찬은 자신이 혼다를 배반한 것조차 모르겠지만).

결국 혼다에겐 초이성적인 쾌락만큼이나 초이성적인 허무가 남는다(혼다를 집요하게 의심하던 혼다의 아내 리에에게도). 그리고 그런 허무를 세상에 내보이듯, 혼다가 꾸었던 기나긴 황금빛 꿈에 대한 미학적인 완결이 치러진다. 사원 화장장의 불타는 모습이 갠지스 강물에 비치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혼다의 별장이 수영장 물에 비친다. 새벽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현실과 혼다의 삶이 드디어 일치를 이룬다.

한 시대의 종말, 거대한 저녁노을을 상징하던 예술은 새벽까지 미뤄져, 점점 눈에 띄는 빛으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세상의 모든 종말, 초이성의 허무를 반사하기 시작한다.

새벽에 달이 순식간에 사라지듯 잉 찬의 삶도 소설의 말미에 짧게 끝나버린다. 윤회조차도 그렇게 멀어지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이제 마지막 <천인오쇠>만이 남는다. 여기선 혼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한 환생자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상이 가지 않아 더욱 기대된다. 앞선 소설마다 다음 환생에 대한 예언이 나왔는데 이번 소설에선 그런 예언조차 없기 때문이다. 잉 찬의 죽음을 여기선 짧게 처리한 대신 <달리는 말>에 미리 이사오의 꿈으로 상세히 서술해둔 것도 윤회가 점점 인식자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다. 저번 소설보다 어려워진 듯하나 이것이 미시마 유키오가 하고자 하는 말인 듯 느껴져서 그 어려움조차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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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9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심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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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나고 자란 시코쿠 지방의 어느 숲 골짜기 마을의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신화 이야기. 신화, 전설, 민담, 역사 등 ‘이야기’가 가진 모든 특성-장점과 단점을 모두 포함해-을 소설로 담아낸 걸작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마을 신화를 줄곧 들으며 자랐던 화자는 어느 날부터 이야기 듣기를 기피하게 된다. 할머니의 사명감, 이야기를 듣기 전에 제사처럼 외쳐야 하는 문구도 그렇고, 여동생도 있는데 혼자서만 이야기를 듣는다는 부담감, 섬뜩한 sf소설을 본 뒤부터 엄습한 ‘이 이야기가 진짜가 되면 어쩌지’ 하는 공포 때문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고 얼마 후, 계곡에서 죽을 뻔한 일을 겪은 화자는 거기서 각성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임무를 이어받은 마을 노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청해 듣기 시작한다.

그렇게 주워 들은 이야기와 직접 본 것, 역사 사료나 마을의 유적지를 통해 알게 된 것, 마을의 풍습과 축제 등으로 자연스레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화자는 지금, 자식들도 성인이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글로 써나가기 시작한다(그렇게 늦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에 줄곧 관통하는 단어가 바로 M과 T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M은 메이트리아크, 여족장, 여가장을 뜻하고 T는 트릭스터, 말썽꾼이자 영웅을 뜻한다. 신화에서부터 전설, 민담, 역사 순으로 마을의 이야기가 흘러가며 M과 T의 형태로 여러 인물(파괴자, 오바, 오시코메, 메이스케, 메이스케의 어머니, 메이스케 동자, 작가의 어머니, 작가의 아들 히카리,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뭉클함과 무용담을 듣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지는데, 이는 소설이 입말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야기 전달자(할머니, 마을의 노인과 신관, 어머니 등)의 목소리를 구전의 형태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나에게 이처럼 이야기의 압도를 선사한 또 한 작품, 모옌의 <개구리>도 이와 비슷한 서간체 형식이다).

물론 구전이라는 이야기 방식은 오래된 만큼 낡은 것이기도 해, 한계가 적지 않다. 어느 이야기는 결말이 두 개이기도 하고 어느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와 모순되며 사실과 다르기도 하다. 이야기가 딴 길로 새거나, 똑같이 되풀이 되기도 하며, 이야기의 앞뒤가 끝내 다 밝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화자의 서술방식도 이와 비슷해서, 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거나, 한 이야기에 제기한 의문을 나중에 다른 이야기로 답하기도 하는 등, 친절하면서도 여기저기 딴 길로 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시간대가 복잡하게 나타나더라도 읽고나면 선형적으로 정리되기 마련인데(안 그런 소설도 많고 그걸 의도한 소설도 많지만), 이 소설은 ‘소설’의 특성보단 ‘이야기’의 특성이 강해 서사가 선형적이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읽다보면 전개상 필요한데(혹은 궁금한데) 빈 부분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얼개와 인과를 스스로 짜맞춰야 할 때도 생긴다. 누군가에게 듣는 것처럼 편하게 읽히지만,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드는 순간 앞으로 이동해서 이야기 흐름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래서 입말과 구전 형식이지만 마냥 쉽게 읽히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구전 문학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이 자체가 의도인 듯 느껴지고, 때문에 이걸 소설로 담아낸 게 놀랍기만 하다.(한편, 입말인데도 문장이 어렵기도 했다. 문장 자체가 길고, 주어와 술어가 멀거나 호응이 잘 되지 않기도 하며, 주어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도 적지 않고, 주어 앞의 수식이 많아 문장이 단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이는 오에 문체의 특징일까?)

구전이라는 특성이 이 소설이 가진 재미의 중심축이라면, 그 축을 기준으로 뻗어가나는 이야기의 ‘신비함’ 혹은 ‘기이함’은 그 재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을 창건한 자는 자신의 형수(‘오바’)와 도망친 자로, ‘파괴자’라고만 알려져 있고,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복고운동’을 한 여성 ’오시코메‘는 마을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자신을 구덩이에 유폐한 사람이며, 마을 봉기의 선두자였다가 감옥에 갇힌 ’메이스케‘는 면회 온 어머니한테서 “괜찮아, 괜찮아, 죽게 되더라도 내가 곧 다시 낳아줄게!”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밖에도 ‘파괴자’는 아침마다 마을의 중앙에 자란 백양나무의 줄기 하나를 잡고 타잔처럼 날아 착지하는 습관이 있고, 파괴자를 비롯한 마을의 창건자들은 거인화되어 백 년 넘게 살아간다. 마을에 일본제국의 군대가 들어오려 하자 마을 사람들은 ‘파괴자’가 마을을 창건할 때 ‘대암괴’를 폭발시킨 일에서 착안해 강에 댐을 만들어 물을 가뒀다 폭파시켜 군대를 몰살시킨다. 마을에 대대로 전해지는 연극은 항상 어떤 군인이 나무에 목을 매는 모습으로 끝나고, 숲에는 발가벗은 채 파리떼를 몰고 다니는 ’엉덩이눈‘이나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 사람‘이 살고 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자급자족하던 마을이 메이지 유신 등을 기점으로 국가에 알려지게 되는데(즉 신화에서 역사로 편입되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발을 디밀려는 국가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습도 흥미를 보장한다. 전쟁 여파로 인한 징집과 세금을 우려해 호적에 마을 사람 절반만 이름을 올리고, 마을의 특산물인 목랍을 비밀리의 숲길로 유통해 풍족한 경제를 유지하고, 외국으로부터 불도저와 장난감 총을 수입해 개조해서 활용하는 등 마을의 생활적인 내력도 흥미를 더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신화에서 역사로,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작가 개인의 삶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러나 마지막 파트에서 작가의 어머니와 작가의 아들 히카리, 작가의 아주 어릴 적 경험과 그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숲의 신비’를 통해 이야기가 무한히 확장되며, ‘파괴자’의 신화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가, 결국 시간과 죽음까지도 초월한, ‘혼’과 함께 영원히 살아숨쉬는 마을의 정체성으로 마침내 완성된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세계가 정말이지 확고한데(장애를 가진 아들의 이야기와 마을 신화, 핵 반대 운동 등), 그 안에 여러 갈래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놀라게 된다. 만년에 나온 장편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서도 이 마을 이야기와 메이스케를 필두로 하는 마을 봉기 이야기도 나온 걸로 기억한다. 거기서는 그 이야기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이것도 혁명 이야기다)와 연결되어 영화화하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여기선 그 마을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고도 재밌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런 게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전에 학교 수업에서 즐겁고 흥미롭게 들었던 신화 관련 이론(이때 ‘트릭스터담’이란 말을 주워 들었다)과 한국의 신화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고, 그때 배운 신화 전설 민담의 갖가기 특성을 이 소설이 전부 다 담고 있어서 정말 경악하면서 읽었다. 특히 ‘파괴자’ 이야기가 너무나 인상적이라 집중해서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오에의 작품 중에 제일이고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에-<만엔 원년의 풋볼> 다음으로-한 몫한 작품으로 꼽힌 이유도 알 것 같다. 마르케스처럼 겐자부로도 이야기의 보물을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았구나 싶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이야기’란 것에 갈증이 생기면 다시 들여다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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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오후 2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7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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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초기작 <휘청거리는 오후>. 제목도 제목이지만 우연히 본 결말부의 문장이 박완서 선생님이 이렇게 날카롭기도 하다니, 싶을 정도로 인상 적이어서 무슨 내용일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런 작품을 두고 고전, 걸작이라고 말하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벅차오른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을 결혼시키며 몰락하는 중산층, 허성 씨 가족의 이야기다.

주요하게 등장하는 세 자매-맞선이 좌절된 뒤 부자에게 시집가고 싶어 중매시장에 자신을 내놓다시피 하는 ‘초희’, 오랜 연인인 민수와 결혼을 꿈꾸다가 일부터 저지르고 본 ‘우희’, 친구의 애인을 뺏어가면서까지 욕망에 휩싸이다 남자의 추악한 실체를 목도한 뒤 결별하고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말희’-는 결혼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과 환경의 안정, 행복을 꿈꾸는 여성들이다.

선생 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맡게 되었다가 겨우 안정에 달한 허성씨는 양심만은 끔찍이 지키려는 태도를 가지고 결혼에 눈이 먼 듯 속물적으로 행동하는 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랑에 겨운 나머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싶어한다(그건 아내인 민 여사도 마찬가지인데, 사업이 잘 굴러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그렇게도 남편을 닦달해서 미워질 것 같으면서도, 허성 씨와 마찬가지로 딸들을 끔찍이 위하는 게 느껴져 감히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결혼 후에야 발톱을 드러내는 현실(특히 남편들의 돌변은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가 떨린다)은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뿐만 아니라 육친애처럼 희구했던 사소한 행복마저 좌절시킨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깊이 깊이. 잎과 줄기 뿐만 아니라 뿌리까지, 심긴 땅까지 전부 병들게 한다. 허성 씨가 딸들에게 내어준 새로운 삶은 모두 무너지고, 결국 허성 씨의 삶도 마치 도미노의 연쇄작용처럼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비극에 가닿기까지 허성 씨의 무력하면서도 친근한, 시대에 뒤쳐진 듯하면서도 그런 혼란 속에서 시대를 날카롭게 진단하는 시선이 제일 좋았지만(물론 그는 1970년대 가장으로,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던 가부장적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민 여사, 세 딸, 공 회장, 민우, 정훈, 문경하, 오지경 씨, 문기범 씨, 윤 영감, 중매쟁이, 차 씨, 김상기-의 시선도 모두 그 인물의 성격을 생생히 드러내고도 남아 좋았다.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모두에게 징그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이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설은 모든 인물의 선의와 욕망을 전부 보여주고 있다. 옷을 전부 갖춰입고 화장까지 했는데도 오장육부까지 들여다보고 말하는 듯한, 소설 속 중매쟁이의 시선으로 쓰인 소설 같다.

인물들은 자신의 무형의 욕망을 결혼 풍습에 의탁한다. 공고히 이어져 온 제도가 욕망을 실현시켜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는 한쪽이 마음만 먹으면 과감히 그 약속을 져버리거나 상대를 속일 수도 있는,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장난이 되기 쉽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욕망을 제도에 걸맞게 변형시켜 귀에 귀걸이 코에 코걸이 하듯이 걸게 되는 순간, 욕망은 그 제도의 허위에 어쩔 수 없이 전염된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제도의 허위가 낱낱이 밝혀지더라도, 제도에 동의한 인간은, 제도가 만들어준 욕망의 가면을 쓴 인간은 그 허위에서 벗어날 새 없이 물들게 된다. 그래서 그토록 양심의 편에 서서 딸들을 지지하려던 허성 씨도 결국엔 ‘감쪽같이’란 말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 것이리라.

아무리 남녀평등 사회라고 말들은 하지만, 결혼 풍습의 약자는 여성이며, 여성의 가족들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속는 것도 그들이고 결국 받아들이는 것도 그들이라고. 소설은 결혼 제도가 가진 추악한 허위, 여성을 위한다는 감언이설을 경고하고 있다. 어쩌면 결혼을 만들어낸 사회 자체가 감언이설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그 거대한 감언이설 그 자체를 까발린다고 할 수 있다.

문장들이 복잡하진 않지만 한껏 벼려 있어서, 이야기 흐름에 익숙해지면서 자연히 방심할 때마다, 인물들이 행복에 가까워지려는 때마다 허를 찌르는데, 그 때문에 얼마나 탄식하며 읽었는지 모르겠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욕망이란 인간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서 갖은 사람들과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때론 그런 욕망도 부정한다. 부정과 부정, 욕망과 욕망의 파도에 휩쓸리다 허덕이다 도착하는 곳, 그곳이 바로 삶의 현재가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휩쓸리게 하는 부조리들, 물질적인 욕망과 권력, 위계 등을 문제시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날카롭게 경고하는 소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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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엉겅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8
라이너 쿤체 지음, 전영애.박세인 옮김 / 봄날의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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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인 쿤체의 시선집. 해외 시집은 처음인데, 건강한 식사를 한 것처럼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사회비판적인 시, 놀라운 통찰을 담은 시, 자연적인 시, 사랑을 담은 시, 시에 관한 시까지 전부 모여 있어서 시 입문자가 읽기에도 좋을 것 같다. 아주 예전에 쓴 시부터 최근에 쓴 시까지 실려 있어서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또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005년 한국에 일주일 간 방문하고 쓴 시도 모여 있는데 분명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인 시인데도 한국인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다. 모든 시에 지혜가 깃들어 있어서 잠언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절반 실린 독일어 원문을 읽지 못한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 독일에 간다면 들고 갈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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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녹는 Entanglement 얽힘 1
성혜령.이서수.전하영 지음 / 다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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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람출판사가 시작한 세 작가의 ‘얽힘’ 시리즈 첫 번째. 키워드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하던 앤솔로지와 다르게 키워드 뿐더러 장소도 같이 얽혀 있었다.

이번 키워드는 ‘손절’이다. 세 소설 속 인물들은 관계의 단절을 생각하고 이행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 관계에 얽혀든다. 결국 누군가는 끝을 보고 헤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하며 누군가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세 소설마다 매력이 있었는데, 성혜령 작가의 <나방파리>의 경우 화자가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거에 공감이 갔고, 화자와 비슷한 듯 다른 종희의 전사, 화자의 죄책감에 골몰하면서 읽었다. 종희가 죽은 아들인 시온과 대화하고자 영매들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슬프기도 했다. 거기서 밝혀지는 비밀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긴장감 있고도 애처롭게 만들어서 새로웠다.

<언 강 위의 우리들>은 인물들이 빛을 발하는 소설이었다. 화자의 예술가적 기질과 두 인물의 앙칼지고 털털한 대화들이 매력적이었고,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가 생각한 것들도 매력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들과 오래된 친구임이 느껴지는 뻔뻔스러움에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손절과 이별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했다.

가장 기대했던 작품은 전하영 작가의 <시간여행자>였다. 젊은작가상 대상작인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으면서도 감탄했던 건, 긴 분량을 아우르는 시간성이었다. 툭툭 끊어진 듯하면서도 다 들여다보면 커다란 시간 속에 원형처럼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느꼈는데 이번 작품도 그랬다. 누군가의 죽음이 자꾸만 벌어진다는 체감에 이르러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나아가려는 시선이 좋았다. 아파하는 것보다 사랑하며 사는 게 그들도 바라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뒤에는 해설이 아니라 세 작가가 서로 작품을 가지고 질의응답한 내용이 적혀 있다. 세 작가가 쓰면서 무엇을 고민했고 자신의 무엇을 투영했으며 서로 어떤 지점을 공감하면서 이 시리즈를 공동 작업 해갔는지를 알 수 있어서 유익했다. 밥 떠 먹여주는 듯한 해설보다(물론 어떤 작품은 해설이 꼭 필요하겠지만) 이런 방식의 뒷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더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같다는 생각도 든다.

엄청난 기대를 갖고서 신청한 서평단은 아니지만 각자의 소설이 전부 좋았고 이것이 얽혀드는 과정에서 ‘관계’에 대해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좋은 시리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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