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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널) 러브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널리고 널린 사랑 이야기 중 이희주 작가가 그려내는 사랑 이야기는 ‘광기’라는 이름으로 진단된다. 마치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이상한 소리가 들린 창고에 기어코 다가가 문을 열듯이, 꺼림칙해 하면서도 한발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광기 어린 사랑.
그러나 사랑의 발로가 순수이며 순수에는 순수선보다 순수악이 더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기가 윤리를 모르듯이 순수에는 윤리가 부재하며, 인간이 윤리와 도덕규범을 익히면서 순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보통 인간’이 되어간다는 걸 안다면, 소설 속에 돌연하게 표출된 광기 어린 사랑이 간절한 ‘기도’이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구토’임을 깨닫는 순간, 사랑에 설탕 코팅처럼 덧입혀진 광기란 도덕규범으로 포획할 수도 포착할 수도 없는 우리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던 것이며, 그것이 미친 상황이 닥치면 자신을 가둬온 윤리와 도덕을 탈락시키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순수하게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걸(‘뱃속 깊숙이 숨어 있던 미친년이 목구멍으로 기어나왔다.’(p.101), ‘미친 사람은 없어. 미치겠는 상황이 있는 거지.’(p.327)) 숨가쁘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사랑이란 곧 광기 어린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은 크리미하면서도 크리미널하고, 크리미널하면서도 크리미하다는 것을. 물론 우리는 이희주 소설의 크리미에 끌려가다 크리미널에 당도하고 말지만. 사랑하다 보니 그것이 숨기고 있던 발톱마저도 사랑하게 되고 말지만.
사랑의 광기 어린 에너지와 가열찬 충동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 속 사랑 받는 대상들은 우상으로 그려지거나 어느 순간부터 우상으로 거듭난다. 우상이 과거에 종교적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지금 우상은 온갖 미디어에서 현현하는, 실물로 볼 일이 잘 없는 아이돌(혹은 가상세계에서 더 생생한 인물)로 그려진다.
첫 소설 <0302♡>는 만나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괴담에나 나오던 ‘사거리의 미소년’이 된 ‘유리’와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친구 ‘희주’의 이야기로, 이희주 소설 세계를 열어젖히는 흥미로우면서도 모든 게 집약된, 입문하기 좋은 소설이다. 모두에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와 한 사람을 사랑하고픈 욕망의 발로가 우정이란 이름으로 아름다운 쌍을 이룬다. 그 아름다운 쌍이 지속되는 여정에 많은 고난이 자리한다. 무수한 고백과 추행, 탈취, 자살시도까지. 자신이 바랐던 순수한 사랑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다 희주의 조언에 따라 아이돌을 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유리는 길을 찾아간다. 모두에게서 사랑 받고자 거리를 두는 유리의 연습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보다 월등한 존재들,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유리의 아이돌의 꿈을 막는다. 그렇게 방황하는 와중에도 희주는 언제고 그를 ‘영원한 관찰자’로서 응원하는데,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거리의 미소년이 유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희주 자신이 소원을 쓰는 사람, 신이 되어 유리에게 그가 원하는 세상을 써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단편들을 읽어보면 이 정도의 사랑은 꽤 얌전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위 소설과 비슷한 애틋한 사랑은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에서도 나타난다. ‘미도’가 15년 전 인터넷 게임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에서 사랑하게 된 ‘선우’를 실제로 보았을 때 그들의 사랑은 끝나고 말지만, 그 온전함을 파괴하는 건 그 추운 날 교복 하나에 목도리만 걸치고 나온 ‘희도’를 걱정했다가 그의 목울대를 보고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사라진 이성 커플과, 그가 15년 후 강원도 여행에서 펜션에 들인 ‘쥐 인간’ 이성 커플이다. 위 소설도 이 소설도 사랑에 있어서의 성별을 모호하게 하거나 뒤집음으로써 기전의 도덕규범이 절취하던 사랑의 모습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퀴어적인 소설이다. 그 사랑을 실패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건 외부의 시선들이다. 그런 시선이 덧씌워지기 전 해변에서 선우와 미도가 나눴던 대화들, 그 온전하고 자유로웠던 사랑에 매료되었던 이들은 사랑에 있어서의 성별이라는 절취선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절취선을 뛰어넘고 첫 번째 소설처럼 반전도 보여주는 소설은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다. 엄마를 괴롭힌 막무가내 아빠 ‘정우’를 죽이려 했으나 그 자신이 먼저 죽어 혼이 된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 빙의되다시피 해서 자신을 엄마로 여기다가 깨어나서는, 아빠가 그토록 엄마를 괴롭히고 방치했지만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몇몇 부분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빠를 죽이는 대신 아빠의 육체에 깃들어 엄마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성별과 세대의 경계선을 뛰어넘고 폭력과 방치 괴롭힘을 복수로 갚지 않고, 그건 오로지 그들 사랑 밖에 있는 자신의 관점이란 걸 알고서 엄마의 아빠에 대한 사랑에 아빠가 되어 엄마가 원하던 사랑으로 보답하겠다는 결심은 사랑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상대가 원하는 사랑, 타자를 이해하는 사랑으로 거듭난다.
<최애의 아이>, <마유미>, <사과와 링고>는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음으로서 완수되는 이야기이다. 인물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존재하나 결단코 거기에 가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기에(‘유리’는 아이돌이고, ‘마유미’는 버츄얼 캐릭터이며, ‘마크’는 소설 뮤지컬 <더 라스트>에서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이기에), 거기에 가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일궈가다, 자신의 사랑을 훼손하는 무언가의 방해를 견디지 못하고 그 무언가를 없애버리고야 만다.
세 소설에서 공통적인 건 모성의 비틂이다. <최애의 아이>의 ‘우미’는 생활 안정, 정착이나 결혼 등의 이유가 아니라 단지 아이돌 유리를 사랑해서 유리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며, <마유미>에서 버츄얼 휴먼의 이미지는 버츄얼 휴먼을 연기하는 ‘현주’의 엄마, 불륜 상대가 바람핀 일로 다투다 아파트 아래로 추락했고 지금은 현주가 요양보호사에게 내맡겨버린 ‘경희’의 젊었을 적 사진에서 따왔으며, <사과와 링고>의 ‘사야’ ‘사라’ 자매의 엄마는 사야의 말에 꼼짝을 못하고 같은 방식으로 사라를 꼼짝 못하게 하며 사라가 사야를 돕게 만든다. 신격화되기 쉬운, 경의와 존경이라는 칭호만으로 포장해둔 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그 대상이 된 여성의 내면과 삶을 썩어가게 두는 모성의 남성적 역사를 지우고 여성들의 욕망을 가장 먼저 발견하며 사랑을 발굴해낸다. 그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가장 진실되다.
자연히 돌봄이 두드러진다. 아이돌의 아이를 갖겠다는 발상으로 아이를 가진 우미는 자신이 가진 계획성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다 그게 정치인의 아이라는 걸 알고 그 앞에서 죽인다.
‘현주’의 친구이자 ’마유미‘의 작가로 일하는 ‘나’는 자신도 일부 섞여있다 여긴 캐릭터 마유미가 현주와 현주 어머니 사이의 불완전한 돌봄, 어머니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탄생한 캐릭터란 걸 알게 되고, 요양보호사와 ‘이모님’과의 다툼으로 마유미의 실체가 커뮤니티에 폭로되자 현주가 ‘마유미’를 자신으로 드러내려는 걸 알고 현주를 자살 바위 ‘희구대’에서 밀어버린다. 이상을 남김없이 긁어내려는 현실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현주의 죽음을 ‘자살바위 이야기’에 복무하게 하면서(‘실족사’) 자신의 사랑을 온전하게 지켜낸다.
동생 ‘사야’가 돈과 애정을 무수히 갈구하던 원인이, 태생적으로 누군가로부터 돌봄 받는 게 마땅해 보이던 사야 자신이 돌볼 능력이 없는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언니 ‘사라’는, 자신이 매료된 뮤지컬에서 마지막을 불러일으키던 신 ‘마크’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계속 돈을 빌리는 ‘사야’ 사이에서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끝내고 싶어한다는 욕망을 발견하고, 사야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야와의 진정한 마지막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야가 키우는 고양이들을 죽이고 만다(인간과 신의 관계가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로 비춰진다).
‘여행은 도착하기 전까지가 가장 즐거운 거야. 막상 가면 더러운 모래사장과 버려진 캔, 애들 오줌이 가득한 미적지근한 바닷물과 나쁜 날씨와 실망밖에 없거든.
그러자 마크가 답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즐기자고. 여행을 하는 동안엔 말이야.’(p.335)
라는 말은 파국으로 치닫은 사랑 주위의 온통 망가진 모습보다도 사랑이 광기로 치달을 때의 순수를 음미하라는 뜻일 게다. 그건 보통 인간이라면 가닿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기 때문에. <마유미>의 ‘나’처럼 사랑을 완수한 후로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p.172)을 수도 있지만,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사랑의 순수가 식어버린 것, 주위가 온통 망가진 것과 다를 게 없을 테다.
<사과와 링고>는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멸망지향적 세계관이 두드러진다면, <천사와 황새>는 <최애의 아이> 같은 우생학적 세계관에 멸망론적 세계관,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세계관이 더해진 소설이다. 하늘에 인면 부유체 천사가 떠 있고, 세계적으로 불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남성도 임신할 수 있게 된 배경 아래, 남성인 ‘유리’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는 노인은 안락사시켜야 하고 사람들은 더 많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우생학 개념을 갖고 있는 애국자인 듯하지만, 유리를 사랑하며 유리의 열정 때문에 아이를 네 번 가졌던, 유리의 가정부 역할을 하는 여성 ‘우미’, 그들의 과거와,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 장난으로 시작한 진실게임을 통해 유리가 아이를 가진 게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퀴어적인 정체성 때문이라는 게 드러나며 새로운 국면으로 향한다. 우미는 꿈에서 부부가 된 둘의 온전한 결합을 상상하지만, 애초에 둘의 이야기가 어린 우미가 돌보고 있던 할머니를 목 졸라 죽이던 그때 우미의 집에 찾아간 유리가 평소와 다른 교복을 입고 있던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걸 보면(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싶지만) 그 사랑은 실현되는 순간 깨져버릴 환상일지도 모른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이 소설집 마지막에 놓인 소설로, 소설집에 같은 이름을 공유하며 여러 캐릭터로 변용되던 우미-유리 서사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첫 소설에는 마치 소설집의 주된 전제 같은 문장이 있다. 모두에게 사랑 받고 싶은 자는 신자가 되거나 아이돌이 되거나 하는 기로에 놓인다고. 그 소설의 유리가 아이돌을 택한다면, 이 마지막 소설의 유리는 둘 다 택한다. (사이비)신자이자 아이돌을.
마지막 소설은 아이돌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무수한 익명의 팬들의 연대와 경쟁과 정치를 보여준다. 한때 대학 동기였고 몇 년 전까지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며 아이돌 ‘유리’의 팬으로서 그림을 그렸던 ‘우미’와 직캠 영상을 찍었던 ‘영하’는 아이돌 유리의 고향인 군산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유리의 모교 미션스쿨에서 폭력적인 상황과 맞닦뜨린 적이 있다.
유리의 그림만 그리다가 우연히 팬픽의 세계에 빠져들고, 거기서 그려지는 유리가 진짜 유리가 아니라고 느끼면서 자신이 알아본 유리의 내면을 가지고 팬픽을 쓰기로 결심한 우미는 그 미션스쿨에서 폭행당하는 소년을-영하가 소리 질러 구하기 전까지-지켜보았던 경험에서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목격하고 내내 막혔던 팬픽의 결말을 써낸다.
우상에 대한 거침없는 환상과 내밀한 욕망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팬픽의 세계에서 어떤 소설은 새롭다 평가받거나 그 우상화를 공고히 하는 반면 어떤 소설은 애정이 담겨 있어도 비윤리적이라며 평가절하된다. 후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 같던 팬들의 익명의 바다에서 공론화되어 실명으로 뭍에 건져올려진다. 그는 팬들에게 버려진 팬, 사랑의 자격에서 탈락된 팬으로서 철저하게 그 집단에서 배제된다.
후에 유리가 아이돌 팀에서 탈퇴하고 사이비 종교의 신념에 따라 결혼을 하는 걸 보며 탈덕을 하는 우미와 달리, 영하는 그전에, 위에서의 후자 부류처럼 자신이 써낸 팬픽이 논란이 되어 팬들에 의해 탈덕되고 만다.
미션스쿨에서 폭행당하던 소년을 구출한 뒤 우미와 영하를 태울 택시가 올 때까지 그 셋이 나눠먹었던 빵은 분명히 같은 빵이지만, 폭력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소년), 폭력을 사랑처럼 관찰하고(우미), 폭력에 솔직하게 대응했던(영하) 이 셋을 후에 폭력의 재현자(이자 가해자), 폭력의 방관자, 폭력의 피해자로 거침없이 갈라버린다(그 갈라짐의 확인은 현재의 우미 시점에서 이뤄진다). 이처럼 이희주 소설에서의 사랑은 우상화되면서 광기를 띠고 진실의 알리바이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집단화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연대(혹은 결속)와 배제를 강화하는, 달콤하면서도 언제든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사랑으로 거듭난다.
경악스럽기도 하고 때론 공감조차 버겁지만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되는 이희주의 사랑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순수한 광기에 경도되지만서도 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그 위험성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지만, 거기서 돌연히 드러나는 여성 인물들의 거침없는 욕망과 성별 기준으로(특히 이성애로) 절취할 수 없는 사랑의 원형들은, 보통이 아닌 삶을 잠시 맛 본 것 같은 기분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언제고 생각하고 말하고픈 질문을 안겨다준다. 얌전하지 않은 그의 문학이 언제까지고 얌전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학동네 서평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