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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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 서평단으로 읽었습니다

내가 나라는 게 문득 싫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라서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나라서 불가능한 것들이 있을 때. 그 모든 이유가 나인 것만 같을 때.

소설의 주인공 박지수에겐 자신에 대한 불가능, 무력함, 혐오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중3때 급격하게 불어난 몸과, 살이 찐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어른들의 시선들, 해리아를 좋아했으나 그녀가 사고를 당한 순간에 방관만 해버린 나 자신, 어릴 적 살던 영진동에 팽배하던 사이비 조칠현 교회, 교회와 커넥션이 있었던 동네 유일한 병원 민덕병원, 극한의 다이어트를 거듭하며 마른 몸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폭식을 해버리고 마는 지금의 삶, 시금치 알레르기라는 오진 때문에 간암임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아버지에게 갖는 일종의 후회, 애인인 태인으로부터 결혼 얘기를 듣고서 그가 자신의 본모습을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고뇌, 느닷없는 통증에 시달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지금의 자신… 너무나 많다.

‘나’는 중3의 미운 ‘나’로부터는 도망쳤다. 훌륭하게 도망쳐 지금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서른 둘, 추석을 맞아 본가에 들렀다가 엄마를 통해 그때 시절 인물들과 얽히게 된다. 중학교 체육 선생인 김이영으로부터 수영을 배우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얘길 들었던 ‘나’, 대학시절에는 소설을 써서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 바라보고 싶어했던 ‘나’는 이제 어떤 지옥 속에 빠져들어가게 될까.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자유를, 그 치유의 빛을 쬐게 될까.

1부만 수록된 가제본이지만 분량이 꽤 된다(112페이지). 꽤 되는데도, 정말 순식간에 읽혔다. 읽으면서 꽤 많은 소재들, 주제로 거듭날 수 있는 소재들, 이야깃거리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것들이 핵심이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소설에는 주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있구나, 깨닫게 하는 복합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내가 나여도 충분하다는 믿음을 갖고 싶다.

#치유의빛 #강화길 #은행나무 #서평단 #가제본 #문학 #글 #독서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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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0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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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걸 계속 확인해가면서도, 끝없이 들어주고 배려하고 의견을 말하고 되묻다보면 대화란 저절로 깊어지고 거기에 유대 또한 쌓이는 걸까.

변화를 간곡히 원하는 스무 살 가정부 여성과 변화를 원하지 않는 중년의 행상 남성이 나누는 대화는 수많은 대명사들이 동원되고 사려깊은 말솜씨까지 더해져 언뜻언뜻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이야기한 ‘희망하기 위한 희망’에 가까운 대화, 생활과 형편과 처지로 겹겹이 둘린 삶의 내부를 비추는 대화가 된다.

해설에 실린 대로 이들은 결핍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결핍을 채우면 다 해결된다는 식이 아니라) 욕구를 욕구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 실현은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전에 없던 결심과 행동, 선택, 객관적인 자기인식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들이 희망하는 실현의, 만족의 그날은, 파도처럼 들이쳤다 빠져나가는 희망과 절망의 길항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주어진 것들을 해나가며 살다보면 우연히 시작된 이들의 대화처럼, 얼굴에 따뜻한 붉은 빛을 던져주며 지는 노을처럼 자연스레 피어오를 테다.

어떤 행복은 완성되는 순간 파도처럼 부서지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어떤 소소함은 그 자체로 귀하고 만족스럽다. 어떤 일상은 그 속내를 설명서처럼 전부 꿰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가 도저히 어려우며 어떤 떠돎은 외롭더라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것들을 차차 짚어나가는 대화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퇴적된 것들을, 모래 속의 사금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나 또한 보았다.

길고 깊은 대화를 겪은 이들의 우연과 저녁으로 차차 물들어가는 동네 공원의 풍경이 질투가 날 정도다. 좋은 대화를 나눴다 싶은 날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두둑하게 얻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랬던 날들이 그리워지는 소설이었고, 좋은 대화란 어떤 건지 표본으로 삼아도 좋겠다 싶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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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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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첫 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화양극장>이나 <김일성이 죽던 해>, <오즈>의 근사함도 있지만 <언두>와 <OK, Boomer>,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어긋남과 표독스러움도 있었다.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무언가는 굉장히 사랑할 수 있듯이, 사실 그게 인간이듯이, 소설에는 인간의 선하려는 의지와 쉽사리 악으로 닿는 마음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번 작품집은 표독스러움에 더 날을 세워 마치 날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야기라는 먹잇감을 채가는 것처럼 전개한다. 이야기의 장악력이 한결 강해졌고 거기에 속도감까지 더해졌다.

첫번째 소설집을 묶는 단어가 세대였다면 두번째 소설집은-세대를 포함하는-사랑과 닮음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은 대부분 사랑에서 기원한다. 애정. 유의할 점은 사랑이 윤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랑들은 처음엔 윤리의 범주에 있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윤리를 벗어난다. <길티 클럽: 호랑이 키우기>의 화자가 아동학대를 한 김곤 감독을 변호하게 되는 부분과,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의 의견보다 앞서서 인간의 희망을 이용하려는 부분, <혼모노>에서 장수할멈이 깃든 신애기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신애기를 넘어서려고 피를 흘리면서도 작두를 타는 무당 문수가 그렇다. 그들은 그게 그 순간엔 유일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잘못됐다는 걸, 도가 지나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은 후에 온다. 혹은 오지 않거나.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광기라고 애써 포장하고 거리감을 부여하려 해도, 우리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씨앗은 사랑이며, 인간 누구에게나 그런 씨앗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누구나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정하는 대상을 닮으려 애쓰다 그 대상을 넘어서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잉태기>처럼 닮지 않으려고 애쓰다 닮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윤리를 벗어난 사랑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똑같이 광기로 보인다고 알려주고 있다. 딸 서진을 원정출산을 보내려는 엄마서희와 범죄라며 뜯어말리는 시부 지중헌(두 이름 모두 소설에 나오진 않지만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밝히셨다)은 극명한 대비에 놓여있는 듯하지만, 서진을 향한 애정의 크기는 똑같다. 방향만 다를 뿐. 서진을 가졌을 때부터 시부의 온갖 간섭을 받았던 화자 서희는 시부를 극도로 경계하는 방식으로 서진을 돌본다. 시부는 아이 때부터 아꼈던 서진이 아이를 갖게 되자 서희의 영역 밖에서 서진을 챙기려 한다. 엄마의 방식과 할아버지(별명이 지지)의 방식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던 서진은 그들이 갈등하게 되면서 자신도 갈등하게 된다. 결국 서희와 시부가 추구하는 사랑의 인력이 날이갈수록 세지면서 서진을 있어야 할 자리, 있고 싶은 자리에서 끌어내고 만다. 끝끝내 이 가족의 자장에서 서진은 없어지고 엄마와 시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사랑의 열감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이 흉악하다.

사랑의 광기는 악이 되기도 쉽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에서 여재화와 구보승이 설계하는 건축물은 수련원으로 불리지만 실은 고문실이다. 여재화는 건축계에서 살아남고자 이 일을 받아들이고 건축학과 학생인 구보승, 성실하긴 하지만 욕심 없어 보이던 그를 조수로 데려온다. 여재화가 이곳이 그냥 수련원이 아니라 고문실이라는 걸 밝히고서부터 구보승이 열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서늘하면서도 흥미롭다(나치 수용소의 설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여재화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데 구보승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위치를 헷갈리게 만들고 천장을 높게 만들어 다른 취조실의 비명이 울리도록 한다. 특히 취조실에 창문 넣는 걸 반대했던 구보승이, 거기에 대고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하다며 반대했던 여재화의 의견을 다르게 받아들여,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만 빛이 들 수 있는 수직창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소름 돋는다. 여재화는 구보승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막지 않고 설계자를 구보승으로 올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어쩌면 구보승보다도 인간을 위한 건축이 뭔지 알았던 여재화가 더 악한 걸지도 모른다(줄곧 여재화의 시점에서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구보승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때 여재화가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인간의 양면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여재화는 그의 선배 Y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여재화가 욕심없고 순한 놈이었다고 말하자 놀란다. 자신이 구보승을 조수로 데려온 이유도 그런 욕심 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위픽에서 나왔던 중편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도 건축이 소재라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인간을 위한 건축을-그러나 상반된 관점으로-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재화가 제자인 구보승이 자기와 닮았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 것과 반대로 <우호적 감정>의 수잔, 스타트업에서 시니어급인 그녀는 주니어급인 동료 알렉스가 사회초년생 시절 열정 넘치던 자신과 닮았다는 걸 바로 안다. 대표인 맥스보다 나이가 한참 많고 뒤늦게 스카웃 되어 팀에 잘 섞이지 못하는 시니어급 동료 진을 포용하려고 애쓰는 알렉스를 보며 동료 수잔은 자신도 사회초년생 때 모두를 포용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그 말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진은 스타트업의 규칙을 저버리는 발언을 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수잔은 회사를 관둔다. 알렉스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부장이었던 진이 수잔이 나간 뒤의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하는 모습과 거기에 최대한 맞춰주려는 대표 맥스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수잔이 느꼈던 감각들이 이제 알렉스에게도 찾아올 거라는 징조처럼 보인다.

발표 시기상으로 가장 마지막인 <스무드>는 닮음에 있어 다른 소설들과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인 듀이와 태극기 부대원인 미스터 김은 서로를 보며 각자의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정을 붙인다. 게다가 그 정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관심, 반성으로까지 뻗어가는데… 서로 너무 다른데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깨끗하게 화합하는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낯선데, 독자인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빠진 상태에서 너무 다른 지점에 놓인 인물들의 매끈한 연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이해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오독도 정독도 필요한 듯이 느껴진다. 오독도 정독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소설이다. 그래서 독특하다.

마지막에 실린 <메탈>도 닮음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서정적이기도 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학교 동아리에서 메탈음악으로 맺어지고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꽃 핀 시우, 조현, 우림의 ‘코발트’적인 우정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하는 과정은 닮음의 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애정하는 사람만이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모습은 뭉클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어떤 열정은 길어지다보면 고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집 같은 열정마저 사라지면 헛헛함에 삶의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지니 일단 계속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림의 메탈에 대한 애정은 열정이었을까 고집이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또. 십대의 우정이란 타임캡슐 같다. 인상적인 순간과 장면들에 더불어 미래에 꺼내볼 많은 약속들이 거기에 있다. 우림이 마지막에 조현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때의 타임캡슐을 찾아 땅을 파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녹슬었더라도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성격이 워낙 다른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이 작가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독자로서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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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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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의 시들은 개인의 세계로 침참하는 시들, 그것이 깊이로 느껴지기 전에 벽으로 느껴지는 난해한 시들과 달리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세계를 소개하듯이 경유해 개인의 영역을 넓히는 시처럼 느껴진다. 시가 막힘 없이 읽힐 정도로 직관적이고, 상징이나 비유도 복잡하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시에서 발견하고 대화하며 투영되는 존재들이 비인간, 낯설지만 이미 ‘있어왔던’ 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적이다. 시는 유려한 문장을 쏟아붓는 미지의 매혹이 아니라 귀한 발견의 순간이 정제된 언어로 전개되어, 읽는 나를 넓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은 제목에 ‘물질’이 붙어있고 시 안에도 <세계 끝의 버섯>,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말 등 과학적 인용이 많은 학술적인 시집이다. 시라는 주관성의 세계에 과학의 객관성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 같다. 그렇다고 시가 객관적 설명으로 채워지면서 딱딱해지는 건 아니다. 물질이 갖고 있는 특성-세상에 널려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만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희덕의 시는 과학의 한계와 시의 한계를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파괴적인 힘이 기술과 자본으로 포장되기 쉬운 과학의 속성과, 아름다운 암호로 물러나기 쉬운 시의 속성을 보완한다.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를 상호이익을 위한 공생 관계라 정의한 진화생물학자의 말을 의심하며 그 관계가 사랑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모습, 피와 석유가 포르피린이라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고 말하는 시, 담수가 선진국이 포진한 북반구로 끌어올려지면서 남반구에 기후문제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 기후위기를 알리기 위해 가져와 전시한 빙하를 사람들이 마구 부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서늘하게 표현한 시, 아보카도 하나에 여러 국가들의 노동과 희생이 치러진다는 발견 같은 비판적인 시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물구나무 설 수 없는 내가 물구나무종임을 선언한 너를 찾아가는 <물구나무종>, 털이 벗겨진 닭과 맨 몸인 나를 서로 동등한 입장으로 사고하는 <닭과 나>는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에코 페미니즘적 관점이 묻어나는 시다. 인간이 물질을 사용하는 손을 지상에 닿는 뿌리로 변화시키는 물구나무라는 비유가 독특하다.

나에겐 3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계엄과 탄핵을 통해 공원에서 광장으로 복귀한 여의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이 저지른 참상, 히잡으로 일어난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 spc계열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호주의 원주민 동화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사과의 날, 돈을 갚는 은행과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자본주의로 엮이는 순간, 고독사가 존엄사로 이름이 뒤바뀌는 슬픈 순간, 한국전쟁 속에서 이념의 경계에 서게 되는 순간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고 있어서다. 특히 <조지 오웰의 장미>는 정치와 정원이 유사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인간 사회의 일이 인간 사회만의 일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해서 인상적이다.

4부를 읽으면서는 새로운 가능성과 여전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호주 시인 사만다 포크너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한국의 버섯괴 호주의 산호초가 하나로 엮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근사하고, 전동 휠체어 체험을 통해 인간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보게 하고 인간도 물질임을 역으로 느끼게 해서 놀랍다. 마지막에 실린 <손과 손으로>는 실뜨기를 통해 우리가 연결된 채로 서로 차례를 주고받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드러낸다.

이렇게 50여편의 시들, 세계와 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인간중심주의에 한정된 시적 대상을 비인간으로 넓히는 시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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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5 소설 보다
강보라.성해나.윤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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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을 선물하는 세 편의 소설들.

강보라의 <바우어의 정원>은 은화의 오디션 장면이나 정림, 무재의 삶이 몇 부분 비어 있고, 성해나의 <스무드>는 소설 속 예술가 ‘제프’의 작품 이름이지만 그 작품의 이야기가 아니며, 윤단의 <남은 여름>은 서현이 친구의 죽음과 전 직장에서의 고충에 부채감을 느끼는 이야기지만 친구의 삶과 전 직장 상사인 추팀장의 이야기, 서현의 직장 생활에 대해선 상당 부분 비어있다. 그렇게 비어 있는데도 소설은 알차다.

꽉 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비어 있는데도 알차고, 그 여백을 아쉬운 감상으로 남게 하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근사하게 안겨주는 소설들도 좋다고 느꼈다. 하나씩 짚어보자면,

<바우어의 정원>은 정원에서 초원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연기라는 형식의 거짓됨에 흥미를 느끼는데, 연기가 삶을 재구성해볼 수도 있게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좋았다. 또한 그들에게 배우가 정체성이자 직업이며 삶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초반에 제목의 의미가 제시되어 놀랐지만 뒤로갈수록 그 제목이 더욱 확장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아픔을 오래오래 소화하는 정림과 은화의 대화(혹은 대사)며, 마지막 장면의 참담함과 과거가 따라오는 묘사는 몇 번을 봐도 근사하다.

<스무드>는 재외동포 화자 ‘듀이’가 태극기 부대 집회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여기서 나-독자는 철저하게 외부인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두 인물이 만나 화합을 이뤄내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내가 그들보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제프 쿤스의 매끈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질감과 익숙함과 닮아 있기도 하다). 갈등 없는 세상은 평화로울까? 그건 오히려 모두가 하나의 편인 전체주의적인 세상이 아닐까 싶다. 낯선 인물들의 익숙한 모습을 보면서 현대의 인간은 제각각의 밀실을 지닌 채 광장을 떠도는 건 아닐까 싶었다. 밀실은 너무나 커지는 반면 광장은 협소해지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또한 어떤 오해는 너무나 오해되면 이해에 가까워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해한 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 남은 여름>은 분위기와 밀도가 빛나는 소설이었다. 은근한 거리두기와 덤덤한 다정이 느껴지는 서술, 푸른 소파가 나타내는 상징-소파는 오로지 앉기 위해 만들어진 가구지만 동시에 눕거나 기대기 위한 가구이기도 한 것-이 여름의 적막감, 화자가 느끼는 부채감을 되려 강조한다. 송지현의 소설에서 느꼈던 여백의 미, 덜어냄의 미를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에게 남은 것들은 누군가가 떠나고 남겨진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 살아왔던 흔적을 빌려 살고 또 누군가에게 돌려준다고.

공교롭게도 소설 배경이 소설 순서대로 겨울, 여름, 여름이다보니 독자에게 봄이라는 여백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쓰는 자의 펜이 읽는 자의 펜으로 옮겨가는 연결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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