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 밖은 안녕
이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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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신작 단편집. 작년에 그의 단편 <괄호 밖은 안녕>, <여름 손님입니까>, <이소중입니다>를 연달아 인상 깊게 보고서 소설집이 언제 나오나 기다렸다.

내가 이주혜 작가의 단편을 인상 깊게 본 건 서사의 방대함 때문이다. 단편을 읽은 건데 마치 장편을 읽은 것 같은 개운한 인상을 받으면서 이 작가에게는 서사를 짜는 내공이 있다는 걸 느꼈던 데다, 그 서사가 현재의 화자에게 주는 울림과 내가 공명했기에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그 요소에 매료되면서 내가 놓쳤던 건 대부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8편의 소설 중 6편이나 다 어딘가로 떠나면서 시작되고 있다(공간의 이동이 드러나지 않는 2편은 <초록 비가 내리는 집>, <순영, 일월 육일 어때>다). 게다가 <할리와 로사>는 전주를, <이소 중입니다>는 육지 끝을 가는 걸 제외하면 모두 일본이다(<안개의 기분>은 홋카이도의 구시로, <여름 손님입니까>는 일본 어딘가, <괄호 밖은 안녕>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맘껏 슬픈 사람>은 홋카이도의 샤코탄반도다). 작가가 일본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옆나라 일본은 영어권 번역가이기도 한 이주혜 작가(의 화자)에게 해석의 의무를 덜어주는 공간으로 기능한다(반대로 나는 오래전 상하이에 갔을 때 가이드 없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끌벅적한 시장 거리에 서 있다 문득 이렇게 혼자가 되는 걸까 두려운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는데, 그런 걸 보면 나는 지금의 나로서도 해석 가능한 공간에 있고 싶어하는 체질인 것 같다).

하지만 표제작에서 그러하듯 해석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국(공간의 이국일 때도 있지만, 과거 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인 ‘시간’의 이국일 때도 있다)에서 과거 기억이 되살아나 재해석을 요구해 화자를 괴롭게 한다. 기억은 마치 왼쪽에 쓰인 문장이 책을 덮으면 오른쪽에 맞닿는 것처럼 현재에 덮어씌워지면서 과거를 다시 읽길 촉구한다. 결국 읽어야 한다. 번역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뒤섞이고 만다. 출발과 도착이 뒤엉켜 디딜 곳 없는 바다 혹은 하늘에서 고립되고 만다. 이런 위기가 찾아온 것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과거의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소설 내에서 과거에 발목 잡히게 되고, 그렇게 번역이 시작된다.

그 과거로 꺾어지는 길목, 커브에는 낯선 존재가 기다리고 있다. 그 존재는 화자가 시간이라는 압력에 밀려 현재에 메어 있던 구속을 풀어내며 과거로 자유자재 이동하게 한다. 모자관계인 은재씨와 민해에게 성이 같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슴 키리가 그렇고(<안개의 기분>), 호텔에 찾아와 목욕탕을 안내하는 할머니와 결혼식장을 안내하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그렇고(<여름 손님입니까>), 산의 커브길에 주저 앉아 있었던 바디랭귀지를 잘하는 맨발의 여자가(<괄호 밖은 안녕>), 돌보는 사람이 세상을 뜨자 곰팡이가 피어가는 백 개의 화분이 그렇다(<초록 비가 내리는 집>).

익숙한 존재가 낯선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 민해에게는 죽은 척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은 것 같이 눈을 감고 평온해 보이는 은재씨가(<안개의 기분>), 하민지에게는 손님인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 이제는 여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초대한 또 하나의 엄마 같은 존재 양영란 언니가(<여름 손님입니까>), 하코다테를 찾은 번역가에게는 십이년 전 겨울 이곳에 같이 왔던 남편 석우와 딸 여준이, 그리고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육층 여자가(<괄호 밖은 안녕>), 조수석에는 시인을 뒷자리에는 소설가를 태우고 운전대를 잡은 번역가에게는 암 투병 후 육지 끝에 집을 짓고 그들을 초대한 철학자가(<이소중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양순덕 씨에게는 평생 남편에게 얽매여 살았던 자기 자신이,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했다가 유언장에 적힌 명료하면서도 섬뜩한 문장을 보고 악몽을 꾸게 된 남편 박천일 씨에게는 아내 양순덕 씨가, 학계에서 입지를 잘 다져오다가 폭력을 업은 권력에 의해 궤도 밖으로 밀려난 손우정 씨에게는 고고학자로서의 열정이 넘쳤던 과거 자기 자신이(<초록 비가 내리는 집>), 할리에게는 진주를 제 집처럼 안내하고 무언갈 보여주려 했던 로사가(<할리와 로사>), 너에게 외로움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밉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던, 이제는 낯선 곳에서 자기를 안내해주는 아들 윤이, 그리고 윤을 미워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던 그러면서도 자기를 사랑했던 엄마가(<맘껏 슬픈 사람>), 수은에게는 언니로 불리기를 거절했던 동경했으나 미워하면서 멀어졌고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순영 언니가 그렇다(<순영, 일월 육일 어때>).

(익숙한 존재든 낯선 존재든 간에) 화자가 그들을 통해 마주하는 과거의 낯섦은 현재에 느끼는 낯섦, 고립감과 연결되어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얽히고설킨 것들이 와해되면서 위안과 미소를 안겨주기도 한다. 경험할 때도 미지였던 기억이, 번역도 해석도 되지 않은 채 마구 퇴적되어버린 시간이 어떻게 지금 풀어질 수 있었을까. 지금의 몸이 지나간 기억을 다시 체험했기 때문이다. 마치 바디랭귀지를 통해 언어 없이 즉각 번역이 되는 것과 같이, 그래서 희곡 지문이 대본에는 괄호 속에 묶여 있지만 상연 중에 말보다 더 빠르게 전달될 수 있듯이, 몸이 곡진한 서사를 다시금 체험함으로써 재해석 재번역하는 것이다. 특히 소설은 화자가 겪는 이야기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도 읽으면서 어느새 공명하게 되는데, 그 기묘한 진리는 인간의 몸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비롯된다(몸은 언어보다 훨씬 본질적인 조건이니까). 소설 내에 인용되는 책과 작가들은 화자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명하는 존재임을, 몸으로 체험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섬세한 언어를 포섭하지 못하고 서투른 몸짓만 담을 수 있는 괄호를 통해서 언어로도 표현불가능한 이해불가능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는 나에게 쥐어진 도구가 없더라도 맨몸으로도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도구는 부차적인 것이며 삶이란 몸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그렇게 과거가 풀어지며 이 순간에 도착한다. 출입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는지 보는 순간,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을 떠나는 순간, 숙소에서 어떤 존재에게 안녕을 건네는 순간, 시간이 무심히 내일로 걸어갈 순간, 바깥의 화분들이 전날의 폭풍우를 잘 견뎌냈을지 궁금해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한의원에 누워 나란히 치료를 받으며 가능한 한 낯선 점심을 고민하는 순간, 괜찮지 않으나 외롭지 않은 순간, 다시 만난다면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며 본명으로 편지를 적는 순간. 즉 안녕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는 많은 말 대신 안녕이란 한마디만 해도 충분하다. 너무나 많은 원망과 미움과 오해의 말을 쏟아낸 그때(출발지)로부터 무척이나 멀어진 마지막(도착지) 순간, 서로에게 건네는 안녕이란 말 앞에 놓일 괄호 속을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다면 기꺼워지자. 안녕을 마주하고 또다른 안녕을 만나러 가자. 맘껏 슬퍼할 수 있는 자가 되고 또 맘껏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자.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보자.

+ <이소중입니다>의 해학은 다시 읽어도 훌륭했고(이런 미래형 문법의 소설을 좀 더 보고 싶다), 인물이 바뀌며 전개되는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은 영화 <침묵의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산뜻함이 있었으며, <할리와 로사>는 나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따듯하고 푸근하고 웃음 짓게 하는 소설이었며, <맘껏 슬픈 사람>은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는 존재인데도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두고두고 읽고 싶은 단편이었다. 소설 안에 NLPD 후일담 이야기, 싱글맘, 재일한국인 이야기, 여성 문학 이야기, 교수 성폭력 문제, 중국인 혐오 문제 등도 담겨 있어서 현재와 여러 방면으로 고루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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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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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 세 개가 떨어지다 / 김채원

사촌 혜임과 나가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한다. 세 달 째 연락이 되지 않는 할아버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러. 다행히 할아버지는 살아 있었고, 그것도 잘 살아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종묘원이라는 온실을 가꾸느라 그런 듯 보인다. 그런데 그 온실에서 마주한 건… 다름 아닌 죽은 누군가의 발이다.
마치 방학을 맞아 정겨운 시골로 떠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중반까지는). 중반에 이르러 죽음이 급작스레 등장하는데, 그럼에도 소설이 무거워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작가가 무거워지지 않게 소설을 떠받치고 있구나, 싶었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목격한 죽음과 할아버지가 그 시신을 발견된 거기에 묻어주려 했던 이유가 묘하게 얽히는 한편, 나와 혜임의 관계(한 명이 말하면 한 명이 맞장구 쳐주는, 한 명이 눈을 뜨면 한 명이 눈을 감는)와 나의 태평하면서도 다정한 상상력(식물과 빛과 그림자의 살아있음)이 곁들여져서 별과 모과와 땅(죽음)이라는 자연의 순환(이해할 순 없지만 들여다보게 되는)을 보여준다. 짧아서 아쉽지만(혜임과 나의 관계성을 더 반복적으로 파고들었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 이야기를 비틀어서 보려는 풍경이 자못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소설 읽으면서 내가 쉬고 있다는 느낌을 간만에 받았다.

2. 추도 / 길란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수습하는 방식, 그 죽음과 다른 사람의 죽음이 자본의 지표에 의해 무게가 갈린다는 것, 그리하여 어떤 죽음은 계속해서 사랑받고 어떤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면받는다는 것 등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얄팍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저기 배치한 많은 소재들이 얽히면서 풀어낼 수 있는 모순과 갈등의 부피(사건)가 충분한데도, 브레이크를 밟아 추도하는 장면으로-죽음은 형언할 수 없다는 의미를-찍어누르듯 마무리해서 아쉬웠다. 백모가 와인 한 잔을 하고 아들 이삭이 죽은 그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장면의 긴장감이 상당했는데, 그러곤 아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버려서 편집된 건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백모의 영상을 찍어주게 된 전모가 이 소설의 핵심이자 전부인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사연이 조금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백모의 집이 주 공간인데 잠깐 들른 장소처럼 다뤄진 느낌도 있었고 인물도 내면을 포착할 수 없었다(변화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라 재확인을 보여주는 소설이라서). 그럼에도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다른 단편들도 더 읽어봐야 할 듯하다.

3. 나는 야구를 사랑해 / 남의현

제목이 나에겐 진입장벽이었으나(야구에 미친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나 나는 야구-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이야기가 나를 허물어 뜨렸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젊은’이라는 호칭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숙모네 집에서 자라는 ‘’나의 이야기는 숙모의 아들과 나의 단짝인 민희와 민희가 좋아하는 야구와 얽히면서 사랑과 돌봄, 사랑의 이면인 폭력과 사랑으로 건강해야 할 삶(과 성장)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이 떠오르면서, 단편임에도 부피가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가장 독특한 점은 소설에서 시의 리듬감이 있다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연결을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으로 이어지는 문장과 이미지들을(새와 눈과 캐치볼과 촛불) 보며 이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히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내 등장하는 소설 제목도 심상치 않다. <오렌지와 놀이와 오렌지 놀이>. 다른 소설도 이런 톤일지가 궁금해진다.

4. 히데오 / 서장원

대학 시절을 회고하는 소설은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종류의 소설이다. 예술대학 학생인 화자 ‘수진’과 ‘히데오’(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의 관계가 그들이 준비하는 연극 <따귀 게임>으로 돈독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수진은 히데오의 비밀-그가 과거 겪은 차별과 폭력, 그것에 대한 복수심에서 흘러나오는 연기의 진정성을 본다. 히데오의 그런 비밀과 비밀스러운 성격은 수진이 전에 만난 영도와는 영 딴 판이다(수진 같은 사람이 영도를 만난 게, 얼마간 그를 견뎠다는 게 좀 대단하다). 관찰자적인 마무리가 무난해서 어디서 본 거 같은 인상을 받긴 했지만 재미있었다는 건 부정 못하겠다. 비밀을 들려주는 이와 비밀을 듣는 청자(그 비밀은 어느 정체성이든 주류 집단에 비해 소수거나 타자에 가까울수록 폭력에 노출되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라는 관계성은 그 비밀이 주류가 되어 모두에게 스스럼 없이 공개되면서 원래부터 없었던 듯 사라진다. 왜인지 씁쓸한 한편 기묘하다(히데오의 한국어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는 점에서도).

5. 귀신이 없는 집 / 위수정

‘크로스드레서’(여장 남자)라는 파격적인 소재와 너무 잘 읽히는 문장력이 볼만 했던 소설이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눈과 돌멩이>에서도 크로스드레서가 등장한다길래 서로 연관이 있을까 싶어 먼저 읽었는데 연관이 딱히 있진 않았다. 놀라운 건 두 소설의 톤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하여튼 이 소설은 크로스드레서이자 기러기 아빠인 ‘재원’이 크로스드레서 카페에서 코요라는 인물과 연락해 할로윈데이에 홍대 거리를 걸어보려는 내용이다. 그는 크로스드레서이긴 하지만 집에서 입어보고 아내와 공유하는 정도(여장하는 모습이 하도 비밀스러워서 아내도 이해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이며 바깥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정체성을 실감하면서도 현실이 보고 싶어하는 정체성이 아니라는 판단에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부풀어가는 내면과 들이밀어지는 현실 그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앞집 남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만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내어 여장을 하고 길거리를 다니기로 한 건, 열심히 활동라는 코요를 본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좀 반하기도 했다), 시드니에서 종종 영상통화를 하는 아내 상미가 곧 돌아갈 거기도 하고 딸아이 세라도 크고 있으니 이젠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서이기도 하다(어쩌면 마지막 기회). 결국 코요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한 순간의 충동이 아닌 중요한 결심이 된다. 하지만 막상 코요와 술집에서 만나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 후 길거리에 나가서는 더 큰 혼란이 찾아온다(재원 또한 매혹과 혐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둘 다를 느끼던 사람이었다). 코요라는 이름에 얽힌 설화처럼 집에 혼자 남아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나는 한 인간의 외로움을 보았다. 타인의 시선이 정말이지 폭력적이며 그 때문에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한다.

6. 일일야성 / 이미상

남편 경수가 갑자기 페미니스트를 선언하고 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아내에게 정성껏 마사지를 해주며, 내가 깨달았으니 아내가 보인 그동안의 악한 것도 끌어안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펼쳐지는 익살극, 풍자극일 줄 알았는데 아내 운주와 친구 선숙이 겪은 오래전의 우정과 현실의 간극, ‘노스탤지어의 캠프파이어’의 시도와 실패, 그때와 지금의 몸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편에서 아내로의 이야기 선회가 조금 산만한 감이 있었으나 이미상 작가 특유의 신랄한 감성은 여전하다(<옮겨붙은 소망>도 그렇고 요즘은 부부관계를 주로 쓰시는 듯하다). 하루 동안 야성을 되찾는 일일야성 캠페인은 육체적 자유가 아닌 육체의 한계(폭력, 노화, 노동)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운주가 남편을 못 견디고 선숙의 집으로 가서 지내는 하룻밤 동안 쏟아내는 회상이 재미있는데(계급과 폭력을 낱낱이 보여준다), 시간의 야속함과 인간의 잔혹함, 인간의 연약함을 떠오르게 한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이것도 역시 좀 더 길었으면 싶었던 단편이다.

7.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 함윤이

강원도 소도시 면사무소 공무원 노아가 박녹원 주사와 함께 천문대에 자리잡은 사이비 신도들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 이야기적 선명도를 일부러 흐리게 하면서 노아라는 이름과, 천문대에서는 그 이름을 감춰야 했던 것, 그 이름을 지어준 엄마의 이름 정선화를 가명으로 쓴 것, 그런데 마침 그 이름이 신도를 이끄는 여성의 이름과 같았던 것 등에 이야기 힘을 쏟는다. 그들이 떠나기 전날 밤의 종교 행사에 노아를 초대했던 이유가, 실은 노아를 적으로 생각해서였으며 적이 와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믿음 하에 불 지르는 의식을 치렀던 것이 드러나면서 기묘한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경찰 소방관들이 개입하면서 식는다. 노아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것도, 직장에서는 부적응자처럼 보이던 박녹원이 천문대에 가서는 편안한 얼굴이 된다는 것도, 불을 피우자 독수리들이 모이는 것도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안개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할 듯한데, 그 모호함이 구체성에서 뒤로 한발짝 물러난 모호함 같아서(처음 천문대에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그 집단이 벌이는 일에 관한 민원에 대한 경고와 그 집단에 대한 의심 말고는 큰 의미로 자리잡지 못했다) 독자들이 붙잡고 이 이야기를 지켜볼 터가 없는 듯해 아쉬웠다. 작가노트에서 이 적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잘 썼다고 생각드는 작품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좋은 작품, 마음에 와닿고 기억에 남을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소설 읽기에 무뎌져서도 있을 테고, 장편에 익숙해져서 단편의 맛이 영 아쉬워진 것도 있을 테다. 단편 미학이 잘 드러난 한국 문학을 더 찾아봐야 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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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원만 빌려줘 트리플 36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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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 작가님의 연작소설집. 전작 <밤은 내가 가질게>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가 그랬듯이,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뜨거운 무언갈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울컥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 화자가 자신이 처한 불행에 동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날카롭게 현실의 규모와 세부를 파고들뿐더러, 그 과정에서 비겁함, 무지 같은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소설집은 타자에 대한 섣부른 이해의 오만함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우리’가 아닌 ‘각자’로서의 연대, 생존을 이야기한다.

처음 실린 표제작 <이만 원만 빌려줘>는 ‘김동주’의 유괴 사건과 그 후의 자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동주와 같이 자살을 시도했지만 김동주의 마지막 선택으로 살아남은 여성 인물(두 번째 소설 <(알수없음)>에서 죽은 ‘이서’로 추정된다)의 증언은 앞서 언급한 이 소설집의 주제에 운을 띄우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이만 원은 ‘수치심’으로 작용하는데 당사자의 반응과 외부 사람들의 반응이 상극이다. 이만 원이라는 돈이 세상에서 소용되는 가치 때문이다. 그 돈으로 김동주는 자신이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친구,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는 걸 마지막에서야 깨닫게 한 친구 ‘순호’가 자살하기 전에 그러려 했듯이(“이만 원만 빌려줘.”) 만두전골을 사 먹으려 했었다. 하지만 경찰과 대중은 그런 사연은 알지 못한 채(이 모든 증언을 듣는 건 작가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이만 원이 아이의 목숨값이라기엔 터무니없는 협상금이라고만 피상적으로 생각하며 당황하거나 분노한다. 마치 유괴된 아이의 무사 복귀라는 과업이 이만 원이라는 돈을 매개로 말끔히 완수됐다는 듯, 거기에 남은 잉여, 그가 왜 하필 이만 원을 요구했을까, 라는 여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가해자라면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든 간에 들여다보기를 일절 거부하겠다는 도덕적인 터부시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극의 세상에서 과연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게 가능할까?

두 번째 소설에서는 여동생 ‘이서’의 죽음 이후(부모의 주도하에 가성비 장례를 치른다)를 살아가는 ‘오영’이 등장한다. 오영은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카운터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이야기는 오후 타임 동료 ‘동강 씨(별명)’를 만난 일을 다루고 있다. 그가 가방에 키링처럼 매단 풍경은 그것의 소리와 크기, 무게로 오영에게 처음엔 위화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파트 입주민의 무례와 커뮤니티 센터 강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일어나는 무시(오영은 그들의 잔심부름을 대신 해주는 데도, 꼬리 짤린 도마뱀처럼 자꾸 뒤를 돈다고 ‘꼬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속에서 오영은 동강 씨와 군더더기 없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가 카운터 서랍에 넣은 그 풍경을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이서의 절친인 ‘해주’를 통해 이서가 수상한 일을 겪었단 걸 알게 되면서 카톡 프로필이 ‘알수없음’으로 바뀐 이서를 자주 떠올리게 되는 일들이 그런 하루하루에 교차한다.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강사들이 모인 단톡방은 공평할 줄 알았던 그들 사이에 자리한 자본주의적 위계가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와해 되지만, 오영과 동강 씨는 서로의 사정이 그 좁은 카운터 앞에서 전부 드러난 후로도, 오영의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서로를 단절하지 않는다. 같이 일했을 때에도 그러했듯,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동강 씨의 풍경은 세 번째 소설 <우리가 될 수 없는>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소설은 오영과 같이 일했던, 동강 씨라는 별명이 붙은 ‘정우’의 이야기다. 정우는 어린 시절, 첫 번째 소설의 김동주에게 유괴를 당했던 일로 인해 자기 인생이 이만 원이라는 가치로 평가절하된 인물이다. 정우가 그날을 기억하는 건 유괴범의 나약한 태도도 그렇고(김동주는 마치 본인이 유괴된 것처럼 추워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요구한 돈이 너무 터무니없이 적은 걸 깨닫고서 스스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엄마가 나타나 유괴범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이만 원을 주고 자기를 구하면서 좌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우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 주체성이 좌절되는 동시에 이만 원으로 자기 가치가 박제된 인물이다. 어쩌면 그것이 정우가 남을 괴롭히면서 남에게 특정 감정을 심으려 하는 몰상식적인 악습을 가지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마치 본인이 유괴범이 된 것마냥 타인에게 위악을 부리는 것이다).

정우를 이만 원 주고 구한 엄마는 정우와는 다른 식으로 그날에 관해 평생 시달리게 된다. 정우를 이만 원짜리라고 혐오하면서, 부잣집 고모의 아들인 ‘준서’의 정체성을 정우에게 덮어씌우려 갖은 애를 쓰게 된다. 그런 행동은 정우 엄마가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 피해 규모나 위험성이 적었다는 이유로 제도적으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서글픈 자기 보호 태세이다. 하지만 정우에게는 또 다른 시달림으로 느껴질 터. 정우는 그날로부터 엄마가 섭외한 수많은 상담사를 거치며 이해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데, 그 말은 이해(理解)가 이해(利害)로 전락하는 순간처럼, 정우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정우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오래 묵은 마음과 타인의 입에서 섣불리 튀어나오는 이해한다라는 말 사이에서 길 잃은 존재이다. 그는 그를 이해해 줬으면 하는 인물인 동시에 그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 그의 엄마라는 사실만을 유괴 사건 이후로 이십여 년간 성장하면서 깨닫고 깨달을 뿐이다. 결국 정우와 정우의 엄마는 이만 원이 목숨값으로 치러진 후에도 현재에 떠돌고 있는, 김동주의 잉여와는 또 다른 잉여다. 이만 원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가치는 그것으로 매끈하게 교환될 수 없는 가치들-목숨값이자 만두전골값이자 앞으로의 인생값-에 덧씌워지면서 수많은 잉여(공백)를 생산했고, 그 잉여는 어떤 보호나 진상규명도 없이 오해와 무지와 폭력의 산물이 되어 자본주의 도상에서 제거되어야 할 괴이한 증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피해자가 시간이 흘러 가해자가 되는 일은 그들이 시달리는 잉여를 도외시하면서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오만이다. 그 가해자들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섣부르면서도 말끔해 보이는 대처(낙인과 단죄)는, 누군가를 손가락질할 때 나머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는 것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자기모순적인 병폐이다.

정우가 가방에 매단 풍경은 이만 원과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풍경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절에서 훔친 것으로,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속이 망가진 것이며,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며, 동시에 정우가 할머니가 죽고서 훔쳐 손에 넣은 나의 물건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규칙하에 교환된 게 아니라 그 규칙을 어긴, 도난당한 물건인데, 어쩌면 교환되었으면서도 도난당한 기분을 정우에게 전한 그 이만 원과도 흡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이만 원은 다른 걸로도 섣부른 대체가 가능해 잉여가 된 박탈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지만, 그 망가진 풍경은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으로 온전하게, 할머니의 말대로 ‘자랑스럽게’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만 원은 ‘이해한다’는 손쉬운 계산의 언어라면 풍경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언어 너머의 존재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독자는 문학은 언어를 통해 그 너머에서 떠도는 자들의 자리를 되찾아주려는 이야기라는 사실 또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위화감에 풍경을 달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던 오영은, 풍경을 달고 다니지 않게 된 정우가 길거리에서 위악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SNS를 통해 알게 되면서 풍경이 정우에게 뜻하는 잉여를 짐작하고 그걸 다시 지금 삶의 궤도에 올려놓으라고 조언한다. 오영은 그를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의 증상을 잉여로 복원할 줄 아는 드문 사람이다. 정우가 마지막에 어떤 여자가 신발 무더기를 무참히 버린(해주가 오영에게 들려준, 이서가 사내 괴롭힘을 당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한 그 사건과 흡사한 일이 일어난) 천변의 상세한 위치를 알려준 건, 이해하지 못한, 아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잉여가 오영에게도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될 수는 없더라도, 각자에게 나만큼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할 줄 아는 상상력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다. 이 뜨거운 이야기를 삼키고서 깨닫게 되는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살리는 길을 내주는 것만 같다.

뒤에 실린 에세이 <마침표도 없이,>는 이 소설집을 하나의 집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이다. 더 나은 현실을 위해 소설에 현실에 대한 대비감을 주려는 작가의 의도와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로 이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무척이나 용기가 된다.

한편, 이 모든 잉여를 거슬러 가다 보면 순호의 비참한 삶에 도달하게 된다. 어린 자기를 구해주었던 양어머니의 병 치료를 위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닭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수술과 치료로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어, 어느 날부턴가 양어머니의 귀에 대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된 순호의 삶이. 양어머니가 죽고 나서 사망 보험금으로 그 빚은 어찌저찌 청산되었지만, 순호가 일하며 보낸 오 년 남짓한 시간은 그냥 없었던 것이 되었다. 이 허무. 이 공허. 삶을 빨아들이는 결정적인 구멍. 이 연작소설집은 각자가 각자대로 살며 도울 수 있다는 울림 있는 결말에 가닿는 동시에 이야기의 시작으로 반향하여 그 커다란 질문에 우리를 두고 간다. 소설을 덮는 동시에 삶의 복판으로 던져진 나는 거기서 아주 오래 생각하고 있다.

(자음과모음 서평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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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소년 - 미시마 유키오 단편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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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단편집.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집이 시와서 출판사와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잇달아 출간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작품집의 표제작과 <우국> 말고는 겹치는 게 없다.

미시마 유키오의 특징이라면 뭐가 있을까? 단연 미문이다. 처음 실린 <곶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해변에 있던 한 아이가 곶 주변을 헤매다 신묘한 커플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바다와 산, 커플이 아이의 관점에서 충분히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미문의 이야기에 깊게 들어가다보면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튀어나온다. 죽음. 아이는 그 진실을 윤곽 정도로 가늠했겠지만 독자는 아니다.

이처럼 미시마 유키오는 아름다움을 통해 욕망과 쾌락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이 가려고 하지 않는 죽음, 추함, 광기와도 교통한다.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움에 귀속되며 아름다움을 떠받든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건 평범한 것이다. 바로 뒤에 실린 표제작 <시를 쓰는 소년>은 어린 시절 미시마의 시론과 천재성, 오만함, 동경, 그럼에도 시 대신 소설로 가게 된 이유가 나오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동경하던 선배 R을 통해 실제 사랑이 문학에서 그려지는 사랑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찾아온 그 선배의 이마가 자기 이마와 닮았다는 생각은, 평소 자기 이마를 아름답다 생각하던 것과 충돌해 그에게 삶에서 외면할 수 없는 불순물을 인식하게 한다. 그는 학생감독 말대로 실러가 아니라 괴테가 될 운명이었다(물론 괴테는 할복하지 않는다).

뒤에 이어지는 <의자>는 좀 더 노골적으로 미시마의 사유가 드러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고집스런 보호 아래 자랐던 그를 별채에서 의자에 올라서서 슬프게 바라보던 어머니와, 할머니를 돌보다가도 곁에 있는 어린 미시마를 무릎의자에 앉혀 추행하던-근데 그도 불쾌해하면서 즐긴다(?)-간호사가 겹친다. 고통 속에 쾌락이 있다는 미시마만의 생각은 슬픔 속에 있던 숨어 있던 은밀한 기쁨이 노출될 뻔한 걸 깨달았을 때, 그 기쁨을 감추려고 슬픔마저도 감추게 되버린다는 사실과 겹쳐 찝찝한 진실을 드러낸다(어머니는 그에게서 슬픔이 보였다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에겐 기쁨과 슬픔 모두 사라진 것이다). 고통-쾌락을 슬픔-기쁨으로 유비하는 미시마 특유의 탐미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글이다.

<진주>는 한 부인의 생일파티에서 부인의 진주가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희비극으로, 캐릭터 설정이며 뒤바뀌는 심리, 상황이 유쾌한 재미를 가져다준다. 미시마가 이런 심오함 없이 재밌는 이야기를 썼다는 게 신기하다. 누군가 썰로 풀어도 재밌을 것 같다. 읽으면서 가장 웃겼다.

이런 경향은 <표>에서도 드러난다. 아내를 자살하게 만든 듯한 남자를-마치 햄릿이 양심을 낚아채기 위해 극중극을 시도한 것처럼-놀이동산 귀신의 집에 데려가는 이야기로, 겉이야기는 심각해 보이지만, 남편 센이치로의 어처구니 없는 성격과 괴담이 곁들여지며 재밌어진다. 풍요의 바다 4권 <천인오쇠>에서도 주인공 ‘도루’와 그의 서생이 놀이공원 회전컵 어트랙션을 타는 이색적인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그런 유희공간의 묘사가 볼만하다.

<보온병>은 인물들의 불륜과 느적느적한 심리, 불안 등이 얽히는 에피소드다. 미시마의 중편 <오후의 예항>, <짐승들의 유희>에서 느껴질 법한 그 찜찜한 감정들이 세련되게(미국 사대주의와 그에 상응하는 일본 유카타 오비에의 미적 묘사) 묘사되어 있다. 그 찜찜함이란, 무언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메울 수 없는 균열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할 수 있겠다.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은 미와 추, 젊음과 늙음, 현세와 내새 등이 얽히고 전복되는 이야기로 풍요의 바다 시리즈에서 깊이 있게 다뤄졌던 불교사상(3권 <새벽의 사원>)과 사랑(1권 <봄눈>에서 사토코와 기요아키의 사랑), 미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모든 걸 버리고 독단이 된 미는 그 상태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 더욱 아름다워진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짧은 소설에서도 아름다움의 관찰 가능성과 도달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나팔꽃>, <히나의 집>은 어린 여동생의 죽음과 얽힌 이야기지만 결이 사뭇 다르다. 전자는 짧은 분량이라 슬픈 괴담으로 흘러가며 끝이 난다면, 후자는 히나마쓰리날, 여동생을 닮은 듯한 교코라는 여자 아이에게 홀리다시피 이끌려 그녀의 집에 가서 하룻밤 지내고 돌아갔다가, 후에 그 아이와 어머니 모두 광기에 휩싸인 인물로 드러나는데, 그럼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형국에 감미로운 공상을 덧붙인다. 광기를 아름다움으로 이해해보려는 셈인데, 이런 기미는 풍요의 바다 4권 <천인오쇠>에서 도루와 유일하게 어울려지내는 광인 기누에를 연상케한다. 철저하게 세상의 미적 관점을 전부 부정하고 추한 자신을 세상에서 단연 아름답다 자신하는 기누에를.

<괴물>은 남-가족을 포함한다-을 골탕 먹이는 걸 긍지로 살아온 독특한 인물 ‘나리모치’가 노인이 되어 뇌출혈로 말을 못하게 되면서 그를 보살피는 가족들한테-그들조차 모르는-복수를 당하는 이야기로 유쾌하면서도 악랄하고 처연하면서도 징그럽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주인공 ‘혼다’가 4권 <천인오쇠>에서 악에 물들고 노년에 접어들며 드러내는 추악한 면모가 나리모치한테서도 보인다. 별장에 머물도록 허락해준 별장 주인 히가키가 어린 시절 자신이 못되게 굴었음에도 그런 기색 없이 극진히 그를 돌보는데, 그것이 나리모치의 딸 이쓰코를 사랑해서임을 뒤늦게 알게 된 나리모치는, 그것이 자신에게 가하는 복수라고 생각해, 이쓰코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악행을 거듭하며 살아온 자, 내내 악한 복수에 대비해온 자를 무너뜨리는 게 사랑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우국>은 읽기가 괴로웠다. 여기엔 서사적 곡선이 없다. 오로지 직선, 군도로 배를 가르는 직선만이 그려져 있다. 쿠데다 미수 사건에 자기 동료들이 얽힌 걸 알게 된 다케야마 신지 중위가 동료들을 죽일 수는 없어 아내 레이코와 마지막으로 관계를 나누고 자결하는 하룻밤을 담은 이야기다. 쾌락과 죽음이라는 두 요소를 극단적으로 드러내어 미시마가 추구하는 미의식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지만… 불쾌하고 맹목적일 정도로 신뢰와 마음이 일치하고 청결한 두 남녀 때문에 소설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 읽으면서 이렇게 역겨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풍요의 바다에서도 자결이 등장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았는데…

<우국>을 읽고 난 후유증을 마지막에 실린 <황야에서>가 말끔히 가시게 한다. 집에 침입한 청년에 대해 상상력을 끌어올려 독자로 가정하고 소설가의 고독과 관련지어 보는 관점이 독특했다. 일화에 가까운 일인데도 소설화한 게 대단하다.

이처럼 미시마의 단편들이 미문 일색에 형식적 완성도도 높지만 장르나 주제, 밀도가 전부 다 다르다. 다작을 한 작가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소설집이었다. 개인적으론 책 만듦새나 글씨체, 줄간격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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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에서 이리가 오늘의 젊은 작가 53
윤강은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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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전체에 눈과 극심한 추위가 도래한 근미래의 한반도. 식량을 생산하는 남부의 온실 마을, 철을 생산하는 한강(중부)의 제철소 구역, 대륙군과 대척하는 압록강(북부)의 군사 구역으로 나뉘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 구역과 저 구역 간에 물품들을 전달하는 짐꾼 일을 하던 온실마을의 ‘유안’은 일 때문에 친구 ‘도진’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걸 계기로 압록강이 아닌 한강까지만 짐을 전달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북부로 갈 중부의 짐꾼이 턱없이 부족해서 받아줄 수 없다는 중부 구역장의 반대에 맞닥뜨린다. 반대에 줄만을 가졌다가 사정을 알게 되어 수긍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중부 짐꾼 ‘화린’과 함께 유안은 압록강 군사 구역에 들렀다가 화린의 친구 ‘기주’를 마주하고, 기주 옆에 있는, 여기 군인들관 어딘가 분위기가 다른 ‘백건’을 보게 된다.

이렇게 인물과 배경 소개가 이어진 뒤 소설은 인물들의 내면으로 향한다. 각자의 구역에서 벌어지는 못 마땅한 일들과 타 구역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을 통해 과거와 달라진 지금을 목도하는 그들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앞으로도 지켜나갈 수 있을지 같은 공허한 질문에 휩싸인다.

한쪽에 생의 경계를 넘은 존재 ‘도진’이 있다면 반대쪽에는 반도의 경계를 넘은 존재 ‘태하’가 있다. 태하는 화린, 기주와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로, 화린 기주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도맡다가 군인이 되려는 기주를 돕기 위해 압록강 너머로 파견을 나갔지만 몇 년째 소식이 없다.

북부에서 남부 순서로 인물들을 나열하면 이러하다.

태하(대륙)—백건&기주(압록강+군인, 대륙군 출신/중부 출신)-화린&유안(짐꾼, 중부/남부)—도진(죽음)

백건과 기주가 묶이고, 화린과 유안이 묶이는 것은 직업과 지역이 같거나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백건과 기주는 현재의 무의미함 속에서 내면의 혼란을 마주하는 쪽이다. 백건이 대륙군 특수부대로 육성되는 혹독한 과정에서 살인이 빙자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했다가 반도군한테 붙잡혔을 때 구해준 게 기주다. 지난 전쟁을 계기로 자원해서 압록강 군인이 되었지만 반도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량을 보여주는 백건을 보면서 스스로 군인의 자질이 있는 건지 의심하고, 또 친구 화린과도 멀어져간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기주를 알아주고 감싸주는 게 백건이다. 선택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맛봤다는 그 아이러니가 두 사람을 결속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대륙군이 다시 침략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쪽, 남하하는 쪽이 된다.

화린과 유안은 현재의 무의미함 속에서 외부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걸 추구하게 되는 쪽이다. 유안은 온실마을 도축장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던 도진의 삶을 가늠하게 되고, 거기서 주운 씨앗과 도진이 남긴 생명도감으로 인해 사라진 줄 알았던 가능성이 잠재된 형태로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도진처럼 생명을 중요시해 썰매를 끌던 개가 죽었을 때도 사람처럼 화장해 그 유골함을 묻고 장례를 치러준 화린 앞에 나타나 당신을 지켜줄 테니 자기 시신을 찾아달라고 말하는 유령 아이는 화린이 무의미로 빨려들어가는 죽음에 장례 등을 통해 애도하고 의미를 덧붙여주던 게 헛된 게 아님을 깨닫게 한다. 대륙군이 침략했을 때, 유안은 화린이 걱정돼서 북상하고, 화린은 기주가 걱정돼서 북상하는 쪽이 된다.

백건 기주와 유안 화린이 이렇게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아 보여도 다른 쪽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공통된다. 그들이 알던 저들이 시공간과 생사에 있어서 점점 타자가 되어가도 그들은 저들을 여전히 위하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고 기억하려고 한다.

소설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북상하는 이들과 남하하는 이들이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그들과 저들 간의 경계가 무화되어 죽거나 살거나, 과거거나 현재이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가 ‘살아있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심사평에서 이 소설을 가리키며 말하는 ‘생존주의’는 모든 것들을 되살리고 품으려는 시도 그 자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원망스럽고 괴롭더라도, 망각하는 것보다는 기억하는 게 더 나은 가능성을 상상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실임을 가리키는 기억 생존주의.

뒷부분에서 이 소설에 <저편에서 이리가>란 제목이 붙은 이유를 이야기에서 등장한 존재(씨앗)와 기록(생명도감)과 징조(유령 아이, 하울링 소리)라는 세 요소로 마주하게 되는데 참 근사하다. 공간적 측면(저편)과 시간적 측면(이리) 모두에서 거리감 있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 나타나게끔 복원하는 게 이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탁월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또래가 쓴 장편을 읽는다는 놀라움과 최근 줄곧 생각하던 ‘기억’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공감과 별개로, 소설의 근미래적인 배경 설정이 그 자체의 매력을 강화하지 못하고 주인공 여섯 명의 감정을 찍어내기 위한 풍경(혹은 도화지)으로 동원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기도 했다. 별들은 충분히 빛나지만 그 별들이 수놓인 밤하늘의 규격과 세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디테일이나 묘사 대신 감정적 진술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경향,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면서 벌어질 일들을 설원 같은 표현들로 과감하게 생략한 점, 각 공동체 수장 인물들-이장, 구역장, 대장-의 성격이 거진 비슷한 점, 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뭉뚱그려지게 그려진 점, 각 주인공들이 각 공동체에서 요직 인물인 점(어떻게 요직이 되었는지 하는 성장 과정은 기주 말고는 없다), 주인공이 많고 주변인물이 수장들 말고는 거의 없다보니 각 구역이 투톱 체제로 보인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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