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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평점 :
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닳고 닳은 그 이름, 햄릿을 읽었다. 정말 많은 작품에 인용되는데, 기억나는 것도 벌써 두 작품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는 화자가 학교에서 햄릿 연극에 참여하는 부분이 있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1권 후반부에는 햄릿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부분이 있다. <율리시스>를 끝끝내 포기하게 만든 부분이 그 햄릿 파트였기에 햄릿에 대한 응분 섞인 호기심으로 읽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였다. 햄릿 유령은 극의 시작을 알릴 뿐이었고, 복수는 짜릿하게 성공하지 않고 모든 게 위태롭게 무너지는 판국에 하나의 죽음으로 성립한다.
또 시대가 얽혀있었다. 혼란스러운 정국인데도 사치(축배를 들 때마다 대포를 쏜다니)를 일삼는 덴마크 왕실은 악취가 난다.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가 덴마크의 적으로 규명되는데, 나중엔 그가 햄릿과 쌍둥이(그러나 햄릿과 다르게 성공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독교적인 이야기도 등장하고 하느님에 대한 언급도 많은데 도전적인 대목이 많아서 인상적이다.
햄릿이 광기를 연기하는 대목들, 특히 클로디어스 왕이나 거트루드 왕비나 폴로니어스 모두 풍자적으로 돌려까는 대목들이 놀랍다. <쥐덫>이라는 극중극도, 햄릿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햄릿이 복수를 준비하듯 클로디어스 왕도 대신 폴로니어스의 죽음으로 분노한 아들 레어트스를 데리고 복수를 준비하는데(이 부분은 오딧세이아 같은 고전이 연상된다), 두 복수가 부딪히는 마지막 결투 장면은 동선이 자세히 나오지 않고 금방 마무리 되어 조금 아쉬웠다.
독특한 건 햄릿이나 클로디어스 왕이나 상대방이 잘못한 게 맞는지 검증 과정을 거친다는 거였다. 그러나 검증 과정이 한 번이었던 왕과 달리 햄릿은 두 번 거친다는 게(아버지의 죽음을 보여주는 연극으로 한 번, 자기가 하는 게 복수가 아니라 고용과 봉급이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대목에서 한 번) 햄릿을 이 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햄릿의 신세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는 지금 왕이 잘못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아는데, 아무도, 어머니인 왕비조차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되는 건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령까지 보는 햄릿이다. 그래서 햄릿이 광기를 연기한 대목은 사람들에게-설령 연기가 아니었다 해도-자연스럽게 비쳤을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으로 사람들을 방심케 하고 복수를 꿈꿨던 햄릿이지만, 대신 폴로니어스를 죽이는 바람에 왕이 레어트스를 데리고 복수할 명분을 주고 말았다.
왕이 햄릿의 복수 의지를 알아챘든 못 알아챘든 햄릿을 처리했을 것으로 느껴져서 섬뜩한 한편, 자신의 죄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아는 대목은 의외였다(그런데도 햄릿을 죽이려 한다고?).
이야기가 급박하게 전개되는 만큼 진행이 빨라서 좋지만 이야기의 맥락에 빈 부분들이 보이기도 했다(희곡이 쓰인 당시 사람들이라면 다 알았겠지만).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아의 경우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리고(게다가 다른 인물의 대사로만 처리된다), 왕비 거트루드의 경우 그녀의 죄책감과 후회를 자세하게 다뤄줬으면 했는데(누군가와의 대화보다는 방백으로) 금방 죽어버려서 아쉬웠다.
무엇보다 유령인 햄릿 왕이 저지른 잘못도 있는 듯한데, 그것이 클로디어스나 왕비의 대사로 밝혀졌다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읽으면서 내내 사람들의 대사가 이토록 시적, 문학적일 수가 있을까, 이래서 대가구나 생각했다. 구식의 느낌 없이 지금도 유효한 교훈과 날카로운 통찰이 대사에 잘 녹아 있어서 밑줄 치며 읽기도 했다.
고전인데도 불구하고 재미가 있는 것이, 이래서 앞으로도 고전으로 남겠구나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