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원만 빌려줘 트리플 36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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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 작가님의 연작소설집. 전작 <밤은 내가 가질게>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가 그랬듯이,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뜨거운 무언갈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울컥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 화자가 자신이 처한 불행에 동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날카롭게 현실의 규모와 세부를 파고들뿐더러, 그 과정에서 비겁함, 무지 같은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소설집은 타자에 대한 섣부른 이해의 오만함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우리’가 아닌 ‘각자’로서의 연대, 생존을 이야기한다.

처음 실린 표제작 <이만 원만 빌려줘>는 ‘김동주’의 유괴 사건과 그 후의 자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동주와 같이 자살을 시도했지만 김동주의 마지막 선택으로 살아남은 여성 인물(두 번째 소설 <(알수없음)>에서 죽은 ‘이서’로 추정된다)의 증언은 앞서 언급한 이 소설집의 주제에 운을 띄우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이만 원은 ‘수치심’으로 작용하는데 당사자의 반응과 외부 사람들의 반응이 상극이다. 이만 원이라는 돈이 세상에서 소용되는 가치 때문이다. 그 돈으로 김동주는 자신이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친구,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는 걸 마지막에서야 깨닫게 한 친구 ‘순호’가 자살하기 전에 그러려 했듯이(“이만 원만 빌려줘.”) 만두전골을 사 먹으려 했었다. 하지만 경찰과 대중은 그런 사연은 알지 못한 채(이 모든 증언을 듣는 건 작가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이만 원이 아이의 목숨값이라기엔 터무니없는 협상금이라고만 피상적으로 생각하며 당황하거나 분노한다. 마치 유괴된 아이의 무사 복귀라는 과업이 이만 원이라는 돈을 매개로 말끔히 완수됐다는 듯, 거기에 남은 잉여, 그가 왜 하필 이만 원을 요구했을까, 라는 여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가해자라면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든 간에 들여다보기를 일절 거부하겠다는 도덕적인 터부시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극의 세상에서 과연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게 가능할까?

두 번째 소설에서는 여동생 ‘이서’의 죽음 이후(부모의 주도하에 가성비 장례를 치른다)를 살아가는 ‘오영’이 등장한다. 오영은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카운터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이야기는 오후 타임 동료 ‘동강 씨(별명)’를 만난 일을 다루고 있다. 그가 가방에 키링처럼 매단 풍경은 그것의 소리와 크기, 무게로 오영에게 처음엔 위화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파트 입주민의 무례와 커뮤니티 센터 강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일어나는 무시(오영은 그들의 잔심부름을 대신 해주는 데도, 꼬리 짤린 도마뱀처럼 자꾸 뒤를 돈다고 ‘꼬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속에서 오영은 동강 씨와 군더더기 없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가 카운터 서랍에 넣은 그 풍경을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이서의 절친인 ‘해주’를 통해 이서가 수상한 일을 겪었단 걸 알게 되면서 카톡 프로필이 ‘알수없음’으로 바뀐 이서를 자주 떠올리게 되는 일들이 그런 하루하루에 교차한다.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강사들이 모인 단톡방은 공평할 줄 알았던 그들 사이에 자리한 자본주의적 위계가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와해 되지만, 오영과 동강 씨는 서로의 사정이 그 좁은 카운터 앞에서 전부 드러난 후로도, 오영의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서로를 단절하지 않는다. 같이 일했을 때에도 그러했듯,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동강 씨의 풍경은 세 번째 소설 <우리가 될 수 없는>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소설은 오영과 같이 일했던, 동강 씨라는 별명이 붙은 ‘정우’의 이야기다. 정우는 어린 시절, 첫 번째 소설의 김동주에게 유괴를 당했던 일로 인해 자기 인생이 이만 원이라는 가치로 평가절하된 인물이다. 정우가 그날을 기억하는 건 유괴범의 나약한 태도도 그렇고(김동주는 마치 본인이 유괴된 것처럼 추워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요구한 돈이 너무 터무니없이 적은 걸 깨닫고서 스스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엄마가 나타나 유괴범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이만 원을 주고 자기를 구하면서 좌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우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 주체성이 좌절되는 동시에 이만 원으로 자기 가치가 박제된 인물이다. 어쩌면 그것이 정우가 남을 괴롭히면서 남에게 특정 감정을 심으려 하는 몰상식적인 악습을 가지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마치 본인이 유괴범이 된 것마냥 타인에게 위악을 부리는 것이다).

정우를 이만 원 주고 구한 엄마는 정우와는 다른 식으로 그날에 관해 평생 시달리게 된다. 정우를 이만 원짜리라고 혐오하면서, 부잣집 고모의 아들인 ‘준서’의 정체성을 정우에게 덮어씌우려 갖은 애를 쓰게 된다. 그런 행동은 정우 엄마가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 피해 규모나 위험성이 적었다는 이유로 제도적으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서글픈 자기 보호 태세이다. 하지만 정우에게는 또 다른 시달림으로 느껴질 터. 정우는 그날로부터 엄마가 섭외한 수많은 상담사를 거치며 이해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데, 그 말은 이해(理解)가 이해(利害)로 전락하는 순간처럼, 정우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정우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오래 묵은 마음과 타인의 입에서 섣불리 튀어나오는 이해한다라는 말 사이에서 길 잃은 존재이다. 그는 그를 이해해 줬으면 하는 인물인 동시에 그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 그의 엄마라는 사실만을 유괴 사건 이후로 이십여 년간 성장하면서 깨닫고 깨달을 뿐이다. 결국 정우와 정우의 엄마는 이만 원이 목숨값으로 치러진 후에도 현재에 떠돌고 있는, 김동주의 잉여와는 또 다른 잉여다. 이만 원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가치는 그것으로 매끈하게 교환될 수 없는 가치들-목숨값이자 만두전골값이자 앞으로의 인생값-에 덧씌워지면서 수많은 잉여(공백)를 생산했고, 그 잉여는 어떤 보호나 진상규명도 없이 오해와 무지와 폭력의 산물이 되어 자본주의 도상에서 제거되어야 할 괴이한 증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피해자가 시간이 흘러 가해자가 되는 일은 그들이 시달리는 잉여를 도외시하면서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오만이다. 그 가해자들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섣부르면서도 말끔해 보이는 대처(낙인과 단죄)는, 누군가를 손가락질할 때 나머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는 것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자기모순적인 병폐이다.

정우가 가방에 매단 풍경은 이만 원과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풍경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절에서 훔친 것으로,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속이 망가진 것이며,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며, 동시에 정우가 할머니가 죽고서 훔쳐 손에 넣은 나의 물건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규칙하에 교환된 게 아니라 그 규칙을 어긴, 도난당한 물건인데, 어쩌면 교환되었으면서도 도난당한 기분을 정우에게 전한 그 이만 원과도 흡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이만 원은 다른 걸로도 섣부른 대체가 가능해 잉여가 된 박탈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지만, 그 망가진 풍경은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으로 온전하게, 할머니의 말대로 ‘자랑스럽게’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만 원은 ‘이해한다’는 손쉬운 계산의 언어라면 풍경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언어 너머의 존재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독자는 문학은 언어를 통해 그 너머에서 떠도는 자들의 자리를 되찾아주려는 이야기라는 사실 또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위화감에 풍경을 달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던 오영은, 풍경을 달고 다니지 않게 된 정우가 길거리에서 위악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SNS를 통해 알게 되면서 풍경이 정우에게 뜻하는 잉여를 짐작하고 그걸 다시 지금 삶의 궤도에 올려놓으라고 조언한다. 오영은 그를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의 증상을 잉여로 복원할 줄 아는 드문 사람이다. 정우가 마지막에 어떤 여자가 신발 무더기를 무참히 버린(해주가 오영에게 들려준, 이서가 사내 괴롭힘을 당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한 그 사건과 흡사한 일이 일어난) 천변의 상세한 위치를 알려준 건, 이해하지 못한, 아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잉여가 오영에게도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될 수는 없더라도, 각자에게 나만큼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할 줄 아는 상상력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다. 이 뜨거운 이야기를 삼키고서 깨닫게 되는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살리는 길을 내주는 것만 같다.

뒤에 실린 에세이 <마침표도 없이,>는 이 소설집을 하나의 집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이다. 더 나은 현실을 위해 소설에 현실에 대한 대비감을 주려는 작가의 의도와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로 이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무척이나 용기가 된다.

한편, 이 모든 잉여를 거슬러 가다 보면 순호의 비참한 삶에 도달하게 된다. 어린 자기를 구해주었던 양어머니의 병 치료를 위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닭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수술과 치료로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어, 어느 날부턴가 양어머니의 귀에 대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된 순호의 삶이. 양어머니가 죽고 나서 사망 보험금으로 그 빚은 어찌저찌 청산되었지만, 순호가 일하며 보낸 오 년 남짓한 시간은 그냥 없었던 것이 되었다. 이 허무. 이 공허. 삶을 빨아들이는 결정적인 구멍. 이 연작소설집은 각자가 각자대로 살며 도울 수 있다는 울림 있는 결말에 가닿는 동시에 이야기의 시작으로 반향하여 그 커다란 질문에 우리를 두고 간다. 소설을 덮는 동시에 삶의 복판으로 던져진 나는 거기서 아주 오래 생각하고 있다.

(자음과모음 서평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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