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의 빛을 따라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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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몸, 하나의 정신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책이나 이야기 같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다른 일들을 미리 체험한다. 그 일에 대해 미리 숙고해보고, 언젠가 나에게 그 일이 올 때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해보려고.

그러나 이야기에서 숱하게 보고 들었던 죽음이 나에게 오면 누구나 속수무책이 된다.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느낀 무력감, 죽어가는 당사자의 괴로움, 남겨질 자신에 대한 두려움. 남편을 잃은 나탈리 레제는 이 세 방향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지냈던 나날들이 죽음을 기점으로 무거운 여운처럼 술렁이기 시작하며 ‘너’의 죽음을 배반한 듯한 ‘나’의 삶을 휘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탈리 레제는 쓴다. 이 상황에 대해. 이 현실에 대해. 그것도 사력을 다해.

쓴다는 것은 표현한다는 것, 표현한다는 것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은 그걸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쓴다는 것은 응시이며, 그 응시만이 나탈리 레제에게는 영원히 눈감기 전까지 놓여진 막대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나탈리 레제는 없음을 있었음으로, 부재를 존재했음으로, 현재형 대신 과거형으로 바꿔 그 주변의 일들을 서술한다. 너의 일상을 돌이키고, 현존했다는 흔적들을 찾고, 너가 죽음을 대했던 방식(너는 아버지를 잃고 애도란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네 삶을 끌어내는 거라고 말했다)을 돌이키고, 행복의 무구함, 한 번도 질문하지 않고 당연시했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다 감각되는 건 아름다운 공허인 창공과, 내면으로 추락해버린 나 자신의 몸이다. 죽음의 자장에 얽혀 변화된 몸.

그 몸은 친근했던 텍스트들 속에 다뤄진 죽음의 순간들을 다시금 훑어본다. 오로지 죽음만을 눈앞에 둔 이들의 독백과 서술을. 그들한테서 뜻밖의 평안을 본 나는, 마지막으로 너의 마지막 작업물을 본다. 나는 너의 작업물 속 비행사가 비행선에 몸을 실은 뒤 적은 문장 속에서 환희를, 초연한 순간의 살아있음을 읽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죽어가던 때에 너는 그런 도약을 했겠구나. 저 자유로운 창공으로 갔겠구나.

그런 재인식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준다. 이미 하강을 시작한 나는 끝은 없고 이해는 불가능하고 기도는 소용없겠지만 남겨지는 무엇이 있고 지켜주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둘러보며 쭉 하강하다, 어느 순간 뒤집혀 너가 간 창공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만나지 않고서도 다시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이란, 그 누군가가 아무리 가깝던들 타인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남겨진 자로서, 너의 타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한없이 슬퍼하다가도 문득 깨닫게 된다. 너가 자유로운 곳으로 갔다는 걸.

결국 나의 눈이 아닌 너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볼 때서에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는 모양이다.

나탈리 레제의 문장들이 압도적으로 슬프다. 하지만 이토록 커다란 슬픔에 헹궈지다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는 건 저 맑은 하늘이다. 나탈리 레제의 사력을 다하는 글쓰기가 향하는 곳이 바로 거기인 걸까.

저 하늘로 갔을 누군가에 대해 한층 맑은 마음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짧지만 묵직한 글이었다.

#창공의빛을따라 #나탈리레제 #암실문고 #을유문화사 #산문 #글 #글쓰기 #서평단 #문학 #에세이 #죽음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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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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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했던 사람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 책을 동경했던 주인공 ‘석주’는 교사를 하라는 선생과 부모의 권유에 사학과에 입학해 교직 이수를 하려했던, 삶의 결정에 있어서 본인의 의지가 크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책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한계를 무릅쓰고 소설 창작 수업을 청강하게 되고, 졸업 후엔 부모의 기대와 다르게 출판사에 입사하고 여러 사람과 회사를 거치면서 편집자로 거듭난다.

평범한 삶 속 일의 이야기가 처음엔 단정하면서도 고저가 없는 것 같이 느껴져 서사가 조금 약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후반부 석주가 ‘안정묵’ 작가의 소설을 담당하면서 일어나는 변화들, 오십 대에 이른 석주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에 이르면서 작가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이 마지막을 위해 이야기를 구성한 거구나, 감탄하게 되었다.

‘교한서가’에 입사해 교열부 ‘오기서 씨’ 밑에서 일하다, 편집부 ‘장민재 씨’ 밑에서 일하다, 회사 사정으로 퇴사 후 신생 출판사 ‘산티아고북스’에 입사해 대표 ‘차인석’과 편집장 ‘손유라’ 밑에서 일하고, 여러 동료를 만나고, 편집자 모임에 나가고, 동료이자 연인 ‘원호’를 만나고, 차차 승진하는 등-사건, 변화, 성장 세 요소가 고루 담긴-서사가 차분하게 정리돼 있어 장편소설 구조를 분석하기 좋을 듯하다.

출판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다루고 있어서 좋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출판일은 출판사 사람들, 작가들, 독자들, 시대까지 얽혀서 예상하기 어렵고 또 복잡하다. 그런 복잡한 얽힘 속에서 일어날 만한 일들이 고르게 분배돼 있어, 작가가 철저한 조사와 객관적인 시선으로 소설을 써내려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구체적인 연도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출판 역사를 따라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석주가 입사하고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헷갈려하는 점, 강압적인 필자를 만났을 때, 좋은 필자를 만났을 때, 좋지 못한 원고를 받았을 때, 좋은 원고를 받았을 때, 좋은 상사를 만났을 때, 좋지 않은 동료를 만났을 때, 처음 혼자 필자를 대면했을 때, 책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떴을 때, 한 책에 온 힘을 쏟느라 다음 책을 신경 쓰지 못했을 때, 독자와 작가가 긴밀하게 연결됐을 때, 오로지 작가만을 믿고 일을 추진할 때 등등.

그런 일들이 모두 지나고 석주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제목의 의미가 확 와닿으면서 이 책이 평범한 일을 하며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그토록 빈번하게 다양한 각도에서 다룬 일들은 석주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 삶을 살았으니 석주에게 오직 나만의 것인 무언가가 자리잡힌 걸 테다. 남들은 평범하다고 평가할지 몰라도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확신이며 가치인가.

활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느라 가족과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한 석주지만, 삶이 실로 풍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이 아직 이 일을 좋아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좋았다. 모든 걸 다 알면서 살 수는 없다는 걸,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안정묵 작가와의 일화는 어디까지 예술이라 볼 수 있는지 그 경계를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게 보았다(마광수 작가의 일화가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그의 소신과 편집자인 석주의 원고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얽히면서 보여주는 시너지가 좋았다. 가치라는 게 시대와 다수 집단에 의해 파묻히기도 하지만, 소수의 의지와 집념으로 다시 발굴되기도 한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책이 가지는 가치가 무한하다는 뜻 같았다.

한 사람의 생을 다루고 있다 보니 소설 속에 계절과 계절에 따른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반복된다. 그 면면들을 유심히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삶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삶이 주는 감동은 잔잔하고도 묵직한 거란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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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널) 러브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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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고 널린 사랑 이야기 중 이희주 작가가 그려내는 사랑 이야기는 ‘광기’라는 이름으로 진단된다. 마치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이상한 소리가 들린 창고에 기어코 다가가 문을 열듯이, 꺼림칙해 하면서도 한발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광기 어린 사랑.

그러나 사랑의 발로가 순수이며 순수에는 순수선보다 순수악이 더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기가 윤리를 모르듯이 순수에는 윤리가 부재하며, 인간이 윤리와 도덕규범을 익히면서 순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보통 인간’이 되어간다는 걸 안다면, 소설 속에 돌연하게 표출된 광기 어린 사랑이 간절한 ‘기도’이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구토’임을 깨닫는 순간, 사랑에 설탕 코팅처럼 덧입혀진 광기란 도덕규범으로 포획할 수도 포착할 수도 없는 우리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던 것이며, 그것이 미친 상황이 닥치면 자신을 가둬온 윤리와 도덕을 탈락시키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순수하게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걸(‘뱃속 깊숙이 숨어 있던 미친년이 목구멍으로 기어나왔다.’(p.101), ‘미친 사람은 없어. 미치겠는 상황이 있는 거지.’(p.327)) 숨가쁘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사랑이란 곧 광기 어린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은 크리미하면서도 크리미널하고, 크리미널하면서도 크리미하다는 것을. 물론 우리는 이희주 소설의 크리미에 끌려가다 크리미널에 당도하고 말지만. 사랑하다 보니 그것이 숨기고 있던 발톱마저도 사랑하게 되고 말지만.


사랑의 광기 어린 에너지와 가열찬 충동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 속 사랑 받는 대상들은 우상으로 그려지거나 어느 순간부터 우상으로 거듭난다. 우상이 과거에 종교적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지금 우상은 온갖 미디어에서 현현하는, 실물로 볼 일이 잘 없는 아이돌(혹은 가상세계에서 더 생생한 인물)로 그려진다.

첫 소설 <0302♡>는 만나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괴담에나 나오던 ‘사거리의 미소년’이 된 ‘유리’와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친구 ‘희주’의 이야기로, 이희주 소설 세계를 열어젖히는 흥미로우면서도 모든 게 집약된, 입문하기 좋은 소설이다. 모두에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와 한 사람을 사랑하고픈 욕망의 발로가 우정이란 이름으로 아름다운 쌍을 이룬다. 그 아름다운 쌍이 지속되는 여정에 많은 고난이 자리한다. 무수한 고백과 추행, 탈취, 자살시도까지. 자신이 바랐던 순수한 사랑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다 희주의 조언에 따라 아이돌을 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유리는 길을 찾아간다. 모두에게서 사랑 받고자 거리를 두는 유리의 연습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보다 월등한 존재들,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유리의 아이돌의 꿈을 막는다. 그렇게 방황하는 와중에도 희주는 언제고 그를 ‘영원한 관찰자’로서 응원하는데,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거리의 미소년이 유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희주 자신이 소원을 쓰는 사람, 신이 되어 유리에게 그가 원하는 세상을 써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단편들을 읽어보면 이 정도의 사랑은 꽤 얌전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위 소설과 비슷한 애틋한 사랑은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에서도 나타난다. ‘미도’가 15년 전 인터넷 게임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에서 사랑하게 된 ‘선우’를 실제로 보았을 때 그들의 사랑은 끝나고 말지만, 그 온전함을 파괴하는 건 그 추운 날 교복 하나에 목도리만 걸치고 나온 ‘희도’를 걱정했다가 그의 목울대를 보고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사라진 이성 커플과, 그가 15년 후 강원도 여행에서 펜션에 들인 ‘쥐 인간’ 이성 커플이다. 위 소설도 이 소설도 사랑에 있어서의 성별을 모호하게 하거나 뒤집음으로써 기전의 도덕규범이 절취하던 사랑의 모습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퀴어적인 소설이다. 그 사랑을 실패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건 외부의 시선들이다. 그런 시선이 덧씌워지기 전 해변에서 선우와 미도가 나눴던 대화들, 그 온전하고 자유로웠던 사랑에 매료되었던 이들은 사랑에 있어서의 성별이라는 절취선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절취선을 뛰어넘고 첫 번째 소설처럼 반전도 보여주는 소설은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다. 엄마를 괴롭힌 막무가내 아빠 ‘정우’를 죽이려 했으나 그 자신이 먼저 죽어 혼이 된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 빙의되다시피 해서 자신을 엄마로 여기다가 깨어나서는, 아빠가 그토록 엄마를 괴롭히고 방치했지만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몇몇 부분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빠를 죽이는 대신 아빠의 육체에 깃들어 엄마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성별과 세대의 경계선을 뛰어넘고 폭력과 방치 괴롭힘을 복수로 갚지 않고, 그건 오로지 그들 사랑 밖에 있는 자신의 관점이란 걸 알고서 엄마의 아빠에 대한 사랑에 아빠가 되어 엄마가 원하던 사랑으로 보답하겠다는 결심은 사랑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상대가 원하는 사랑, 타자를 이해하는 사랑으로 거듭난다.

<최애의 아이>, <마유미>, <사과와 링고>는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음으로서 완수되는 이야기이다. 인물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존재하나 결단코 거기에 가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기에(‘유리’는 아이돌이고, ‘마유미’는 버츄얼 캐릭터이며, ‘마크’는 소설 뮤지컬 <더 라스트>에서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이기에), 거기에 가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일궈가다, 자신의 사랑을 훼손하는 무언가의 방해를 견디지 못하고 그 무언가를 없애버리고야 만다.

세 소설에서 공통적인 건 모성의 비틂이다. <최애의 아이>의 ‘우미’는 생활 안정, 정착이나 결혼 등의 이유가 아니라 단지 아이돌 유리를 사랑해서 유리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며, <마유미>에서 버츄얼 휴먼의 이미지는 버츄얼 휴먼을 연기하는 ‘현주’의 엄마, 불륜 상대가 바람핀 일로 다투다 아파트 아래로 추락했고 지금은 현주가 요양보호사에게 내맡겨버린 ‘경희’의 젊었을 적 사진에서 따왔으며, <사과와 링고>의 ‘사야’ ‘사라’ 자매의 엄마는 사야의 말에 꼼짝을 못하고 같은 방식으로 사라를 꼼짝 못하게 하며 사라가 사야를 돕게 만든다. 신격화되기 쉬운, 경의와 존경이라는 칭호만으로 포장해둔 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그 대상이 된 여성의 내면과 삶을 썩어가게 두는 모성의 남성적 역사를 지우고 여성들의 욕망을 가장 먼저 발견하며 사랑을 발굴해낸다. 그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가장 진실되다.

자연히 돌봄이 두드러진다. 아이돌의 아이를 갖겠다는 발상으로 아이를 가진 우미는 자신이 가진 계획성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다 그게 정치인의 아이라는 걸 알고 그 앞에서 죽인다.

‘현주’의 친구이자 ’마유미‘의 작가로 일하는 ‘나’는 자신도 일부 섞여있다 여긴 캐릭터 마유미가 현주와 현주 어머니 사이의 불완전한 돌봄, 어머니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탄생한 캐릭터란 걸 알게 되고, 요양보호사와 ‘이모님’과의 다툼으로 마유미의 실체가 커뮤니티에 폭로되자 현주가 ‘마유미’를 자신으로 드러내려는 걸 알고 현주를 자살 바위 ‘희구대’에서 밀어버린다. 이상을 남김없이 긁어내려는 현실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현주의 죽음을 ‘자살바위 이야기’에 복무하게 하면서(‘실족사’) 자신의 사랑을 온전하게 지켜낸다.

동생 ‘사야’가 돈과 애정을 무수히 갈구하던 원인이, 태생적으로 누군가로부터 돌봄 받는 게 마땅해 보이던 사야 자신이 돌볼 능력이 없는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언니 ‘사라’는, 자신이 매료된 뮤지컬에서 마지막을 불러일으키던 신 ‘마크’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계속 돈을 빌리는 ‘사야’ 사이에서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끝내고 싶어한다는 욕망을 발견하고, 사야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야와의 진정한 마지막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야가 키우는 고양이들을 죽이고 만다(인간과 신의 관계가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로 비춰진다).

‘여행은 도착하기 전까지가 가장 즐거운 거야. 막상 가면 더러운 모래사장과 버려진 캔, 애들 오줌이 가득한 미적지근한 바닷물과 나쁜 날씨와 실망밖에 없거든.
그러자 마크가 답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즐기자고. 여행을 하는 동안엔 말이야.’(p.335)

라는 말은 파국으로 치닫은 사랑 주위의 온통 망가진 모습보다도 사랑이 광기로 치달을 때의 순수를 음미하라는 뜻일 게다. 그건 보통 인간이라면 가닿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기 때문에. <마유미>의 ‘나’처럼 사랑을 완수한 후로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p.172)을 수도 있지만,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사랑의 순수가 식어버린 것, 주위가 온통 망가진 것과 다를 게 없을 테다.

<사과와 링고>는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멸망지향적 세계관이 두드러진다면, <천사와 황새>는 <최애의 아이> 같은 우생학적 세계관에 멸망론적 세계관,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세계관이 더해진 소설이다. 하늘에 인면 부유체 천사가 떠 있고, 세계적으로 불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남성도 임신할 수 있게 된 배경 아래, 남성인 ‘유리’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는 노인은 안락사시켜야 하고 사람들은 더 많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우생학 개념을 갖고 있는 애국자인 듯하지만, 유리를 사랑하며 유리의 열정 때문에 아이를 네 번 가졌던, 유리의 가정부 역할을 하는 여성 ‘우미’, 그들의 과거와,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 장난으로 시작한 진실게임을 통해 유리가 아이를 가진 게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퀴어적인 정체성 때문이라는 게 드러나며 새로운 국면으로 향한다. 우미는 꿈에서 부부가 된 둘의 온전한 결합을 상상하지만, 애초에 둘의 이야기가 어린 우미가 돌보고 있던 할머니를 목 졸라 죽이던 그때 우미의 집에 찾아간 유리가 평소와 다른 교복을 입고 있던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걸 보면(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싶지만) 그 사랑은 실현되는 순간 깨져버릴 환상일지도 모른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이 소설집 마지막에 놓인 소설로, 소설집에 같은 이름을 공유하며 여러 캐릭터로 변용되던 우미-유리 서사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첫 소설에는 마치 소설집의 주된 전제 같은 문장이 있다. 모두에게 사랑 받고 싶은 자는 신자가 되거나 아이돌이 되거나 하는 기로에 놓인다고. 그 소설의 유리가 아이돌을 택한다면, 이 마지막 소설의 유리는 둘 다 택한다. (사이비)신자이자 아이돌을.

마지막 소설은 아이돌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무수한 익명의 팬들의 연대와 경쟁과 정치를 보여준다. 한때 대학 동기였고 몇 년 전까지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며 아이돌 ‘유리’의 팬으로서 그림을 그렸던 ‘우미’와 직캠 영상을 찍었던 ‘영하’는 아이돌 유리의 고향인 군산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유리의 모교 미션스쿨에서 폭력적인 상황과 맞닦뜨린 적이 있다.

유리의 그림만 그리다가 우연히 팬픽의 세계에 빠져들고, 거기서 그려지는 유리가 진짜 유리가 아니라고 느끼면서 자신이 알아본 유리의 내면을 가지고 팬픽을 쓰기로 결심한 우미는 그 미션스쿨에서 폭행당하는 소년을-영하가 소리 질러 구하기 전까지-지켜보았던 경험에서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목격하고 내내 막혔던 팬픽의 결말을 써낸다.

우상에 대한 거침없는 환상과 내밀한 욕망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팬픽의 세계에서 어떤 소설은 새롭다 평가받거나 그 우상화를 공고히 하는 반면 어떤 소설은 애정이 담겨 있어도 비윤리적이라며 평가절하된다. 후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 같던 팬들의 익명의 바다에서 공론화되어 실명으로 뭍에 건져올려진다. 그는 팬들에게 버려진 팬, 사랑의 자격에서 탈락된 팬으로서 철저하게 그 집단에서 배제된다.

후에 유리가 아이돌 팀에서 탈퇴하고 사이비 종교의 신념에 따라 결혼을 하는 걸 보며 탈덕을 하는 우미와 달리, 영하는 그전에, 위에서의 후자 부류처럼 자신이 써낸 팬픽이 논란이 되어 팬들에 의해 탈덕되고 만다.

미션스쿨에서 폭행당하던 소년을 구출한 뒤 우미와 영하를 태울 택시가 올 때까지 그 셋이 나눠먹었던 빵은 분명히 같은 빵이지만, 폭력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소년), 폭력을 사랑처럼 관찰하고(우미), 폭력에 솔직하게 대응했던(영하) 이 셋을 후에 폭력의 재현자(이자 가해자), 폭력의 방관자, 폭력의 피해자로 거침없이 갈라버린다(그 갈라짐의 확인은 현재의 우미 시점에서 이뤄진다). 이처럼 이희주 소설에서의 사랑은 우상화되면서 광기를 띠고 진실의 알리바이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집단화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연대(혹은 결속)와 배제를 강화하는, 달콤하면서도 언제든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사랑으로 거듭난다.

경악스럽기도 하고 때론 공감조차 버겁지만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되는 이희주의 사랑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순수한 광기에 경도되지만서도 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그 위험성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지만, 거기서 돌연히 드러나는 여성 인물들의 거침없는 욕망과 성별 기준으로(특히 이성애로) 절취할 수 없는 사랑의 원형들은, 보통이 아닌 삶을 잠시 맛 본 것 같은 기분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언제고 생각하고 말하고픈 질문을 안겨다준다. 얌전하지 않은 그의 문학이 언제까지고 얌전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학동네 서평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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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대삼각형 오늘의 젊은 작가 51
이주혜 지음 / 민음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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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대삼각형>은 소설의 첫 장에서 예고한 대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다. 밤하늘에 수놓인 별, 이름도 없이 존재만 했던 별들에 누군가 이름을 붙이고 기원을 지어내고 가상의 선분을 이은 별자리로 만들듯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옛 이야기가 닿고 삶에서 벌어지는 다른 이야기와 얽히고 이전에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파생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인물들의 삶에 퍼뜨리며 그들이 무수한 점들 중 하나의 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그중에서 특별하게 반짝이는 별 같은 존재임을 조명한다. 태지혜, 송기주, 반지영, 세 여성의 이야기가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 ‘악몽’, ‘집’, ‘현재’ 같은 주제를 거치면서 갈수록 풍부해진다.

이전에 읽은 이주혜 작가의 단편 <이소 중입니다>, <여름 손님입니까>, <괄호 밖은 안녕>(가장 애정하는 단편)등에서 여태 한국문학에서 본 적 없는 걸출한 서사가 느껴져 장편에서 더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장편으로 오니 역시 풀어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게 느껴진다.

이번 소설은 사십대 여성 세 인물이 과거에 안게 된 결핍이 현재에 다른 국면으로 찾아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으로 서사를 추동하고 있다. 이토록 예측 불가능한 삶에서 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지 않으려고.

두 번의 유산과 이혼을 겪은 태지혜에게 그녀가 아꼈던 조카, 그러나 그녀를 외면하는 것 같았던 조카 우주가 임신을 했다며 찾아왔을 때 느꼈을 감정(시누이 성희가 낙태를 하고서 시어머니한테 미역국을 얻어먹는 장면과 태지혜가 유산을 하고서 시어머니한테 미역국을 얻어먹는 장면이 대치되는 것도 그렇고, 남편 성우가 오리온 자리를 보며 겁을 먹고 눈물 흘리는 태지혜의 마음을 몰라주면서 청혼을 하는 장면도 그렇고),

부모로부터 버림 받아 할머니 손에 키워진 송기주가 어느덧 자기가 딸 시오를 미워하는 걸 발견했을 때 들었던 생각(송기주의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를 일본의 모모타로 이야기 아니냐고 되묻는 남편 지철, 송기주를 겁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가 나중엔 그걸로 핀잔을 주는 지절도 그렇고, 송기주가 지철을 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 악몽을 꾸던 송기주가 시오를 낳고서부턴 아이를 버리는 악몽을 꾸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딸보다 사모의 딸을 아꼈던 운전기사 아버지가 어느 날 아파트에 놓인 여러 자전거들의 부품을 훔쳐 그 당시 사모의 딸이 탔던 분홍색 자전거를 만들어서 사십대인 딸에게 선물이라고 적어 놓은 걸 봤을 때 반지영이 느꼈을 감정(지켜주지 못한 학생 수호와 지켜주고 싶어진 학생 은우 사이에 놓인 과거와 현재의 대비도 그렇고, 단지 근처에 쓰레기 매립지 건설을 극구 반대하는 단지 내 여론과 달리 그들이 돈을 걱정하고 있으면서 아이를 볼모로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며 반대하지 않는 반지영도 그렇고)은 내가 소설이 아니라면 감히 가닿지 못했을 인물과 순간과 감정이라 여겨져 가슴 한켠을 찌르듯이 아프면서도 소중하게 와닿았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게 누군가에겐 절대 당연할 수 없는 것처럼 세 인물은 달라도 서로 다르지만 독서모임 ‘중구난방’을 통해 서로 어울린다. 여름철 대삼각형처럼 서로 다른 기원과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여름 밤하늘 은하수에서 반짝이면서 서로 연결되듯이 그들은 여름철 무주에서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뭉친다.

세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을 하나로 엮는, 작가의 서술 같기도 하고 그들의 카톡방 대화 같기도 한 짧은 파트가 등장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세 번 정도 되풀이 되다가, 이들이 모여 무주로 가면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 전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독특하기도 했고, 세 인물의 서사가 다 진득하게 와닿아서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한 부분에서 어떤 인물의 이야기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인물의 모든 이야기가 고구마 줄기처럼 술술 떠올라서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뭉텅이로 삼켜지는 느낌. 이야기가 삶의 모든 구간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느낌이라 이 소설은 이야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게 들기도 했다. 작가가 그만큼 이야기의 기민한 발신자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었다.

후반부 무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직접 체험하러 간 것 같아 재밌기도 했고 정말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여기서는 우주와 시오의 내면도 서술되어 있어서 이들의 유대가 더 돈독하게 느껴졌다. 막바지 계엄과 여의도 집회의 장면은 우리가 그 긴 겨울을 지나왔기에 나올 수 있었던 얘기라고 생각된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관찰하던 별자리를 지상으로 내려보내 수많은 응원봉의 불빛으로 은유한 게 인상 깊었다. 그게 또 이야기라는 성질과 연결되서 신기하기도 했다. 이야기란 결국 저 멀리서 반짝이다가 나에게로 다가오며 살아숨쉬게 되는 거구나, 이야기의 위력과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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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도쿄 도시 산책 시리즈
양선형 글, 민병훈 사진 / 소전서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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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윤리는 다른 영역이며 그 둘을 아슬하게 가로지르는 게 문학임을 가장 강렬하게 알려준 작가는 미시마 유키오다. 그의 만년 대작 <풍요의 바다> 시리즈에서 벌어지는 여러 범죄와 방종, 타락에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문학의 혁신, 나아가 미의 혁신이라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문장과 고전적인 형식을 갖춘 서사에 경도되었던 걸 부정할 순 없다. 그런 그를, 결단코 동의할 수 없으나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이 책, 양선형 소설가가 쓴 <미시마의 도쿄>가 알려준 것 같다.

작가가 작가를 바라보며 쓴 글이라 그런지 깊이감이 남다르다. 애착과 경멸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미시마가 썼던 작품들(꽃이 한창인 숲-가면의 고백-금색-금각사-오후의 예항-풍요의 바다) 개별 내용을 상세하면서도 비평적으로 짚을 뿐더러 작가의 생애와 연결지어 미시마가 온몸으로 밀어붙인 삶의 의도를 치밀하게 서술하는 탁월함에, 나는 시대와 공간이라는 레이어에 걸려버린 미시마를 정확히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시간과 공간에서 그렇게 작동되었던 미시마를. 삶은 자신의 의지로 사는 것이지만 역사에 휘둘리지 않을 순 없다는 것도 보았다.

그는 삶과 문학의 합일을 꿈꾸며, 그것을 몸소 실천했던 문학가였다. 그의 문학이 갖춘 고전적인 형식미는 그가 쓴 책에서 비어져나와 그의 삶에도 고루 퍼진다. <나의 편력 시대>에서 서술한 소외가 <태양과 철>에 이르러 ‘자기 개조’, ‘문무양도’로 거듭났던 그의 삶은 프로젝트나 다름 없었다. 태양과 어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육체와 감수성, 보여지는 자와 보는 자, 무예와 문예의 대립을 느끼고 삶에서 그 대립쌍을 끊임없이 통합하려 시도하면서, 끝내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단절로 그 모든 요소를 단일화하는 형식을 부여했던 그의 강인함에 넌더리가 날 정도다. 정말이지 그는 완성을 욕망한 작가, 위험한 미를 쟁취하려 했던 탐미주의자였다.

미시마가 살았던 공간을 거닐면서 시간의 격차를 서술하는 양선형 작가의 솔직한 화법도 좋았고, 미시마가 느꼈던 동경과 위기의식, 돌발적인 정치적 행보가 어떤 역사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치밀한 서술도 좋았다(그의 문학과 다르게 밈처럼 우스꽝스럽게 활용되는 그의 극우적인 행보들은 그가 추구하던 합일화란 불가능하다는 걸 함의하는 것 같다).

한편으론 문학의 길을 갈지 고민하던 시기,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불안에 시달리던 청년 미시마를 보면서 그가 싹수부터 남다른 작가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했다. 전후 급변하는 일본 사회를 보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것도 좌파우파 같은 정치 맥락을 제거하고 보면 시대의 격랑에 맞부딪히며 고뇌하는 작가의 형상임이 뚜렷하게 보여서 그가 여타 작가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그 후 행보가 문제적이지만).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 이 책이 나중에 개정되면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미시마의 대작이자 유작인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세 번째 소설 <새벽의 사원>과 네 번째 소설 <천인오쇠>에 대한 분석이다. 이 책은 세네 번째 소설 번역본이 나올 때 탈고가 되어서 이 두 소설의 분석은 들어가 있지 않다.

첫 번째 소설 <봄눈>과 두 번째 소설 <달리는 말>까지만 보면 미시마가 추구했던 궁극의 삶, 죽음으로 미가 완성되는 삶이 뚜렷하게 보인다. 거기까지만 쓰고 할복 자살을 감행했다면 그의 죽음에 여러 복잡한 의문이 생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 소설로 가면서, 소설 속 보여지는 자인 기요아키의 환생자가 서사에서 점차 멀어지고, 소설 속 보는 자인 혼다가 악의 탐미주의자로 돌변하고 끝내는 허무에 도달하는데, 미시마가 일전에 크게 표현하지 않았던 궁극적인 허무가 보인다. 아름다움은 허무하고 허무함은 아름답다는 사유로 들여다볼 수 있기는 하지만, 나는 미를 찬미했던 그가 허무에 전도되었던 그 과정이 좀 더 담겨야 이 책의 아쉬운 뒷맛이 충족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천인오쇠>를 다 읽었을 때 곧장 든 생각은 미시마가 이 책을 탈고한 날, 아름다움에 투신한 게 아니라 허무함에 투신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든 또다른 생각은, 미시마가 미에 몰두했기 때문에 윤리를 하찮게 여겼다는 점이다. 그는 윤리와 연대와 치유를 모색한 오에 겐자부로와 대조적으로 미와 우익과 천황을 찬미했다. 그의 소설에 숱하게 드러나는 부유한 생활 묘사를 들여다보는 즐거움 이면에는 길거리에 널린 약자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또 혐오)하는 기만이 들러붙어 있다. 미시마에게 그들이 보였더라도 미를 택했을 거란 생각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다.

한 작가가 쓴 책을 통해 시대와 철학을 들여다보듯이, 한 작가의 삶에 대해 쓴 책을 통해 한 작가에게 걸쳐진 그 시대와 철학을 알아간다. 이런 깊이로 문학과 세계와 시대를 통찰할 수 있어 행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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