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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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처음 소개된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총 3권)는 치매를 앓게 된 주인공 ‘아르데볼’이 한 바이올린에 집착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역사적 악의 연대기가 밝혀지는 이야기다. 악을 주제로 골동품 수집, 사랑, 우정, 인문학, 나치, 배신, 종교, 유대인 등등 다양한 소재를 동원해 매력을 선사했기에 이번 단편집을 정말 기다려왔다.

이번 단편집 <겨울 여행>은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여행>(우리나라에선 ‘겨울 나그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도 뮐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을 테마로 하여 ‘형성’된 소설집이다.

음악가 피셔의 기이한 대위법, 슈베르트의 <겨울 여행>, 렘브란트의 그림 <철학자>가 소설 내에서 반복, 변주된다. 예술이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처럼 독특한 분위기다. 연작소설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소설마다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라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물론 유기적인 면이 있다. 첫번째 단편 <사후 작품>은 마지막 단편<겨울 여행>과 같은 배경이고(하나는 피아니스트, 하나는 음악학자로 서로 친구이지만 멀어진다),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와 <흔적>은 키킨이 주인공이며 <협상>은 <빵!>의 배후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작품들의 화법이 저마다 달라서 연작소설집이라기 보다는 카브레 문학의 갈래를 전부 보여주는 이야기의 백과사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초단편에서 이야기적인 트릭, 장치들이 많이 실험되는데 <이 분>은 각 인물들이 이 분이라는 시간에 집착하는 이야기의 연쇄이고, <빵!>은 0-1-2-3이라는 순서로 첩보의 첩보 활동이 긴박하게 이루어진다. <유언장>은 예상 못한 반전에 잠시 멍해졌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손안의 희망>, <먼지>, <보석 같은 눈>, <고트프리트 하인리히의 꿈>, <나는 기억한다>, <발라드>다. 공통점이 뭔가 하니 이야기의 완결성과 수미상관이다. <먼지>에서 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아드리아는 <나는 고백한다>의 아르데볼이 생각나고, <보석 같은 눈>은 <나는 고백한다>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갖가지 음모와 혈투를 상기시킨다. 게다가 화자가 이야기를 듣는 자들에게 거짓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고트프리트 하인리히의 꿈>은 저주 받은 재능을 떠올리게 하고, 음악적인 이야기라서 <나는 고백한다>의 초반부, 아르데볼이 바이올린을 배웠던 유년시절, 재능에 관해 논하던 부분이 생각났다.

사실 카브레의 이 단편집은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유대교를 비롯해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상대적으로 낯선 카탈루냐, 헝가리 지방이 배경이다. 키킨이 주인공인 소설들은 그 나라의 음악이며 종교 이야기가 빈번하게 혐오하는 어조로 등장하는데, 정말이지 이입, 아니 이해조차 어려운 인물이었다. 또한 단편이다보니-에필로그에서도 작가 본인이 서술했듯이-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켜야 해서 생략하거나 압축한 정보들이 많다. 어떤 이야기인지 감을 잡는 데에 시간이 좀 든다. 그것들을 차근차근 이해해야 소설의 속도감이 붙기 때문에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 <나는 고백한다>를 통해 카브레의 스타일을 먼저 파악하고 읽어야 그나마 제대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나는 기억한다>다. <나는 고백한다>에서 다뤘던 악은 스스로의 발생과 대물림이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흥미로운데, 이 짧은 작품에서도 그게 전부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기침 세번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에 잠시 생각이 중단되기도 했다.

소설마다 사랑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상대방이 떠나버려서 끝나는 방식으로 <나는 고백한다>와 똑같다. 작가의 사랑은 누군가 갑자기 떠나버리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겨울여행 #자우메카브레 #민음사 #악 #카탈루냐 #문학 #단편집 #소설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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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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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하우스 / 전지영

부조리적인 상황을 통해 죄책감, 열등감, 수치심을 파고드는 여덟 편의 이야기. 대부분의 문학들이 ‘있음’을 그려내는 것에 치중한다면, 이 소설집은 ‘없음’에 치중해서 외려 ‘있음’을 강조한다. 마치 검은 여백에 쓰인 흰 글씨를 보는 것 같다. ‘있음’을 공허로 만들어버려, 괜한 헛헛함에 ‘있음’을 찾아보려고 시도하게 하는데, 어떨 땐 그마저도 실패한다.

갈등하는데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던 심리 양상과 전개가 뒷소설로 갈수록 차츰 뚜렷해진다. 앞의 네 편은 3인칭이고 뒤의 네 편은 1인칭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단편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명쾌하기 알기 어렵게 서술되어 있어서(설명이 아닌 철저한 보여주기), 독자로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호했던 적은 처음이다.

대부분의 소설집은 읽다보면 주제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어느새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그래서 익숙해지기도 하고 어떨 땐 지겨워지기도 하는데) 이 소설집은 그런 걸 명확하게 꼬집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무언가 반복된다는 느낌 없이 변주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곱씹으면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게 했다.

아파트, 타운하우스, 상류층 저택 등등 공간 위주로 상황이 전개된다. 어떤 공간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말의 눈>), 사건이 뭉뚱그려지며 인물에게 침묵이 강요되기도 한다(<쥐>). 억눌러왔던 심정을 터뜨리기도 하고(<난간으로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떤 마음은 버리거나(<맹점>) 묻어두기도 한다(<남은 아이>).

비나 눈, 어시장 바닥에 고인 물, 정주못 등 물이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한몫한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의 경우가 감정이 가장 다양하게 느껴졌던 소설이다. 인물들의 화해가 폭우 속 아파트에서 조용히 성사되는 모습이 강렬하다. <맹점>은 제목이며 사건 전개며 인물들(특히 재복씨)이 생생해서 재밌게 읽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흥분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뒤의 세 편(<언캐니밸리>, <소리 소문 없이>, <뼈와 살>)은 예술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모두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캐니밸리>와 <소리 소문 없이>는 모두 부자 동네인 ‘청한동’을 배경으로 하는데, <소리 소문 없이>의 화자가 사는 공간(마당보다 무릎 높이가 낮은, 마당에서 안이 전부 들여다보이는 1층)에는 또 거기만의 위계가 느껴져 인상적이다.

<뼈와 살>은 예술에 접근하는 두 방식-상업성과 예술성-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알게 모르게 우위를 점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지독하게 그려져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은 <남은 아이>인데 처음 실린 <말의 눈>처럼 학교폭력 문제에 시달리는 학부모가 화자로 등장한다. <말의 눈>에서는 그 문제를 외면하고픈 징그러운 심정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밝혀진다면, <남은 아이>는 그 문제의 진상을 알고 싶어하는(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피해자 아이를 쫓아다닌다. 둘 다 난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거나 회피하거나 할 수만은 없는 인간의 마음인지라 몰입해서 읽게 된다.

여덟 편의 소설이 소설 속의 공간처럼 구조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소설집 만듦새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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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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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닳고 닳은 그 이름, 햄릿을 읽었다. 정말 많은 작품에 인용되는데, 기억나는 것도 벌써 두 작품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는 화자가 학교에서 햄릿 연극에 참여하는 부분이 있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1권 후반부에는 햄릿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부분이 있다. <율리시스>를 끝끝내 포기하게 만든 부분이 그 햄릿 파트였기에 햄릿에 대한 응분 섞인 호기심으로 읽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였다. 햄릿 유령은 극의 시작을 알릴 뿐이었고, 복수는 짜릿하게 성공하지 않고 모든 게 위태롭게 무너지는 판국에 하나의 죽음으로 성립한다.

또 시대가 얽혀있었다. 혼란스러운 정국인데도 사치(축배를 들 때마다 대포를 쏜다니)를 일삼는 덴마크 왕실은 악취가 난다.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가 덴마크의 적으로 규명되는데, 나중엔 그가 햄릿과 쌍둥이(그러나 햄릿과 다르게 성공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독교적인 이야기도 등장하고 하느님에 대한 언급도 많은데 도전적인 대목이 많아서 인상적이다.

햄릿이 광기를 연기하는 대목들, 특히 클로디어스 왕이나 거트루드 왕비나 폴로니어스 모두 풍자적으로 돌려까는 대목들이 놀랍다. <쥐덫>이라는 극중극도, 햄릿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햄릿이 복수를 준비하듯 클로디어스 왕도 대신 폴로니어스의 죽음으로 분노한 아들 레어트스를 데리고 복수를 준비하는데(이 부분은 오딧세이아 같은 고전이 연상된다), 두 복수가 부딪히는 마지막 결투 장면은 동선이 자세히 나오지 않고 금방 마무리 되어 조금 아쉬웠다.

독특한 건 햄릿이나 클로디어스 왕이나 상대방이 잘못한 게 맞는지 검증 과정을 거친다는 거였다. 그러나 검증 과정이 한 번이었던 왕과 달리 햄릿은 두 번 거친다는 게(아버지의 죽음을 보여주는 연극으로 한 번, 자기가 하는 게 복수가 아니라 고용과 봉급이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대목에서 한 번) 햄릿을 이 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햄릿의 신세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는 지금 왕이 잘못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아는데, 아무도, 어머니인 왕비조차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되는 건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령까지 보는 햄릿이다. 그래서 햄릿이 광기를 연기한 대목은 사람들에게-설령 연기가 아니었다 해도-자연스럽게 비쳤을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으로 사람들을 방심케 하고 복수를 꿈꿨던 햄릿이지만, 대신 폴로니어스를 죽이는 바람에 왕이 레어트스를 데리고 복수할 명분을 주고 말았다.

왕이 햄릿의 복수 의지를 알아챘든 못 알아챘든 햄릿을 처리했을 것으로 느껴져서 섬뜩한 한편, 자신의 죄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아는 대목은 의외였다(그런데도 햄릿을 죽이려 한다고?).

이야기가 급박하게 전개되는 만큼 진행이 빨라서 좋지만 이야기의 맥락에 빈 부분들이 보이기도 했다(희곡이 쓰인 당시 사람들이라면 다 알았겠지만).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아의 경우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리고(게다가 다른 인물의 대사로만 처리된다), 왕비 거트루드의 경우 그녀의 죄책감과 후회를 자세하게 다뤄줬으면 했는데(누군가와의 대화보다는 방백으로) 금방 죽어버려서 아쉬웠다.

무엇보다 유령인 햄릿 왕이 저지른 잘못도 있는 듯한데, 그것이 클로디어스나 왕비의 대사로 밝혀졌다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읽으면서 내내 사람들의 대사가 이토록 시적, 문학적일 수가 있을까, 이래서 대가구나 생각했다. 구식의 느낌 없이 지금도 유효한 교훈과 날카로운 통찰이 대사에 잘 녹아 있어서 밑줄 치며 읽기도 했다.

고전인데도 불구하고 재미가 있는 것이, 이래서 앞으로도 고전으로 남겠구나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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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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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마체라트는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다. 그는 간호사 브루노에게 순결한 종이 500장을 달라고 하고는 그 종이에다 무언가를 막힘없이 써나가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진술서 같기도 한데, 마침 그에게 어떤 혐의가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신의 혐의를 서술하지 않고 50년 전, 그러니까 1899년의 어느 감자밭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의 치마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런 수고를 마다않는 것은 그가 쓰는 글이 자신의 혐의를 넘어 세상의, 세계의, 유럽의, 독일의 혐의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설이 워낙 방대한 만큼 여러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1부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2부는 2차 세계대전을, 3부는 종전 후를 다루고 있다. 또 1부는 단치히 자유시의 이야기를, 2부는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러시아군에게 장악된 단치히 시(그단스크 시)의 이야기를, 3부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부는 오스카가 양철북을 고집하는 이야기, 2부는 양철북을 단념하는 이야기, 3부는 양철북을 되찾고 예술가로 거듭나는 이아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다르게는 1부는 오스카가 스스로 추락하여 난쟁이가 되는 이야기, 2부는 아들 혹은 의붓동생인 쿠르트에 의해 또 한번 추락하여 조금 성장한 꼽추가 되는 이야기, 3부는 등에 자란 혹을 행운의 상징물로 여기게 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스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난쟁이다. 오스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이미 다 자랐다는 걸 깨닫고는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선물하겠다는 어머니의 말 말고는 아무것도 세상에 바라지 않게 된다. 그는 자라면 가게를 물려주겠다는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는데) 알프레트 마체라트의 말을 거역하고, 세 살 생일 날,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하실에 추락시켜 버린다. 그 후로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부수는 능력을 갖게 된 오스카는, 자신의 능력과 선물 받은 양철북 연주가 조화를 이루게 되고서부터는 여기저기서 난동을, 깽판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은 독일 나치의 연단에 몰래 숨어들어 양철북을 연주해서 군가를 따라부르는 군중을 왈츠에 맞춰 노래 부르고 춤추는 사람들로 바꿔버리고, 가톨릭 교회에 가서는 불륜에 관해 고해성사를 하는 어머니 아그네스를 두고 제단에 올라가 소년 예수 조각에게 자신의 양철북과 북채를 쥐어주고는 예수가 연주를 하지 못하자 실망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온갖 외설적인 행동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감행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겠다.

이 이상의 열거도 가능하지만 그러면 이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건 이 소설이 다분히 신성모독적이며 동시에 악과 죄의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이다. 그건 오스카의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방과 전구로 계시를 받은 오스카, 예수를 모독하는 오스카, 악마와 대화하는 오스카, 괴테와 라스푸틴을 교본으로 삼은 오스카, 밤중에 쇼윈도를 깨뜨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안의 물건을 훔쳐가는지 지켜보는 오스카, 먼지떨이단이라는 불량 소년 무리들을 데리고 교회의 물품을 훔치며 예수 행세를 하는 오스카, 두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오스카, 불리할 땐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오스카, 망상에 빠져 간호사를 강간하려 했던 오스카, 양철북 연주로 사람들을 세 살 아이처럼 쥐락펴락하는 오스카. 처음엔 선악에 대한 분간 없이 행동하던 오스카는 성장하며 분간할 수 있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벌인다(그래서 후회도 한다만…).

오스카는 너무나 문제적인 악동이다. 그러나 그가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주변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이야기에서 오스카를 잠시 빼면 확연하게 나타난다. 스스럼 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어른들, 전쟁에 무관심한 어른들, 스스럼 없이 나치를 지지하는 어른들, 아이들 앞에서 강간을 하는 군인들, 명령 때문에 수녀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군인들,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쟁 후의 동부 피난민들, 죄책감을 과거에 묻어두려는 사람들, 스스로 울 수 없어 양파를 썰어가며 우는 사람들.

이러한 풍자와 역설, 비판은 오스카가 줄곧 양철북을 두드리고 소리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행동에도 담겨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현실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을 세워 자신을 유리시키고 있다는 걸 쉽게 잊는다. 그 벽이 유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카는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유리벽을 넘고 깨뜨리는 소리의 울림으로 사람들의 내면을 건드리고 그 이상한 현실의 리듬을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닐까.

소설의 막바지 장면, 오스카가 친구에게 자신을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부탁하고선 스스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그가 참지 못하고 마구 웃어대는 모습은 그 모든 악과 죄를 쉬쉬하고 묵인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풍자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이 장면은 소설의 시작인 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의 도망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소년 예수가 석고가 된 채로 힘을 잃은 시대에 그 지위를 이어 받아 그 스스로가 악의 예수(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가 되어 예술가(그는 연주자, 모델, 조각가 등으로 활동한다)로 군림하는 오스카의 모습은 그래서 전후 독일사회에 대한 진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굉장히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긴장하고 펼쳐들었지만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술술 읽었다(연단 파트부터 확실히 재미를 느꼈다). 소설이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파트당 20~30 페이지 안팎으로 분량이 일정하며, 파트마다 이야기가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오스카가 우리 독자를 자주 언급하며 묘사의 완급을 조절하기도 하고 몇몇 사건은 요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로서 배려 받는 느낌도 든다.

물론 세계대전이 배경인 만큼 읽어나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계사 지식은 필요한 것 같다. 나같은 세계사 초보자에게는 맥락을 알기 어려운 사건들이 암시가 많이 되어 있어서 대략 어떤 느낌이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어렵다. 그래서 각주를 상세하게 달아줄 법도 한데(특히 지명에 관해) 그렇지 않다는 게 의외였고 아쉬웠다. 어떤 단어의 경우, 앞에서 언급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다시 언급될 때 각주가 등장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보아야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소설 같기도 했다. 문단을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구나, 짐작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즐거워진다.

그래도 소설적 재미가 없는 건 전혀 아니다. 강렬한 이미지(말 대가리와 뱀장어, 비등산, 얀과 마체라트, 그레프의 죽음)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한 사건들(탑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러 극장의 유리창을 깨트리는 장면,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 선생과 싸우고 자퇴하는 오스카, 니오베 목각에 관해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마술적 리얼리즘이 연상되는 상황들(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가 항구에서 도주하는 모습, 달 아래서 폴란드 기병대가 나타나는 모습), 여러 상황을 신들린 듯이 섞어버리는 문장들(믿음 소망 사랑 파트, 다이빙이 언급되는 부분, 30세 파트)이 문학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이야기적 구성도 뛰어나서 떡밥 회수도 잘해낸다. 앞에서 등장했다 사라진 인물이 다시 나타났을 때 너무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인물이 족히 60명은 넘게 등장하는데 저마다 워낙 캐릭터성이 강해서 누가 누군지 금방 파악된다(이건 정말 엄청난 장점이다). 몇몇 장면은 인물한테 애착을 가지고 읽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폴란드 우체국 전투 장면과 그 후의 스카트 카드 놀이 장면은 긴박감과 슬픔이 가득하다. 오스카의 친구 헤어베르트, 하얀 장갑의 슈거 레오, 오스카처럼 난쟁이이나 나이가 많고 전선극장의 지도자이기도 한 스승 베브라, 죽은 가족들을 살아있다고 믿고 말을 거는 파인골트 씨,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시작인 안나 브론스키가 인상적이다.

읽으면서 여러 소설이 떠올랐던 것 같다. 특히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가 떠올랐는데 지독하게 악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주인공이 그 악에 물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런 문학이 굳건히 자리해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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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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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 예소연

초연결 시대, 그로 인한 몰이해의 시대다. 사람들은 서로한테서 기꺼이 멀어지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비극, 참사를 목격할 때에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초연결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초연결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해롭고 무가치한 것들을 눈앞에 징그러울만치 들이민다면, 비극으로 인해 촉발되는 연결의 감각은 우리를 잇고 있던, 아주 얇아 보이지 않는 실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달까.

그래서 비극을 목격한 어떤 순간에, 아주 잠시였지만, 죽음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은 적도 있다. 비극으로 연결된 실이 모두를 태우지 않을까-무기력에 압도된 나머지-상상하기도 했다.

죽음이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남겨진, 혹은 살아 남은 경우는 뭐라 해야 할까. 죽음 같은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를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비극은 죽음과 삶의 영역을 역치시키고 그 근간을 뒤흔들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고통엔, 고통 말고 다른 이름이 없다.

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비극들-캄보디아의 압사 사고,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동이 엄마의 투병과 죽음, 혜란의 불행 등-은 그 숨어있던 실을, 투명에 가까웠던 실의 실체를 드러낸다. 나름대로 그 일들에 괴로워하고 슬퍼했지만 동이는 외면했다. 외면하며, 외면하지 않으려던 친구 석이마저도 외면했다. 하지만 석이의 실종과 석이를 찾으러 간 캄보디아에서 만난 삐썻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실과 이어진 석이를 새롭게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 실을 잡아당기며 석이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분량이 적기도 하고 중반부터 결말이 예상이 가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 ’실‘에 대한 이야기로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실은 나와 너를 동시에, 그 존재를 동시에 감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발견하고, 또 타인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그 실의 무한한 연결을 타고 가다보면 영원한 무언가(죽음도 초월하는 무언가)에 닿을 수도 있다는 걸 소설이 말하고 있다. 아득한 만큼 더 많이 더 길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심연을. 그 심연을, 슬픔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 실에 믿음이라고 이름 붙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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