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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오스카 마체라트는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다. 그는 간호사 브루노에게 순결한 종이 500장을 달라고 하고는 그 종이에다 무언가를 막힘없이 써나가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진술서 같기도 한데, 마침 그에게 어떤 혐의가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신의 혐의를 서술하지 않고 50년 전, 그러니까 1899년의 어느 감자밭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의 치마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런 수고를 마다않는 것은 그가 쓰는 글이 자신의 혐의를 넘어 세상의, 세계의, 유럽의, 독일의 혐의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설이 워낙 방대한 만큼 여러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1부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2부는 2차 세계대전을, 3부는 종전 후를 다루고 있다. 또 1부는 단치히 자유시의 이야기를, 2부는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러시아군에게 장악된 단치히 시(그단스크 시)의 이야기를, 3부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부는 오스카가 양철북을 고집하는 이야기, 2부는 양철북을 단념하는 이야기, 3부는 양철북을 되찾고 예술가로 거듭나는 이아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다르게는 1부는 오스카가 스스로 추락하여 난쟁이가 되는 이야기, 2부는 아들 혹은 의붓동생인 쿠르트에 의해 또 한번 추락하여 조금 성장한 꼽추가 되는 이야기, 3부는 등에 자란 혹을 행운의 상징물로 여기게 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스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난쟁이다. 오스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이미 다 자랐다는 걸 깨닫고는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선물하겠다는 어머니의 말 말고는 아무것도 세상에 바라지 않게 된다. 그는 자라면 가게를 물려주겠다는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는데) 알프레트 마체라트의 말을 거역하고, 세 살 생일 날,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하실에 추락시켜 버린다. 그 후로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부수는 능력을 갖게 된 오스카는, 자신의 능력과 선물 받은 양철북 연주가 조화를 이루게 되고서부터는 여기저기서 난동을, 깽판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은 독일 나치의 연단에 몰래 숨어들어 양철북을 연주해서 군가를 따라부르는 군중을 왈츠에 맞춰 노래 부르고 춤추는 사람들로 바꿔버리고, 가톨릭 교회에 가서는 불륜에 관해 고해성사를 하는 어머니 아그네스를 두고 제단에 올라가 소년 예수 조각에게 자신의 양철북과 북채를 쥐어주고는 예수가 연주를 하지 못하자 실망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온갖 외설적인 행동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감행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겠다.
이 이상의 열거도 가능하지만 그러면 이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건 이 소설이 다분히 신성모독적이며 동시에 악과 죄의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이다. 그건 오스카의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방과 전구로 계시를 받은 오스카, 예수를 모독하는 오스카, 악마와 대화하는 오스카, 괴테와 라스푸틴을 교본으로 삼은 오스카, 밤중에 쇼윈도를 깨뜨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안의 물건을 훔쳐가는지 지켜보는 오스카, 먼지떨이단이라는 불량 소년 무리들을 데리고 교회의 물품을 훔치며 예수 행세를 하는 오스카, 두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오스카, 불리할 땐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오스카, 망상에 빠져 간호사를 강간하려 했던 오스카, 양철북 연주로 사람들을 세 살 아이처럼 쥐락펴락하는 오스카. 처음엔 선악에 대한 분간 없이 행동하던 오스카는 성장하며 분간할 수 있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벌인다(그래서 후회도 한다만…).
오스카는 너무나 문제적인 악동이다. 그러나 그가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주변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이야기에서 오스카를 잠시 빼면 확연하게 나타난다. 스스럼 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어른들, 전쟁에 무관심한 어른들, 스스럼 없이 나치를 지지하는 어른들, 아이들 앞에서 강간을 하는 군인들, 명령 때문에 수녀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군인들,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쟁 후의 동부 피난민들, 죄책감을 과거에 묻어두려는 사람들, 스스로 울 수 없어 양파를 썰어가며 우는 사람들.
이러한 풍자와 역설, 비판은 오스카가 줄곧 양철북을 두드리고 소리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행동에도 담겨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현실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을 세워 자신을 유리시키고 있다는 걸 쉽게 잊는다. 그 벽이 유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카는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유리벽을 넘고 깨뜨리는 소리의 울림으로 사람들의 내면을 건드리고 그 이상한 현실의 리듬을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닐까.
소설의 막바지 장면, 오스카가 친구에게 자신을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부탁하고선 스스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그가 참지 못하고 마구 웃어대는 모습은 그 모든 악과 죄를 쉬쉬하고 묵인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풍자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이 장면은 소설의 시작인 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의 도망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소년 예수가 석고가 된 채로 힘을 잃은 시대에 그 지위를 이어 받아 그 스스로가 악의 예수(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가 되어 예술가(그는 연주자, 모델, 조각가 등으로 활동한다)로 군림하는 오스카의 모습은 그래서 전후 독일사회에 대한 진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굉장히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긴장하고 펼쳐들었지만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술술 읽었다(연단 파트부터 확실히 재미를 느꼈다). 소설이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파트당 20~30 페이지 안팎으로 분량이 일정하며, 파트마다 이야기가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오스카가 우리 독자를 자주 언급하며 묘사의 완급을 조절하기도 하고 몇몇 사건은 요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로서 배려 받는 느낌도 든다.
물론 세계대전이 배경인 만큼 읽어나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계사 지식은 필요한 것 같다. 나같은 세계사 초보자에게는 맥락을 알기 어려운 사건들이 암시가 많이 되어 있어서 대략 어떤 느낌이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어렵다. 그래서 각주를 상세하게 달아줄 법도 한데(특히 지명에 관해) 그렇지 않다는 게 의외였고 아쉬웠다. 어떤 단어의 경우, 앞에서 언급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다시 언급될 때 각주가 등장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보아야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소설 같기도 했다. 문단을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구나, 짐작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즐거워진다.
그래도 소설적 재미가 없는 건 전혀 아니다. 강렬한 이미지(말 대가리와 뱀장어, 비등산, 얀과 마체라트, 그레프의 죽음)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한 사건들(탑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러 극장의 유리창을 깨트리는 장면,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 선생과 싸우고 자퇴하는 오스카, 니오베 목각에 관해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마술적 리얼리즘이 연상되는 상황들(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가 항구에서 도주하는 모습, 달 아래서 폴란드 기병대가 나타나는 모습), 여러 상황을 신들린 듯이 섞어버리는 문장들(믿음 소망 사랑 파트, 다이빙이 언급되는 부분, 30세 파트)이 문학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이야기적 구성도 뛰어나서 떡밥 회수도 잘해낸다. 앞에서 등장했다 사라진 인물이 다시 나타났을 때 너무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인물이 족히 60명은 넘게 등장하는데 저마다 워낙 캐릭터성이 강해서 누가 누군지 금방 파악된다(이건 정말 엄청난 장점이다). 몇몇 장면은 인물한테 애착을 가지고 읽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폴란드 우체국 전투 장면과 그 후의 스카트 카드 놀이 장면은 긴박감과 슬픔이 가득하다. 오스카의 친구 헤어베르트, 하얀 장갑의 슈거 레오, 오스카처럼 난쟁이이나 나이가 많고 전선극장의 지도자이기도 한 스승 베브라, 죽은 가족들을 살아있다고 믿고 말을 거는 파인골트 씨,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시작인 안나 브론스키가 인상적이다.
읽으면서 여러 소설이 떠올랐던 것 같다. 특히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가 떠올랐는데 지독하게 악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주인공이 그 악에 물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런 문학이 굳건히 자리해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