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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소설집 <바깥은 여름> 이후 8년만에 출간된 김애란의 소설집. 8년 전, 처음으로 문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 인터넷 서점을 살피며 엄선한 소설집이 <바깥은 여름>이었는데, 그로부터 어느새 8년이 흘렀다. 8년이란 시간이 나에게 무언갈 건네줌과 동시에 또 무언갈 거둬갔듯이, 작가도 8년 동안 시간한테서 무언갈 받고 무언갈 건넸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시간과 끊임없이 맞바꾸며,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써나간 글들이 모인 이번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8년 내내 미뤄둔 숙제를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숙제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겠지만, 나는 왠지 거기에 파묻히고 싶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 숙제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입동>에서 벽지가 더럽혀질 때 느꼈던 처참함, <노찬성과 에반>의 출구 없는 기분, <건너편>의 마무리에서 쿵 내려앉는 느낌, <가리는 손>의 배덕감 등 세상의 교묘한 논리를 서글프게 짚어내는 정확성에 놀라 두 뺨이 얼얼해지는 순간들이, 그와 동시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세상의 구석구석들이, 그렇게 소설이 정밀하게 세공해준 삶의 렌즈가 나에겐 소중하기도 했다.
이번 소설집 띠지에 적힌 ‘사회학자’란 말을 봐버렸기 때문에 사회학의 느낌으로 이번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사회학이란 사회를 비판하더라도 냉소하지 않고 사회가 가야할 길을 찾아내는 학문인 것처럼 이번 소설집의 이야기들도 얼얼함을 넘어 서늘할 정도로 사회의 비틀림을 짚어내는 동시에 외로운 인간에 대한 연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김애란의 사회학은 집에서 시작한다. 안정과 형편을 동시에 함축하는 집이 소설에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거나 주인공이 타인으로 입장하며 소설은 거주지에서 드러나는 계‘급’의 차이가 ‘종’의 차이가 되는 것 같은 사회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낸다.
코로나 기간 동안 발표된 앞의 네 소설(<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은 그 점에 있어서 상당히 정확하고 날카롭다. 전염병이 인간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비가시적으로 초연결을 초래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자본주의의 계급성을 지적하고 있다.
<홈 파티>는 후배 ‘성민’의 초대로 잘 사는 그들의 세계와 역할을 조사하러 ‘오대표’의 홈 파티에 간 연기자 ‘이연’이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연기를 해보이는 반전을 보여준다. 홈파티에 초대한 오대표의 계산서에 이연이 정확히 들어맞은 사람으로 판명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이 무엇인지 이연은 알 수 없다. 이연은 간파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간파당한 위치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연기,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 연인처럼 달뜬’(p.43) 연기를 펼쳐보인다.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p.42)의 그림이 그렇게 이연의 연기로 완성된다. 그것이 아무리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어도 이연은 수정을 가할 수가 없다.
<숲속 작은 집>은 <홈 파티>와 여러모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물가가 한국보다 세 배는 싼 외국 산악도시에 한 달 간 머물기로 한 ‘은주’ ‘지호’ 부부. 한국에서는 꿈꿔볼 수 없는 단독주택(교외에 위치한)에 머물게 됐으니 행복할 거란 예상과 달리, 주택을 청소하는 현지인 여성과 팁 문제로 갈등(내적 갈등)하면서 예상치 못한 불편이 생겨난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 소설은 중산층이 상류층을 보며 느끼는 것들이 서술된다면, 여기선 그 반대로 중산층이 하층민에게 느끼는 것들이 서술되고 있다.
팁을 주지 않아서 집의 몇몇 물건을 일부러 정리하지 않은 건가 싶어진 은주는 외출 때마다 팁을 놓고가 최대한 현지인 여성에게 성의를 보이려 하나, 집에 돌아와도 흐트러짐 없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팁이 은주를 괴롭힌다. 팁에다가 현지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떠난 날부터 팁이 없어져 이 방식이 통한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은주는 이런 생각에 몰두하고 눈치를 보는 자신이 답답하다.
은주가 주택을 청소하는 현지인 여성에게 팁을 주며 메모에 현지어로 적은 ‘감사합니다’와, 은주 엄마가 은주에게 이번 달 용돈이 들어오지 않은 걸 슬며시 언급하며 덧붙이는 ‘고마워’와, 여행 막바지의 어느 날 은주 지호가 외출한 사이 그들이 기념품 가게에서 사서 집에 두었던 작은 집 모형이 없어진 것 때문에 그곳을 떠나던 날 은주가 팁과 함께 두고 가려다 결국 주머니에 구겨넣어버린 쪽지에 적힌 ‘감사합니다’, 청소하는 여성의 딸이 단독주택에서 없어진 기념품과 비슷한 모형을 구해 건네주며 자기가 단독주택을 청소하다 작은 집 모형을 깨뜨린 사연을 적은 엽서 말미에 유일하게 현지어로 적혀있는 ‘감사합니다’를 거치며 은주는 ‘언젠가 내가 상대에게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p.86)을 느끼는 것처럼 ’감사합니다‘를 한쪽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 주었다 뺏을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게 된다. 상호 우호적으로 주고받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돈과 직접적으로 붙으면서(팁에는 감사합니다란 메모가, 용돈 얘기에는 고마워라는 문자가) 상호 호혜적으로 뒤바뀌는데, 그런 ‘감사’의 교환은 계급과 세대, 언어라는 필터를 거칠수록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못해 속물성과 더불어 도덕적인 상실감까지 안겨버린다. 이 소설이 인상적인 건 은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민감성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 이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들-현지인 여성과 그 딸의 관계, 그들의 삶-이 있어서다. 그것들이 이 소설을 징후적으로 읽게 만든다.
<좋은 이웃>은 도덕적인 상실감이 강조되는 소설이다. 당장 내년 봄에 짐을 빼야 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남편 ‘준호’와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고 줄여나가고 있지만,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노동 가치와 화폐 가치의 하락, 전염병 상황 등으로 인해 매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고 찾아와 인테리어 공사 양해를 구하는 윗층의 젊은 신혼부부에게 ‘나’는 미묘한 열등감을 느끼는데, 그것이 발화점이었는지 독서지도사인 자신이 유일하게 직접 집에 찾아가 가르치던 장애학생 ‘시우’, 형편이 어려워 보이던 그 아이의 가족이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시우 어머니로부터 수업을 이어가달라고 부탁받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때문인지 일을 관둔다. 그런 열등감의 중첩 사이에 낀 ‘나’의 입장이, 남편 준호의 입을 통해 중년 중산층의 곤란함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결국 이렇게 된 거 아닐까?”, “내가 탐욕을 부리거나 투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저 좀 생존하겠다는 건데. 가진 사람들은 세금 몇 푼에도 펄쩍 뛰고 피해자가 되지 못해 안달인데, 정작 사다리에서 튕겨나간 나는 좀 속상해하면 안 돼?”(p.121)
모두가 살기 어려워진 시대에 ‘사회 초년생도 신혼부부도 아닌, ’성장‘과 ’단계‘를 조금이나마 맛본, 이제 중년에 접어든 부부’(p.108)는 노년세대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세대인 동시에 신세대로부턴 과거의 온갖 특혜를 수혜했다며 미움을 받는 세대다. 고립과 미움의 시선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던, 되고 싶었던 마음조차 빼앗아가버리고 만다. 그들이 아무리 젊은 시절 ‘난장이’로 사회를 배웠다고 해도.
<이물감>은 그런 중년세대의 박탈감과 그 박탈감을 다른 관계로 뒤집고자 하는 속물성이 대두되는 소설이다. 앞서 집으로 드러나던 계급성은 이 소설에서 되새김질 증상을 겪는 십오 년 차 은행원 ‘기태’로 인해 먹고 마신 것들을 소화시키고 배출시키는 내장기관으로 뒤바뀐다. 계급이 종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 계급의 ‘체화’를 기태는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 인물이다.
그런 기태는 또한 외롭다. 외로워서 젊은이들이 한다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지만 뷔페에서 다양한 음식을 구경하듯이 인스타그램 세상을 탐색하면서 문득 외로워지고, 그러다 낯설고 다채로운 세상에서 익숙한 무언갈 골라내듯이 검색창에 몇 년 전 이혼했던 아내 ‘희주’를 검색하고 계정을 살피며 또 외로워진다. 그녀와 친근해 보이는 남자 ‘차대표’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외로움의 근원은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던 희주와 보냈던 시절, ’맑은 몸과 마음으로 상대에게 진지하게 몰두했던 때, 몸의 불편을 몰라 몸을 잊고 몸에 집중했던 때, 육체의 욕구와 마음의 욕구가 거의 일치했던 때, 그런데 그 상대가 서로라서 더 좋았던 때.‘(p.155~156)가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가는 듯한 지금의 희주를 보면 볼수록 그때의 시절이 더 희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태는 파트너 ‘지수’가 있지만 더이상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부하 직원들과 ‘노후 얘기’, ‘돈 얘기’를 하면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가지는 적의를 읽고, 삶을 돌이키다 자신이 젊은 시절, 중년이 된다면 얻게 될 거라 여겼던 막연하지만 확고한 위치를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p.175) 생각하고, 역류성 식도염 진단을 받은 뒤론 ‘식도에서 뭐가 거꾸로 올라올 때마다 자신이 마치 부패중인 인간처럼‘(p.162) 느끼며, 약을 먹어도 브로콜리즙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증상과 식사 후에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킨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p.176)
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희주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기태는 희주에게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자 결국 차대표의 이탈리아 비스트로 보스꼬에 ‘손님으로’ 찾아간다. 실물을 보기 전에는 막연히 ‘라스푸틴’ 같다고 생각했던 차대표를 기태 스스로가 사회 경험으로 고안했던 ‘내장의 관상’(p.179) 관점으로 관찰하다 열등감을 느낀 기태는 음식을 남기지만 정중한 태도로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숱하게 보아온 교묘하게 불만의 암호를 보이는 손님을 연기함으로써 ‘알량한 승리감’(p.186)을 맛본다. 그러나 그런 손님을 흉내 냈는데도 스스로가 불쾌해지고 속물적이다 못해 짐승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몸도 마음도 진심도 없는 사람이 된 거 같은 건 왜일까.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계급의 대차대조표의 명확한 구분선이 두드러질수록 그걸 인식하는 인간을 속물적으로 만든다면, 나이 들어가며 더 예민하게 느끼고 감각하게 된 외로움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물감>의 기태는 그런 속물성과 나약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자, 7편의 소설 가운데 놓여 소설집의 흐름이 사회학이 자본주의를 파고들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외로움으로 향하리라 예감하게 한다.
<레몬케이크>는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이야기로, 일을 그만두고 ‘여행 전문 책방’을 운영하며 경영난 때문에 가벼운 알코올의존증을 갖게 된 ‘기진’이 재미삼아 해본 알코올의존증 자가 진단표와 건강검진 차 병원에 들렀던 엄마 ‘선주’가 받은 우울감과 인지기능 검사지를 소설의 앞뒤에 배치함으로써 그들이 만난 오늘 하루가 어떤 하루였는지를 보여준다.
인지기능이 부쩍 안 좋아진 엄마 선주를 데리고 정기 건강검진을 도는 일상적인 하루가, 기진이 좋아하던 서인주 작가의 북토크 행사와 겹치면서 기진은 조급하게 엄마와의 일상을 치러내며 엄마와 자신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기진이 엄마 선주를 보고 놀라는 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엄마 선주가, 이제는 한국어도 잘 못 알아들어 기진의 통역이 필요한 선주가, 이명과 난청을 겪기 시작하며 인지기능이 나빠져 요양병원으로 들어간 남편 ‘경수’처럼 그 자신도 이명 증세를 겪기 시작한 선주가, ‘여전히 옷'과 멋'에 욕망을 드러내는 눈동자를 천천히 덮었다 열었다’(p.193)하는 사람이자, 맨정신으로 조금도 취하지 않고 하루를 견디는 사람, 딸에게 복권을 샀다고 자랑하며 용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점,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레 양립하는’(p.212~213)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p.214)
서인주 작가의 아버지가 작고해서 북토크를 취소하고 텅 빈 책방에 앉아 축하기념으로 사온 레몬케이크를 꺼내 촛불에 불을 붙이지만 소원 하나 빌지 못하는 기진에게 그 하루는 삶의 지난함을 느끼는 동시에 타인의 삶에 무관심했던 것이 의아해지는 하루로 뒤바뀐다. 그 옆에 놓인 ‘좋은 날’에 마시려고 사둔 샴페인 겉에 뭍어난 물기를 보며 기진은 저걸 마실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건 오늘을 감내할지 오늘을 흘려보낼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기로에 선 기진과 달리 오늘을, 하루하루를 흘려보낸 사람은 다음 소설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 ‘은미’일 것이다. 칠 년 전, ‘헌수’와 동거하며 ‘다음 단계’까지 고려했으나 엄마의 간병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일도 그만두고 헌수와도 이별하고 엄마도 잃고 다리를 다쳐서 수술까지 해 방에 머물러야 했던 은미는 언젠간 이곳을 떠날 생각(혹은 착각)으로 ‘에코스’로 화상영어 학습을 하기 시작한다.
은미는 거기서 만난 선생 ‘로버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은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노동 앞에서 어떤 격식과 약속을 지키’(p.232)고 ‘온갖 풍부한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p.235)을 가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가 아버지와 이별하게 됐을 때는 위로를 건네며 동질감을 느낀다. 그와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수업’말고 그냥 ’대화‘를 나누면서 이 헤어짐이, ‘이별만큼 흔한 게 없는’(p.241) 이곳에서의 이 무겁지 않은 이별이 아쉽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세계가 쪼그라들’듯이 고립되어가며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p.254)던 은미의 외로운 지금을, 로버트가 잠시나마 함께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미의 그런 깨달음은 로버트가 이 마지막 수업 초반에 한국어로 안녕을 뭐라고 부르는지 물었을 때, 은미가 칠 년 전, 헌수와 <러브 허츠>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가사를 들었다고 오해한 일을 떠올린 것에서 비롯된다. 오랜 시간 부모를 간병하며 ‘나와 같은 고독을 겪’(p.252)었으나 노래의 그 부분을 ‘안녕’이 아니라 ‘I’m young(암 영)’으로 바로 들었던 세 살 연하의 헌수와, ‘젊다’는 걸 전혀 듣지 못했던 자신, 그들 사이에서 울린 전화벨처럼 급작스레 시작된 관계의 파열음, 지지부진 했던 이별과, 한참 후에 그때 안녕이 맞다고 동조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술취한 헌수의 사과까지, 그렇게 해서라도 헌수가 젊음이 가진 정확함을 번복하고 일부러 틀리려고 수정까지 하면서 전했던 ‘안녕’이란 말을 은미는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로버트와의 마지막 순간, 온전한 이해를 바라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그런 말들에서도 일어나는 손실을 염려하는 대신, 언어의 고립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해준 로버트에게 지금까지 습득한 언어적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안녕’을 건넨 것이다. 은미가 로버트에게 새로 알려준, 한국어의 ‘안녕’에 담긴 ‘평안하라’는 뜻은 이별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별의 정확한 마침표가 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내몰린 사람, 가장 이별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소설 <빗방울처럼>의 주인공 ‘지수’일 것이다. 전자제품 설치 기사이자 성실하고 조용한 남자인 ‘준호’를 만나 결혼하고 전세 계약으로 방 세 개짜리 신축빌라이자 ‘거실 창 너머 무성한 초록’(p.260)이 보이는 ‘은성빌라’에 입주한 데다 ‘신혼부부 특별 공급 청약’(p.265)에도 당첨되며 ‘앞으로의 삶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p.287)로 살던 지수는 전세 사기를 당해 청약을 포기하고 빚을 져가며 은성빌라를 낙찰받는 데다가, 대출금을 갚기 위해 과로하던 준호가 죽게 되어 이 집에 혼자 남겨진다. 안방 천장의 누수 소리, 마치 빗방울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가만히 듣던 지수는 그 빗방울 소리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고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다. 독서교실 방문 교사 일을 이번달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연락을 돌린 지수는 안방의 누수 현상을 고친 뒤 마지막으로 사람을 불러 벽지 도배를 마치고서 남편을 따라갈 생각이다.
그러나 도배가 끝난 후 혼자가 된 지수는 말끔해진 벽을 보며 ‘뜻밖의 상실감’(p.292)을 느낀다. 그러다 수호의 방이 열려있는 걸 보며 의아해하다가 도배를 하러 왔던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떠올리고 그녀가 안방의 석고보드 교체 때문에 뜯겨져 있던 벽지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p.262)라 물었던 것을 곱씹는다.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p.294) 깨닫는다. 아마 그것과 동시에 지수는 그 여성의 정중한 말투와 농담, 그녀가 고향의 엄마와 현지어로 통화하고 자식인 ‘아린’에게는 엄하게 말하는 걸 건너 들었던 것, 또 그 아린이가 독서교실 방문 교사인 지수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선생까지 챙겨주려고 했던 ’아린‘과 같은 아이일까 잠시 궁금해했던 것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같은 쪽)는데, 그 순간 듣고 만다. 더 이상 들릴 리 없는 그 빗방울 소리와, 거기에 담긴, 지수는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어떤 목소리를. 전에는 ‘툭-/해/투두둑 툭-/할 수 있어/툭툭-/그럼 끝나’(p.280~281)으로 들렸으나 지금은 ‘툭-/안 돼/투두둑-/하지 마/투둑 투둑-/안 돼/툭-/살아’(p.293)로 들리는 그 빗방울 소리를. 세상과의 이별의 마침표가 되려던 빗방울은 지수의 눈물이 되어, 그 마침표를 찍으려던 지수의 마음을 흐려놓는다. 모질게 세상과 이별하려던 지수는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온다. 다시 비가 되기 위해 지상의 웅덩이로, 구석진 곳으로 떨어지고 모여드는 빗방울처럼.
이런 소설, 말하자면 고통과 적의, 각박함과 힘겨움, 슬픔과 외로움이 정확하게 담긴 소설을 볼 때마다 그 감정에 침잠하고 연민하고 공감하고 무력해지면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치 눈물이 배어나듯 불쑥 생겨나는 것은 왜일까. 읽을 때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지다가도 다 읽고 나면 다시 삶과 가까워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아무래도 이런 서글픈 방식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게 삶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기쁨과 달리 슬픔만이 터득하게 하는 삶의 진실들이 있으며, 그건 기쁨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기쁨은 만끽하면 그만이지만 슬픔은 삶을 지배하는 위력이 강한 만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해서. 그것이 김애란이 정밀한사회학으로 말하고 싶은 문학이 아닐까 싶다. 김애란의 이번 소설집은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시작해 인간과 인간 삶을 들여다보며 슬픔의 진실을 또 한 번 갱신하는 소설집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