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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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블랙유머의 대가인 커트 보니것의 대표작 <제5도살장>(1969년)에서 전매특허처럼 반복되던 경구는 ‘뭐 그런 거지’였다(오래전에 읽은 터라 그것말고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어떤 뚱보가 숲속을 헤맸던 것, 어떤 행성의 동물원에서 인간이 전시된 것까진 기억난다). 전쟁통에 무자비하게 일어나는 죽음 앞에서 읊조리는 ‘뭐 그런 거지.’는 쿨함과 풍자가 모두 담긴 문구였다. 이번 장편소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1973년)에서 반복되는 경구는 ‘어쩌고저쩌고’다.
어쩌고저쩌고.

할말이 많지만 줄여야 할 때, 앞선 그 모든 할말들이 어떤 위력을 점점 잃어가는 걸 본인이 느낄 때, 그러니까 과잉될 때 쓰는 경구인데, 왜 그런 경구를 쓰느냐면 이 소설은 미국, 정확히 말해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확실히 과잉된 나라다. 과잉, 팽창의 대표가 아닐 수 없다. 이백년의 짧은 역사를 거치며 세계 최강국에 선 미국. 이민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인종차별이 여전하며 국가 원수의 한마디면 모든 나라 사람들을 휘청이게 만들 수 있는 나라 미국.

이 소설은 그런 나라의, 미들랜드 시티라는 지역에서 아트 페스티벌을 앞둔 어느 날 두 중년 남자가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다. 소설 막바지에 두 남자는 우연히 만나는데 거기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가 들고 온 소설을 읽고 그만 미쳐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미치는 남자는 거기서 자동차 대리점을 비롯해 여러 브랜드에 지분을 갖고 있는 부자 ‘드웨인 후버’(아내는 음독자살을 했고 아들 버니는 동성애자라며 상종도 하지 않는다)고, 미치게 만드는 남자는 장편소설은 117편, 단편소설은 2천편 넘게 썼지만 대다수 포르노 잡지에 실리는(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수당도 받지 못했다) 무명 sf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후에 노벨의학상을 받긴 한다. 그는 세 번의 이혼을 겪었고 그의 아들은 베트콩이 되었다)다. 소설은 그 둘이 만날 거라고 서두부터 예언하고 그들이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병렬로 제시하며 천천히 따라간다. 그러니까 작가가 결말을 미리 정해두고 독자에게 선포한 뒤 그 과정에 집중한 셈인데, 뜻밖에도, 결말에서 작가는 무언갈 깨닫고 서술의 방향을 바꾼다.

이 소설은 인간은 기계다, 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인간을 생명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의해 작동하는 사물(그런 점에서 결함 있는, 나사 빠진 인물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로 본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구에서 생각이란 우정 또는 적대감의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생각인지는 상관없었다. 서로 친구인 사람들은 친근감을 표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동의했다. 서로 적인 사람들은 적대감을 표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지구인들이 지닌 생각은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생각들을 어찌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그저 증표나 다름없었다.” (p.51)

그런 독특한 관점은 이 소설 서술자의 ‘행성적 사고’(방금 내가 지었다)와도 맞아떨어진다. 마치 우주선으로 우주를 유랑하다 지구를 본 이들에게 지구라는 행성의 미국이란 국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소개하듯이, 흔히 알려진 단어로 명쾌하게 지시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지구인이 아니어도 알 수 있게 에둘러서 표현한다. 그리고 대뜸 소설의 전개완 전혀 상관없는 일러스트를 보여주며(이를테면 어떤 인물이 셔츠깃에 단 배지를 일러스트로 보여주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예술을 후원합시다.’) 시종일관 다른 길로 샌다. 그러면서 드웨인과 트라우트의 만남은 지연되고 지연되는데, 지연되는 풍경 속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것들이 점차 드러난다.

바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개념이다. 보니것은 이것을 종교적으로 다루지 않고 아주 물리적으로 다룬다. 인간을 기계로 보듯이. 트라우트는 소설가라는 점(그가 쓴 소설, 쓸 소설이 열 편 정도 소개된다)에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드웨인의 비서이자 정부인 ‘프랜신 페프코’가 부탁한 것처럼 치킨 체인점 하나는 거뜬히 사서 차릴 수 있고, 아버지의 암 치료비 때문에 드웨인이 소유한 “버거 셰프”에서 일하고 있는 ‘패티 킨’의 삶을 구제할 수 있는 드웨인도 창조자(생계의 창조자랄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드웨인의 머릿속에 다이너마이트처럼 심긴 아주 나쁜 생각이 발현되게끔 그의 앞에 아주 우연히 나타나서는, 우주 창조주가 당신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실험 중이며 나머지 인간은 다 로봇임을 주장하는 소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트라우트의 대표작)를 제공해 드웨인의 광기를 폭발시킨 트라우트에 비하면 드웨인은 피조물에 가깝다. 하지만 트라우트도 후반부에 이르러 커트 보니것 본인이 직접 등장하며 피조물인 걸로 판명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보니것 자신도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세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며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만큼, 그 또한 창조자라 보기 어렵다.

창조자 같은 누군가도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창조자 위에 또다른 창조자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복잡다단하다. 이 소설에서 꼬집는 부분은 이런 복잡성, 과잉이다.

인간들 또한 지구에서 마음대로 이것저것 만들어내고 찍어낸다는 점에서 창조자다. 버리고 태우고 방치하고 오염시킨다는 점에서도 창조자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는 인간은 피조물, 즉 기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연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창조자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창조자는 언젠가 이 모든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모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드웨인이 자동차 공장에 들렀다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차에 해서는 안 되는 모든 짓”(p.226)을 차에다 하던 실험실 앞에 붙은 ‘파괴 시험’이란 표시를 회상하며 내뱉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게 하느님이 나를 지구에 태어나게 한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인간이 망가지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말이야.“
(p.227)

그러니까 인간은 실험 대상이고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한 실험인 셈이다. 인간이 얼마나 이 지구에서 버틸 수 있는지가 이 실험의 주된 목적인데, 인간은 그 실험을 역으로 지구에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장 폐수를 강에 흘려보내고, 우림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자기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이 자신을 살게 해주고 있다는 걸 아예 잊어먹은 것처럼 말이다.

실험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실험하는 구조, 즉 핍박의 연쇄는 지구와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또한 인간을 핍박한다. 인간이 인간을 실험하는 노예제도가 그렇다. 소설 내에 만연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태들,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은 남북전쟁이 끝나며 노예 해방이 이뤄졌지만 승리한 북부 백인들에게 그건 좌절감이었을 거라는 풍자적 발언과도 맞아떨어진다. 여전히 흑인은 노예처럼 하급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어떤 일은 기계(로보-매직 세탁기 같은)가 대신하게 되었지만 흑인 노예가 하던 것처럼 완전한 대체는 아니어서 여성들이 일명 ‘깜둥이 일’을 떠맡게 되었다. 남자들은 기계를 계속 부수고 부수며, 더 나은 기계를 기다리며, 핍박은 계속된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세상이라 그런가 미들랜드 시티 사람들은 드웨인이 점점 미쳐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피아를 식별하기 위한 동조일 뿐이다. 그곳에서 벌어질 아트 페스티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두 남자가 기다리는 유일한 구원이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드웨인은 페스티벌에 찾아온 예술가들한테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그래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아트 페스티벌에 초대받은 예술가 트라우트는 불행하고 실패한 예술가인 자신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그들 때문에 페스티벌은 좌절되지만.

소설은 두 주인공이 아수라장인 세상을 관찰하며 소모되듯 너덜너덜해지던 와중, 작가 본인이 그들이 모인 홀리데이 인 칵테일라운지에 등장해서는 인물들을 도구적으로 써온 것(마치 미국에서 총알 한 방이면 누군갈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듯이)을 반성하며 이젠 ‘인생’을 쓰겠다는 신념과 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대신 혼돈 자체를 쓰겠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마치 피조물들의 세상에서 창조주가 떡하니 나타나는 것처럼), 난 작가 본인이 드웨인과 트라우트가 결합된 인물로 보였다. 소설 내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보니것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했으며, 어머니를 자살로 잃었고(평안을.), 고백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니까. 그는 자신을 둘로 분열해 한쪽은 광기로 들어찬 마을을 돌아보고 한쪽은 뉴욕에서 서부로 오는 여정으로 미국을 돌아보며 이 세상의 모양, 이 모양 이 꼴을 보여준 것이다. 그 둘이 만났을 때 광기에 불이 붙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런 세상을 보고도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니까. 물론 그 광기는 무자비한 폭력, 누구도 변호할 수 없는 폭력으로 벌어졌으며, 폭력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소설이 드웨인에게 준 그릇된 깨달음은 ‘세상에 무수히 일어나는 부끄러운 일들이 타인들, 기계들이 벌인 건데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였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결국 아트 페스티벌을 중단시키고 만다. 모든 실험이 망해버린 것이다. 예술이라는 새로운 진리의 실험마저도.

그러나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드웨인의 광기에 불이 붙기 전, 보니것은 칵테일라운지에 자신이 등장시킨 미니멀리스트 화가 ‘카라베키안’, <성 안토니오의 유혹>이란 아주 단순해 보이는 그림을 이 도시에 팔아 거액의 돈을 벌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하는 그 화가가, 혼돈의 미들랜드 시티에서 유일한 자랑거리, 미들랜드 시티에 살아가는 사람들한테서 삶이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여성 수영선수 ‘매리 앨리스 밀러’를 그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수영 훈련을 시켰다는 얘길 듣고 평가절하 하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한테서 예술가로서 욕을 먹게 된 순간, 그가 예의를 갖춰 자신의 그림이 가진 의미를 고백한 걸 듣고 감화된다. 그 말은 이러하다.

“이제 저의 명예를 결고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의 도시가 소유한 그 그림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의식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비물질적인 핵심-모든 메시지를 수신하는 '나 자신'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쥐와 사슴과 칵테일 웨이트리스의 내면에도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그 어떤 터무니없는 모험이 닥쳐오든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성스러운 그림은 수직으로 된, 흔들림 없는 하나의 빛줄기입니다. 만일 바퀴벌레나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그의 옆에 있었다면 그 그림은 두 개의 빛줄기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며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성스러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기계에 불과합니다.”(p.299)

내면에 의식을 갖고 살아있는 것,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그 얘기를 자신의 피조물한테서 들은 창조주 보니것은 그 자신이 표현하려던 혼돈에 잠식되지 않고 평화로운 지구인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후에 드웨인의 폭력은 막지 못하더라도(그는 이미 제대로 미치고 있어서 화가의 고백은 듣지도 않았다. 그후 그는 몰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우트 앞에 나타나서는 트라우트를 해방시켜주고 떠난다.

“저는 다가올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세월을 위해 저 자신을 씻어내며 갱신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정신적 상황에서 톨스토이 백작은 자신의 농노를 해방시켜줬지요.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켜줬습니다. 저는 제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제게 그토록 충성스럽게 봉사한 모든 등장인물을 자유로이 풀어주려 합니다.
저는 당신한테만 이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오늘밤은 다른 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밤이 될 거예요. 일어나세요, 트라우트 씨, 당신은 자유입니다, 당신은 자유예요."
그가 꾸물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이 부상당한 상태였기에 우리의 손은 각자의 몸 양옆에서 달랑거리기만 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내가 말했다. 그리고 사라졌다.(p.395~396)

나는 이것이 보니것이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 중 하나에게 고하는 작별로 들렸다. 또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욕망하던 무언가의 개별성, 독립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으로도 들렸다(그 점에서 드웨인과 이름이 아주 비슷한, 교도소에서 풀려나 자동차 대리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스물여섯살의 흑인, 아주 웃기고 유쾌한 ‘웨인 후블러’는 드웨인과 반대로 자유를 찾은 듯 느껴진다).

우리가 이 파괴 시험(누구를, 무엇을 파괴하는 건지 이제 아리까리해진)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를) 무언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렇게 평화로운 지구인이 되는 것. 올해의 사나운 여름이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평안한 여름 같았다. 평안한 여름을 느끼고 싶다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를 꼭 드셔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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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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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바깥은 여름> 이후 8년만에 출간된 김애란의 소설집. 8년 전, 처음으로 문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 인터넷 서점을 살피며 엄선한 소설집이 <바깥은 여름>이었는데, 그로부터 어느새 8년이 흘렀다. 8년이란 시간이 나에게 무언갈 건네줌과 동시에 또 무언갈 거둬갔듯이, 작가도 8년 동안 시간한테서 무언갈 받고 무언갈 건넸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시간과 끊임없이 맞바꾸며,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써나간 글들이 모인 이번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8년 내내 미뤄둔 숙제를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숙제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겠지만, 나는 왠지 거기에 파묻히고 싶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 숙제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입동>에서 벽지가 더럽혀질 때 느꼈던 처참함, <노찬성과 에반>의 출구 없는 기분, <건너편>의 마무리에서 쿵 내려앉는 느낌, <가리는 손>의 배덕감 등 세상의 교묘한 논리를 서글프게 짚어내는 정확성에 놀라 두 뺨이 얼얼해지는 순간들이, 그와 동시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세상의 구석구석들이, 그렇게 소설이 정밀하게 세공해준 삶의 렌즈가 나에겐 소중하기도 했다.

이번 소설집 띠지에 적힌 ‘사회학자’란 말을 봐버렸기 때문에 사회학의 느낌으로 이번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사회학이란 사회를 비판하더라도 냉소하지 않고 사회가 가야할 길을 찾아내는 학문인 것처럼 이번 소설집의 이야기들도 얼얼함을 넘어 서늘할 정도로 사회의 비틀림을 짚어내는 동시에 외로운 인간에 대한 연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김애란의 사회학은 집에서 시작한다. 안정과 형편을 동시에 함축하는 집이 소설에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거나 주인공이 타인으로 입장하며 소설은 거주지에서 드러나는 계‘급’의 차이가 ‘종’의 차이가 되는 것 같은 사회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낸다.

코로나 기간 동안 발표된 앞의 네 소설(<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은 그 점에 있어서 상당히 정확하고 날카롭다. 전염병이 인간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비가시적으로 초연결을 초래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자본주의의 계급성을 지적하고 있다.

<홈 파티>는 후배 ‘성민’의 초대로 잘 사는 그들의 세계와 역할을 조사하러 ‘오대표’의 홈 파티에 간 연기자 ‘이연’이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연기를 해보이는 반전을 보여준다. 홈파티에 초대한 오대표의 계산서에 이연이 정확히 들어맞은 사람으로 판명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이 무엇인지 이연은 알 수 없다. 이연은 간파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간파당한 위치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연기,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 연인처럼 달뜬’(p.43) 연기를 펼쳐보인다.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p.42)의 그림이 그렇게 이연의 연기로 완성된다. 그것이 아무리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어도 이연은 수정을 가할 수가 없다.

<숲속 작은 집>은 <홈 파티>와 여러모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물가가 한국보다 세 배는 싼 외국 산악도시에 한 달 간 머물기로 한 ‘은주’ ‘지호’ 부부. 한국에서는 꿈꿔볼 수 없는 단독주택(교외에 위치한)에 머물게 됐으니 행복할 거란 예상과 달리, 주택을 청소하는 현지인 여성과 팁 문제로 갈등(내적 갈등)하면서 예상치 못한 불편이 생겨난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 소설은 중산층이 상류층을 보며 느끼는 것들이 서술된다면, 여기선 그 반대로 중산층이 하층민에게 느끼는 것들이 서술되고 있다.

팁을 주지 않아서 집의 몇몇 물건을 일부러 정리하지 않은 건가 싶어진 은주는 외출 때마다 팁을 놓고가 최대한 현지인 여성에게 성의를 보이려 하나, 집에 돌아와도 흐트러짐 없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팁이 은주를 괴롭힌다. 팁에다가 현지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떠난 날부터 팁이 없어져 이 방식이 통한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은주는 이런 생각에 몰두하고 눈치를 보는 자신이 답답하다.

은주가 주택을 청소하는 현지인 여성에게 팁을 주며 메모에 현지어로 적은 ‘감사합니다’와, 은주 엄마가 은주에게 이번 달 용돈이 들어오지 않은 걸 슬며시 언급하며 덧붙이는 ‘고마워’와, 여행 막바지의 어느 날 은주 지호가 외출한 사이 그들이 기념품 가게에서 사서 집에 두었던 작은 집 모형이 없어진 것 때문에 그곳을 떠나던 날 은주가 팁과 함께 두고 가려다 결국 주머니에 구겨넣어버린 쪽지에 적힌 ‘감사합니다’, 청소하는 여성의 딸이 단독주택에서 없어진 기념품과 비슷한 모형을 구해 건네주며 자기가 단독주택을 청소하다 작은 집 모형을 깨뜨린 사연을 적은 엽서 말미에 유일하게 현지어로 적혀있는 ‘감사합니다’를 거치며 은주는 ‘언젠가 내가 상대에게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p.86)을 느끼는 것처럼 ’감사합니다‘를 한쪽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 주었다 뺏을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게 된다. 상호 우호적으로 주고받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돈과 직접적으로 붙으면서(팁에는 감사합니다란 메모가, 용돈 얘기에는 고마워라는 문자가) 상호 호혜적으로 뒤바뀌는데, 그런 ‘감사’의 교환은 계급과 세대, 언어라는 필터를 거칠수록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못해 속물성과 더불어 도덕적인 상실감까지 안겨버린다. 이 소설이 인상적인 건 은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민감성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 이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들-현지인 여성과 그 딸의 관계, 그들의 삶-이 있어서다. 그것들이 이 소설을 징후적으로 읽게 만든다.

<좋은 이웃>은 도덕적인 상실감이 강조되는 소설이다. 당장 내년 봄에 짐을 빼야 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남편 ‘준호’와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고 줄여나가고 있지만,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노동 가치와 화폐 가치의 하락, 전염병 상황 등으로 인해 매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고 찾아와 인테리어 공사 양해를 구하는 윗층의 젊은 신혼부부에게 ‘나’는 미묘한 열등감을 느끼는데, 그것이 발화점이었는지 독서지도사인 자신이 유일하게 직접 집에 찾아가 가르치던 장애학생 ‘시우’, 형편이 어려워 보이던 그 아이의 가족이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시우 어머니로부터 수업을 이어가달라고 부탁받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때문인지 일을 관둔다. 그런 열등감의 중첩 사이에 낀 ‘나’의 입장이, 남편 준호의 입을 통해 중년 중산층의 곤란함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결국 이렇게 된 거 아닐까?”, “내가 탐욕을 부리거나 투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저 좀 생존하겠다는 건데. 가진 사람들은 세금 몇 푼에도 펄쩍 뛰고 피해자가 되지 못해 안달인데, 정작 사다리에서 튕겨나간 나는 좀 속상해하면 안 돼?”(p.121)

모두가 살기 어려워진 시대에 ‘사회 초년생도 신혼부부도 아닌, ’성장‘과 ’단계‘를 조금이나마 맛본, 이제 중년에 접어든 부부’(p.108)는 노년세대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세대인 동시에 신세대로부턴 과거의 온갖 특혜를 수혜했다며 미움을 받는 세대다. 고립과 미움의 시선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던, 되고 싶었던 마음조차 빼앗아가버리고 만다. 그들이 아무리 젊은 시절 ‘난장이’로 사회를 배웠다고 해도.

<이물감>은 그런 중년세대의 박탈감과 그 박탈감을 다른 관계로 뒤집고자 하는 속물성이 대두되는 소설이다. 앞서 집으로 드러나던 계급성은 이 소설에서 되새김질 증상을 겪는 십오 년 차 은행원 ‘기태’로 인해 먹고 마신 것들을 소화시키고 배출시키는 내장기관으로 뒤바뀐다. 계급이 종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 계급의 ‘체화’를 기태는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 인물이다.

그런 기태는 또한 외롭다. 외로워서 젊은이들이 한다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지만 뷔페에서 다양한 음식을 구경하듯이 인스타그램 세상을 탐색하면서 문득 외로워지고, 그러다 낯설고 다채로운 세상에서 익숙한 무언갈 골라내듯이 검색창에 몇 년 전 이혼했던 아내 ‘희주’를 검색하고 계정을 살피며 또 외로워진다. 그녀와 친근해 보이는 남자 ‘차대표’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외로움의 근원은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던 희주와 보냈던 시절, ’맑은 몸과 마음으로 상대에게 진지하게 몰두했던 때, 몸의 불편을 몰라 몸을 잊고 몸에 집중했던 때, 육체의 욕구와 마음의 욕구가 거의 일치했던 때, 그런데 그 상대가 서로라서 더 좋았던 때.‘(p.155~156)가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가는 듯한 지금의 희주를 보면 볼수록 그때의 시절이 더 희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태는 파트너 ‘지수’가 있지만 더이상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부하 직원들과 ‘노후 얘기’, ‘돈 얘기’를 하면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가지는 적의를 읽고, 삶을 돌이키다 자신이 젊은 시절, 중년이 된다면 얻게 될 거라 여겼던 막연하지만 확고한 위치를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p.175) 생각하고, 역류성 식도염 진단을 받은 뒤론 ‘식도에서 뭐가 거꾸로 올라올 때마다 자신이 마치 부패중인 인간처럼‘(p.162) 느끼며, 약을 먹어도 브로콜리즙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증상과 식사 후에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킨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p.176)

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희주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기태는 희주에게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자 결국 차대표의 이탈리아 비스트로 보스꼬에 ‘손님으로’ 찾아간다. 실물을 보기 전에는 막연히 ‘라스푸틴’ 같다고 생각했던 차대표를 기태 스스로가 사회 경험으로 고안했던 ‘내장의 관상’(p.179) 관점으로 관찰하다 열등감을 느낀 기태는 음식을 남기지만 정중한 태도로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숱하게 보아온 교묘하게 불만의 암호를 보이는 손님을 연기함으로써 ‘알량한 승리감’(p.186)을 맛본다. 그러나 그런 손님을 흉내 냈는데도 스스로가 불쾌해지고 속물적이다 못해 짐승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몸도 마음도 진심도 없는 사람이 된 거 같은 건 왜일까.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계급의 대차대조표의 명확한 구분선이 두드러질수록 그걸 인식하는 인간을 속물적으로 만든다면, 나이 들어가며 더 예민하게 느끼고 감각하게 된 외로움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물감>의 기태는 그런 속물성과 나약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자, 7편의 소설 가운데 놓여 소설집의 흐름이 사회학이 자본주의를 파고들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외로움으로 향하리라 예감하게 한다.

<레몬케이크>는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이야기로, 일을 그만두고 ‘여행 전문 책방’을 운영하며 경영난 때문에 가벼운 알코올의존증을 갖게 된 ‘기진’이 재미삼아 해본 알코올의존증 자가 진단표와 건강검진 차 병원에 들렀던 엄마 ‘선주’가 받은 우울감과 인지기능 검사지를 소설의 앞뒤에 배치함으로써 그들이 만난 오늘 하루가 어떤 하루였는지를 보여준다.

인지기능이 부쩍 안 좋아진 엄마 선주를 데리고 정기 건강검진을 도는 일상적인 하루가, 기진이 좋아하던 서인주 작가의 북토크 행사와 겹치면서 기진은 조급하게 엄마와의 일상을 치러내며 엄마와 자신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기진이 엄마 선주를 보고 놀라는 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엄마 선주가, 이제는 한국어도 잘 못 알아들어 기진의 통역이 필요한 선주가, 이명과 난청을 겪기 시작하며 인지기능이 나빠져 요양병원으로 들어간 남편 ‘경수’처럼 그 자신도 이명 증세를 겪기 시작한 선주가, ‘여전히 옷'과 멋'에 욕망을 드러내는 눈동자를 천천히 덮었다 열었다’(p.193)하는 사람이자, 맨정신으로 조금도 취하지 않고 하루를 견디는 사람, 딸에게 복권을 샀다고 자랑하며 용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점,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레 양립하는’(p.212~213)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p.214)

서인주 작가의 아버지가 작고해서 북토크를 취소하고 텅 빈 책방에 앉아 축하기념으로 사온 레몬케이크를 꺼내 촛불에 불을 붙이지만 소원 하나 빌지 못하는 기진에게 그 하루는 삶의 지난함을 느끼는 동시에 타인의 삶에 무관심했던 것이 의아해지는 하루로 뒤바뀐다. 그 옆에 놓인 ‘좋은 날’에 마시려고 사둔 샴페인 겉에 뭍어난 물기를 보며 기진은 저걸 마실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건 오늘을 감내할지 오늘을 흘려보낼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기로에 선 기진과 달리 오늘을, 하루하루를 흘려보낸 사람은 다음 소설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 ‘은미’일 것이다. 칠 년 전, ‘헌수’와 동거하며 ‘다음 단계’까지 고려했으나 엄마의 간병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일도 그만두고 헌수와도 이별하고 엄마도 잃고 다리를 다쳐서 수술까지 해 방에 머물러야 했던 은미는 언젠간 이곳을 떠날 생각(혹은 착각)으로 ‘에코스’로 화상영어 학습을 하기 시작한다.

은미는 거기서 만난 선생 ‘로버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은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노동 앞에서 어떤 격식과 약속을 지키’(p.232)고 ‘온갖 풍부한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p.235)을 가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가 아버지와 이별하게 됐을 때는 위로를 건네며 동질감을 느낀다. 그와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수업’말고 그냥 ’대화‘를 나누면서 이 헤어짐이, ‘이별만큼 흔한 게 없는’(p.241) 이곳에서의 이 무겁지 않은 이별이 아쉽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세계가 쪼그라들’듯이 고립되어가며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p.254)던 은미의 외로운 지금을, 로버트가 잠시나마 함께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미의 그런 깨달음은 로버트가 이 마지막 수업 초반에 한국어로 안녕을 뭐라고 부르는지 물었을 때, 은미가 칠 년 전, 헌수와 <러브 허츠>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가사를 들었다고 오해한 일을 떠올린 것에서 비롯된다. 오랜 시간 부모를 간병하며 ‘나와 같은 고독을 겪’(p.252)었으나 노래의 그 부분을 ‘안녕’이 아니라 ‘I’m young(암 영)’으로 바로 들었던 세 살 연하의 헌수와, ‘젊다’는 걸 전혀 듣지 못했던 자신, 그들 사이에서 울린 전화벨처럼 급작스레 시작된 관계의 파열음, 지지부진 했던 이별과, 한참 후에 그때 안녕이 맞다고 동조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술취한 헌수의 사과까지, 그렇게 해서라도 헌수가 젊음이 가진 정확함을 번복하고 일부러 틀리려고 수정까지 하면서 전했던 ‘안녕’이란 말을 은미는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로버트와의 마지막 순간, 온전한 이해를 바라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그런 말들에서도 일어나는 손실을 염려하는 대신, 언어의 고립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해준 로버트에게 지금까지 습득한 언어적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안녕’을 건넨 것이다. 은미가 로버트에게 새로 알려준, 한국어의 ‘안녕’에 담긴 ‘평안하라’는 뜻은 이별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별의 정확한 마침표가 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내몰린 사람, 가장 이별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소설 <빗방울처럼>의 주인공 ‘지수’일 것이다. 전자제품 설치 기사이자 성실하고 조용한 남자인 ‘준호’를 만나 결혼하고 전세 계약으로 방 세 개짜리 신축빌라이자 ‘거실 창 너머 무성한 초록’(p.260)이 보이는 ‘은성빌라’에 입주한 데다 ‘신혼부부 특별 공급 청약’(p.265)에도 당첨되며 ‘앞으로의 삶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p.287)로 살던 지수는 전세 사기를 당해 청약을 포기하고 빚을 져가며 은성빌라를 낙찰받는 데다가, 대출금을 갚기 위해 과로하던 준호가 죽게 되어 이 집에 혼자 남겨진다. 안방 천장의 누수 소리, 마치 빗방울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가만히 듣던 지수는 그 빗방울 소리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고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다. 독서교실 방문 교사 일을 이번달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연락을 돌린 지수는 안방의 누수 현상을 고친 뒤 마지막으로 사람을 불러 벽지 도배를 마치고서 남편을 따라갈 생각이다.

그러나 도배가 끝난 후 혼자가 된 지수는 말끔해진 벽을 보며 ‘뜻밖의 상실감’(p.292)을 느낀다. 그러다 수호의 방이 열려있는 걸 보며 의아해하다가 도배를 하러 왔던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떠올리고 그녀가 안방의 석고보드 교체 때문에 뜯겨져 있던 벽지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p.262)라 물었던 것을 곱씹는다.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p.294) 깨닫는다. 아마 그것과 동시에 지수는 그 여성의 정중한 말투와 농담, 그녀가 고향의 엄마와 현지어로 통화하고 자식인 ‘아린’에게는 엄하게 말하는 걸 건너 들었던 것, 또 그 아린이가 독서교실 방문 교사인 지수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선생까지 챙겨주려고 했던 ’아린‘과 같은 아이일까 잠시 궁금해했던 것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같은 쪽)는데, 그 순간 듣고 만다. 더 이상 들릴 리 없는 그 빗방울 소리와, 거기에 담긴, 지수는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어떤 목소리를. 전에는 ‘툭-/해/투두둑 툭-/할 수 있어/툭툭-/그럼 끝나’(p.280~281)으로 들렸으나 지금은 ‘툭-/안 돼/투두둑-/하지 마/투둑 투둑-/안 돼/툭-/살아’(p.293)로 들리는 그 빗방울 소리를. 세상과의 이별의 마침표가 되려던 빗방울은 지수의 눈물이 되어, 그 마침표를 찍으려던 지수의 마음을 흐려놓는다. 모질게 세상과 이별하려던 지수는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온다. 다시 비가 되기 위해 지상의 웅덩이로, 구석진 곳으로 떨어지고 모여드는 빗방울처럼.

이런 소설, 말하자면 고통과 적의, 각박함과 힘겨움, 슬픔과 외로움이 정확하게 담긴 소설을 볼 때마다 그 감정에 침잠하고 연민하고 공감하고 무력해지면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치 눈물이 배어나듯 불쑥 생겨나는 것은 왜일까. 읽을 때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지다가도 다 읽고 나면 다시 삶과 가까워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아무래도 이런 서글픈 방식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게 삶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기쁨과 달리 슬픔만이 터득하게 하는 삶의 진실들이 있으며, 그건 기쁨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기쁨은 만끽하면 그만이지만 슬픔은 삶을 지배하는 위력이 강한 만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해서. 그것이 김애란이 정밀한사회학으로 말하고 싶은 문학이 아닐까 싶다. 김애란의 이번 소설집은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시작해 인간과 인간 삶을 들여다보며 슬픔의 진실을 또 한 번 갱신하는 소설집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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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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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 서평단으로 읽었습니다

내가 나라는 게 문득 싫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라서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나라서 불가능한 것들이 있을 때. 그 모든 이유가 나인 것만 같을 때.

소설의 주인공 박지수에겐 자신에 대한 불가능, 무력함, 혐오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중3때 급격하게 불어난 몸과, 살이 찐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어른들의 시선들, 해리아를 좋아했으나 그녀가 사고를 당한 순간에 방관만 해버린 나 자신, 어릴 적 살던 영진동에 팽배하던 사이비 조칠현 교회, 교회와 커넥션이 있었던 동네 유일한 병원 민덕병원, 극한의 다이어트를 거듭하며 마른 몸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폭식을 해버리고 마는 지금의 삶, 시금치 알레르기라는 오진 때문에 간암임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아버지에게 갖는 일종의 후회, 애인인 태인으로부터 결혼 얘기를 듣고서 그가 자신의 본모습을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고뇌, 느닷없는 통증에 시달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지금의 자신… 너무나 많다.

‘나’는 중3의 미운 ‘나’로부터는 도망쳤다. 훌륭하게 도망쳐 지금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서른 둘, 추석을 맞아 본가에 들렀다가 엄마를 통해 그때 시절 인물들과 얽히게 된다. 중학교 체육 선생인 김이영으로부터 수영을 배우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얘길 들었던 ‘나’, 대학시절에는 소설을 써서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 바라보고 싶어했던 ‘나’는 이제 어떤 지옥 속에 빠져들어가게 될까.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자유를, 그 치유의 빛을 쬐게 될까.

1부만 수록된 가제본이지만 분량이 꽤 된다(112페이지). 꽤 되는데도, 정말 순식간에 읽혔다. 읽으면서 꽤 많은 소재들, 주제로 거듭날 수 있는 소재들, 이야깃거리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것들이 핵심이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소설에는 주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있구나, 깨닫게 하는 복합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내가 나여도 충분하다는 믿음을 갖고 싶다.

#치유의빛 #강화길 #은행나무 #서평단 #가제본 #문학 #글 #독서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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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0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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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걸 계속 확인해가면서도, 끝없이 들어주고 배려하고 의견을 말하고 되묻다보면 대화란 저절로 깊어지고 거기에 유대 또한 쌓이는 걸까.

변화를 간곡히 원하는 스무 살 가정부 여성과 변화를 원하지 않는 중년의 행상 남성이 나누는 대화는 수많은 대명사들이 동원되고 사려깊은 말솜씨까지 더해져 언뜻언뜻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이야기한 ‘희망하기 위한 희망’에 가까운 대화, 생활과 형편과 처지로 겹겹이 둘린 삶의 내부를 비추는 대화가 된다.

해설에 실린 대로 이들은 결핍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결핍을 채우면 다 해결된다는 식이 아니라) 욕구를 욕구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 실현은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전에 없던 결심과 행동, 선택, 객관적인 자기인식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들이 희망하는 실현의, 만족의 그날은, 파도처럼 들이쳤다 빠져나가는 희망과 절망의 길항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주어진 것들을 해나가며 살다보면 우연히 시작된 이들의 대화처럼, 얼굴에 따뜻한 붉은 빛을 던져주며 지는 노을처럼 자연스레 피어오를 테다.

어떤 행복은 완성되는 순간 파도처럼 부서지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어떤 소소함은 그 자체로 귀하고 만족스럽다. 어떤 일상은 그 속내를 설명서처럼 전부 꿰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가 도저히 어려우며 어떤 떠돎은 외롭더라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것들을 차차 짚어나가는 대화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퇴적된 것들을, 모래 속의 사금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나 또한 보았다.

길고 깊은 대화를 겪은 이들의 우연과 저녁으로 차차 물들어가는 동네 공원의 풍경이 질투가 날 정도다. 좋은 대화를 나눴다 싶은 날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두둑하게 얻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랬던 날들이 그리워지는 소설이었고, 좋은 대화란 어떤 건지 표본으로 삼아도 좋겠다 싶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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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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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첫 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화양극장>이나 <김일성이 죽던 해>, <오즈>의 근사함도 있지만 <언두>와 <OK, Boomer>,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어긋남과 표독스러움도 있었다.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무언가는 굉장히 사랑할 수 있듯이, 사실 그게 인간이듯이, 소설에는 인간의 선하려는 의지와 쉽사리 악으로 닿는 마음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번 작품집은 표독스러움에 더 날을 세워 마치 날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야기라는 먹잇감을 채가는 것처럼 전개한다. 이야기의 장악력이 한결 강해졌고 거기에 속도감까지 더해졌다.

첫번째 소설집을 묶는 단어가 세대였다면 두번째 소설집은-세대를 포함하는-사랑과 닮음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은 대부분 사랑에서 기원한다. 애정. 유의할 점은 사랑이 윤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랑들은 처음엔 윤리의 범주에 있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윤리를 벗어난다. <길티 클럽: 호랑이 키우기>의 화자가 아동학대를 한 김곤 감독을 변호하게 되는 부분과,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의 의견보다 앞서서 인간의 희망을 이용하려는 부분, <혼모노>에서 장수할멈이 깃든 신애기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신애기를 넘어서려고 피를 흘리면서도 작두를 타는 무당 문수가 그렇다. 그들은 그게 그 순간엔 유일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잘못됐다는 걸, 도가 지나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은 후에 온다. 혹은 오지 않거나.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광기라고 애써 포장하고 거리감을 부여하려 해도, 우리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씨앗은 사랑이며, 인간 누구에게나 그런 씨앗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누구나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정하는 대상을 닮으려 애쓰다 그 대상을 넘어서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잉태기>처럼 닮지 않으려고 애쓰다 닮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윤리를 벗어난 사랑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똑같이 광기로 보인다고 알려주고 있다. 딸 서진을 원정출산을 보내려는 엄마서희와 범죄라며 뜯어말리는 시부 지중헌(두 이름 모두 소설에 나오진 않지만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밝히셨다)은 극명한 대비에 놓여있는 듯하지만, 서진을 향한 애정의 크기는 똑같다. 방향만 다를 뿐. 서진을 가졌을 때부터 시부의 온갖 간섭을 받았던 화자 서희는 시부를 극도로 경계하는 방식으로 서진을 돌본다. 시부는 아이 때부터 아꼈던 서진이 아이를 갖게 되자 서희의 영역 밖에서 서진을 챙기려 한다. 엄마의 방식과 할아버지(별명이 지지)의 방식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던 서진은 그들이 갈등하게 되면서 자신도 갈등하게 된다. 결국 서희와 시부가 추구하는 사랑의 인력이 날이갈수록 세지면서 서진을 있어야 할 자리, 있고 싶은 자리에서 끌어내고 만다. 끝끝내 이 가족의 자장에서 서진은 없어지고 엄마와 시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사랑의 열감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이 흉악하다.

사랑의 광기는 악이 되기도 쉽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에서 여재화와 구보승이 설계하는 건축물은 수련원으로 불리지만 실은 고문실이다. 여재화는 건축계에서 살아남고자 이 일을 받아들이고 건축학과 학생인 구보승, 성실하긴 하지만 욕심 없어 보이던 그를 조수로 데려온다. 여재화가 이곳이 그냥 수련원이 아니라 고문실이라는 걸 밝히고서부터 구보승이 열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서늘하면서도 흥미롭다(나치 수용소의 설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여재화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데 구보승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위치를 헷갈리게 만들고 천장을 높게 만들어 다른 취조실의 비명이 울리도록 한다. 특히 취조실에 창문 넣는 걸 반대했던 구보승이, 거기에 대고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하다며 반대했던 여재화의 의견을 다르게 받아들여,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만 빛이 들 수 있는 수직창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소름 돋는다. 여재화는 구보승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막지 않고 설계자를 구보승으로 올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어쩌면 구보승보다도 인간을 위한 건축이 뭔지 알았던 여재화가 더 악한 걸지도 모른다(줄곧 여재화의 시점에서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구보승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때 여재화가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인간의 양면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여재화는 그의 선배 Y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여재화가 욕심없고 순한 놈이었다고 말하자 놀란다. 자신이 구보승을 조수로 데려온 이유도 그런 욕심 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위픽에서 나왔던 중편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도 건축이 소재라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인간을 위한 건축을-그러나 상반된 관점으로-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재화가 제자인 구보승이 자기와 닮았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 것과 반대로 <우호적 감정>의 수잔, 스타트업에서 시니어급인 그녀는 주니어급인 동료 알렉스가 사회초년생 시절 열정 넘치던 자신과 닮았다는 걸 바로 안다. 대표인 맥스보다 나이가 한참 많고 뒤늦게 스카웃 되어 팀에 잘 섞이지 못하는 시니어급 동료 진을 포용하려고 애쓰는 알렉스를 보며 동료 수잔은 자신도 사회초년생 때 모두를 포용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그 말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진은 스타트업의 규칙을 저버리는 발언을 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수잔은 회사를 관둔다. 알렉스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부장이었던 진이 수잔이 나간 뒤의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하는 모습과 거기에 최대한 맞춰주려는 대표 맥스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수잔이 느꼈던 감각들이 이제 알렉스에게도 찾아올 거라는 징조처럼 보인다.

발표 시기상으로 가장 마지막인 <스무드>는 닮음에 있어 다른 소설들과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인 듀이와 태극기 부대원인 미스터 김은 서로를 보며 각자의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정을 붙인다. 게다가 그 정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관심, 반성으로까지 뻗어가는데… 서로 너무 다른데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깨끗하게 화합하는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낯선데, 독자인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빠진 상태에서 너무 다른 지점에 놓인 인물들의 매끈한 연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이해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오독도 정독도 필요한 듯이 느껴진다. 오독도 정독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소설이다. 그래서 독특하다.

마지막에 실린 <메탈>도 닮음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서정적이기도 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학교 동아리에서 메탈음악으로 맺어지고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꽃 핀 시우, 조현, 우림의 ‘코발트’적인 우정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하는 과정은 닮음의 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애정하는 사람만이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모습은 뭉클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어떤 열정은 길어지다보면 고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집 같은 열정마저 사라지면 헛헛함에 삶의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지니 일단 계속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림의 메탈에 대한 애정은 열정이었을까 고집이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또. 십대의 우정이란 타임캡슐 같다. 인상적인 순간과 장면들에 더불어 미래에 꺼내볼 많은 약속들이 거기에 있다. 우림이 마지막에 조현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때의 타임캡슐을 찾아 땅을 파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녹슬었더라도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성격이 워낙 다른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이 작가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독자로서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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