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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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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첫 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화양극장>이나 <김일성이 죽던 해>, <오즈>의 근사함도 있지만 <언두>와 <OK, Boomer>,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어긋남과 표독스러움도 있었다.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무언가는 굉장히 사랑할 수 있듯이, 사실 그게 인간이듯이, 소설에는 인간의 선하려는 의지와 쉽사리 악으로 닿는 마음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번 작품집은 표독스러움에 더 날을 세워 마치 날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야기라는 먹잇감을 채가는 것처럼 전개한다. 이야기의 장악력이 한결 강해졌고 거기에 속도감까지 더해졌다.

첫번째 소설집을 묶는 단어가 세대였다면 두번째 소설집은-세대를 포함하는-사랑과 닮음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은 대부분 사랑에서 기원한다. 애정. 유의할 점은 사랑이 윤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랑들은 처음엔 윤리의 범주에 있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윤리를 벗어난다. <길티 클럽: 호랑이 키우기>의 화자가 아동학대를 한 김곤 감독을 변호하게 되는 부분과,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의 의견보다 앞서서 인간의 희망을 이용하려는 부분, <혼모노>에서 장수할멈이 깃든 신애기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신애기를 넘어서려고 피를 흘리면서도 작두를 타는 무당 문수가 그렇다. 그들은 그게 그 순간엔 유일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잘못됐다는 걸, 도가 지나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은 후에 온다. 혹은 오지 않거나.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광기라고 애써 포장하고 거리감을 부여하려 해도, 우리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씨앗은 사랑이며, 인간 누구에게나 그런 씨앗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누구나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정하는 대상을 닮으려 애쓰다 그 대상을 넘어서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잉태기>처럼 닮지 않으려고 애쓰다 닮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윤리를 벗어난 사랑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똑같이 광기로 보인다고 알려주고 있다. 딸 서진을 원정출산을 보내려는 엄마서희와 범죄라며 뜯어말리는 시부 지중헌(두 이름 모두 소설에 나오진 않지만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밝히셨다)은 극명한 대비에 놓여있는 듯하지만, 서진을 향한 애정의 크기는 똑같다. 방향만 다를 뿐. 서진을 가졌을 때부터 시부의 온갖 간섭을 받았던 화자 서희는 시부를 극도로 경계하는 방식으로 서진을 돌본다. 시부는 아이 때부터 아꼈던 서진이 아이를 갖게 되자 서희의 영역 밖에서 서진을 챙기려 한다. 엄마의 방식과 할아버지(별명이 지지)의 방식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던 서진은 그들이 갈등하게 되면서 자신도 갈등하게 된다. 결국 서희와 시부가 추구하는 사랑의 인력이 날이갈수록 세지면서 서진을 있어야 할 자리, 있고 싶은 자리에서 끌어내고 만다. 끝끝내 이 가족의 자장에서 서진은 없어지고 엄마와 시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사랑의 열감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이 흉악하다.

사랑의 광기는 악이 되기도 쉽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에서 여재화와 구보승이 설계하는 건축물은 수련원으로 불리지만 실은 고문실이다. 여재화는 건축계에서 살아남고자 이 일을 받아들이고 건축학과 학생인 구보승, 성실하긴 하지만 욕심 없어 보이던 그를 조수로 데려온다. 여재화가 이곳이 그냥 수련원이 아니라 고문실이라는 걸 밝히고서부터 구보승이 열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서늘하면서도 흥미롭다(나치 수용소의 설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여재화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데 구보승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위치를 헷갈리게 만들고 천장을 높게 만들어 다른 취조실의 비명이 울리도록 한다. 특히 취조실에 창문 넣는 걸 반대했던 구보승이, 거기에 대고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하다며 반대했던 여재화의 의견을 다르게 받아들여,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만 빛이 들 수 있는 수직창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소름 돋는다. 여재화는 구보승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막지 않고 설계자를 구보승으로 올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어쩌면 구보승보다도 인간을 위한 건축이 뭔지 알았던 여재화가 더 악한 걸지도 모른다(줄곧 여재화의 시점에서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구보승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때 여재화가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인간의 양면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여재화는 그의 선배 Y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여재화가 욕심없고 순한 놈이었다고 말하자 놀란다. 자신이 구보승을 조수로 데려온 이유도 그런 욕심 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위픽에서 나왔던 중편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도 건축이 소재라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인간을 위한 건축을-그러나 상반된 관점으로-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재화가 제자인 구보승이 자기와 닮았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 것과 반대로 <우호적 감정>의 수잔, 스타트업에서 시니어급인 그녀는 주니어급인 동료 알렉스가 사회초년생 시절 열정 넘치던 자신과 닮았다는 걸 바로 안다. 대표인 맥스보다 나이가 한참 많고 뒤늦게 스카웃 되어 팀에 잘 섞이지 못하는 시니어급 동료 진을 포용하려고 애쓰는 알렉스를 보며 동료 수잔은 자신도 사회초년생 때 모두를 포용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그 말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진은 스타트업의 규칙을 저버리는 발언을 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수잔은 회사를 관둔다. 알렉스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부장이었던 진이 수잔이 나간 뒤의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하는 모습과 거기에 최대한 맞춰주려는 대표 맥스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수잔이 느꼈던 감각들이 이제 알렉스에게도 찾아올 거라는 징조처럼 보인다.

발표 시기상으로 가장 마지막인 <스무드>는 닮음에 있어 다른 소설들과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인 듀이와 태극기 부대원인 미스터 김은 서로를 보며 각자의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정을 붙인다. 게다가 그 정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관심, 반성으로까지 뻗어가는데… 서로 너무 다른데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깨끗하게 화합하는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낯선데, 독자인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빠진 상태에서 너무 다른 지점에 놓인 인물들의 매끈한 연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이해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오독도 정독도 필요한 듯이 느껴진다. 오독도 정독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소설이다. 그래서 독특하다.

마지막에 실린 <메탈>도 닮음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서정적이기도 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학교 동아리에서 메탈음악으로 맺어지고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꽃 핀 시우, 조현, 우림의 ‘코발트’적인 우정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하는 과정은 닮음의 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애정하는 사람만이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모습은 뭉클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어떤 열정은 길어지다보면 고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집 같은 열정마저 사라지면 헛헛함에 삶의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지니 일단 계속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림의 메탈에 대한 애정은 열정이었을까 고집이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또. 십대의 우정이란 타임캡슐 같다. 인상적인 순간과 장면들에 더불어 미래에 꺼내볼 많은 약속들이 거기에 있다. 우림이 마지막에 조현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때의 타임캡슐을 찾아 땅을 파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녹슬었더라도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성격이 워낙 다른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이 작가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독자로서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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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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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의 시들은 개인의 세계로 침참하는 시들, 그것이 깊이로 느껴지기 전에 벽으로 느껴지는 난해한 시들과 달리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세계를 소개하듯이 경유해 개인의 영역을 넓히는 시처럼 느껴진다. 시가 막힘 없이 읽힐 정도로 직관적이고, 상징이나 비유도 복잡하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시에서 발견하고 대화하며 투영되는 존재들이 비인간, 낯설지만 이미 ‘있어왔던’ 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적이다. 시는 유려한 문장을 쏟아붓는 미지의 매혹이 아니라 귀한 발견의 순간이 정제된 언어로 전개되어, 읽는 나를 넓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은 제목에 ‘물질’이 붙어있고 시 안에도 <세계 끝의 버섯>,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말 등 과학적 인용이 많은 학술적인 시집이다. 시라는 주관성의 세계에 과학의 객관성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 같다. 그렇다고 시가 객관적 설명으로 채워지면서 딱딱해지는 건 아니다. 물질이 갖고 있는 특성-세상에 널려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만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희덕의 시는 과학의 한계와 시의 한계를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파괴적인 힘이 기술과 자본으로 포장되기 쉬운 과학의 속성과, 아름다운 암호로 물러나기 쉬운 시의 속성을 보완한다.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를 상호이익을 위한 공생 관계라 정의한 진화생물학자의 말을 의심하며 그 관계가 사랑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모습, 피와 석유가 포르피린이라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고 말하는 시, 담수가 선진국이 포진한 북반구로 끌어올려지면서 남반구에 기후문제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 기후위기를 알리기 위해 가져와 전시한 빙하를 사람들이 마구 부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서늘하게 표현한 시, 아보카도 하나에 여러 국가들의 노동과 희생이 치러진다는 발견 같은 비판적인 시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물구나무 설 수 없는 내가 물구나무종임을 선언한 너를 찾아가는 <물구나무종>, 털이 벗겨진 닭과 맨 몸인 나를 서로 동등한 입장으로 사고하는 <닭과 나>는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에코 페미니즘적 관점이 묻어나는 시다. 인간이 물질을 사용하는 손을 지상에 닿는 뿌리로 변화시키는 물구나무라는 비유가 독특하다.

나에겐 3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계엄과 탄핵을 통해 공원에서 광장으로 복귀한 여의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이 저지른 참상, 히잡으로 일어난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 spc계열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호주의 원주민 동화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사과의 날, 돈을 갚는 은행과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자본주의로 엮이는 순간, 고독사가 존엄사로 이름이 뒤바뀌는 슬픈 순간, 한국전쟁 속에서 이념의 경계에 서게 되는 순간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고 있어서다. 특히 <조지 오웰의 장미>는 정치와 정원이 유사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인간 사회의 일이 인간 사회만의 일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해서 인상적이다.

4부를 읽으면서는 새로운 가능성과 여전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호주 시인 사만다 포크너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한국의 버섯괴 호주의 산호초가 하나로 엮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근사하고, 전동 휠체어 체험을 통해 인간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보게 하고 인간도 물질임을 역으로 느끼게 해서 놀랍다. 마지막에 실린 <손과 손으로>는 실뜨기를 통해 우리가 연결된 채로 서로 차례를 주고받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드러낸다.

이렇게 50여편의 시들, 세계와 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인간중심주의에 한정된 시적 대상을 비인간으로 넓히는 시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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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5 소설 보다
강보라.성해나.윤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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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을 선물하는 세 편의 소설들.

강보라의 <바우어의 정원>은 은화의 오디션 장면이나 정림, 무재의 삶이 몇 부분 비어 있고, 성해나의 <스무드>는 소설 속 예술가 ‘제프’의 작품 이름이지만 그 작품의 이야기가 아니며, 윤단의 <남은 여름>은 서현이 친구의 죽음과 전 직장에서의 고충에 부채감을 느끼는 이야기지만 친구의 삶과 전 직장 상사인 추팀장의 이야기, 서현의 직장 생활에 대해선 상당 부분 비어있다. 그렇게 비어 있는데도 소설은 알차다.

꽉 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비어 있는데도 알차고, 그 여백을 아쉬운 감상으로 남게 하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근사하게 안겨주는 소설들도 좋다고 느꼈다. 하나씩 짚어보자면,

<바우어의 정원>은 정원에서 초원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연기라는 형식의 거짓됨에 흥미를 느끼는데, 연기가 삶을 재구성해볼 수도 있게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좋았다. 또한 그들에게 배우가 정체성이자 직업이며 삶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초반에 제목의 의미가 제시되어 놀랐지만 뒤로갈수록 그 제목이 더욱 확장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아픔을 오래오래 소화하는 정림과 은화의 대화(혹은 대사)며, 마지막 장면의 참담함과 과거가 따라오는 묘사는 몇 번을 봐도 근사하다.

<스무드>는 재외동포 화자 ‘듀이’가 태극기 부대 집회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여기서 나-독자는 철저하게 외부인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두 인물이 만나 화합을 이뤄내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내가 그들보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제프 쿤스의 매끈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질감과 익숙함과 닮아 있기도 하다). 갈등 없는 세상은 평화로울까? 그건 오히려 모두가 하나의 편인 전체주의적인 세상이 아닐까 싶다. 낯선 인물들의 익숙한 모습을 보면서 현대의 인간은 제각각의 밀실을 지닌 채 광장을 떠도는 건 아닐까 싶었다. 밀실은 너무나 커지는 반면 광장은 협소해지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또한 어떤 오해는 너무나 오해되면 이해에 가까워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해한 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 남은 여름>은 분위기와 밀도가 빛나는 소설이었다. 은근한 거리두기와 덤덤한 다정이 느껴지는 서술, 푸른 소파가 나타내는 상징-소파는 오로지 앉기 위해 만들어진 가구지만 동시에 눕거나 기대기 위한 가구이기도 한 것-이 여름의 적막감, 화자가 느끼는 부채감을 되려 강조한다. 송지현의 소설에서 느꼈던 여백의 미, 덜어냄의 미를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에게 남은 것들은 누군가가 떠나고 남겨진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 살아왔던 흔적을 빌려 살고 또 누군가에게 돌려준다고.

공교롭게도 소설 배경이 소설 순서대로 겨울, 여름, 여름이다보니 독자에게 봄이라는 여백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쓰는 자의 펜이 읽는 자의 펜으로 옮겨가는 연결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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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주차장 찾기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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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기를 쭉 따라온 독자는 작금의 오한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것이다.

그는 좀 이상해졌다.

오한기를 따라온 독자들은 이 말에 반신반의할 것이다. 오한기는 원래(?) 이상했으니까. 그는 말하자면 이상한 나라의 오한기였다. 그가 그리는 세상은 너무 이상했다. 병든 소, 친친나트, 헤밍웨이, 홍학, 햄버거, 똥, 벌목공, 토끼 머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모든 게 등장하는데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정말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 오한기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이상했던 오한기가 또 이상해졌다고 한 건 뭐랄까, 오한기 소설에서 그려지는 그 이상한 나라가 그냥 이상한 나라도 아니고 저기 있는 나라도 아닌, 내가 아마 평생 땅을 딛고 살 이 나라-대한민국-라는 게 오한기의 최근 소설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한기의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성을 갖춘, 현실밀착형의 소설이 되었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나는 오한기가 답십리도서관 상주작가로 분한 중편 <인간만세>부터라고 추측한다. 그때부터 오한기는 소설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전처럼 비범하게 이상한 인물도 등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산책하기 좋은 날>)이나 이명박(<펜팔>), 팽 사부(<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 그러나 전부터 소설에 자주 등장한 진진은 그의 아내가 되었고, 급기야 그들의 딸 ‘주동’까지 소설에 등장하면서 그의 소설은 온가족 총동원! 소설이 되었다(물론 가족애가 차오르는 화목한 소설은 아니다.)

도대체 뭘 깨달았기에 지금의 오한기는 이런 소설을 쓰고 (앉아)있는가, 그것이 내가 <인간만세>, <산책하기 좋은 날>, <나의 즐거운 육아일기>, <민트초코 브라우니>를 따라간 이유다. 그걸 좀 알 수 있었던 게 이번 연작소설집 <무료 주차장 찾기>다.

세 편의 소설에서 오한기의 목적은 분명하다. ‘정착’하는 것.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물론 주로 먹여살리는 사람은 아내 진진)이다. 소설 속 오한기는 가족이 있고 작가생활 11년 차인데도 여전히 정착을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왜일까?

지금부터 나 여기서 살 거야, 라고 주장할 순 있더라도 진짜로 거기서 살 수는 없다.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법이 전류처럼 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법이 나타나 당신을 막아선다.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감전. 그러면 법을 착실히 지키면 되겠구나, 법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면 되겠구나, 같은 겸허한 마음이 생길 텐데, 그때 법이 불쑥 손을 내밀고 말한다. 돈. 돈을 넣어주세요.

현대의 법은 자본주의라는 하드웨어(게임기)에 깃든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가 견고한 나머지, 법만 주구장창 업데이트(어떤 부분이 업그레이드이고 다운그레이드인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하는 구조가 지금의 세상이다. 하드웨어의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 모르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서 작가에게,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하지만) 전세사기까지 당한 그런 작가에게 돈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번 소설은 정착을 추구하는 소설이자, 그 때문에 직업을 배회하는 소설이다. 직업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배회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배회와 요즘의 배회는 다르다. 배회라는 말에는 불길함과 낭만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 밤길을 배회하는 걸 상상해보라.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함, 무슨 일이 벌어지든 참여해보겠다는 낭만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요즘 배회는, 툭하면 방해 받는다. 무언갈 느낄 새도 감상하거나 분위기 잡을 새도 없이. 어딜 배회하든, 누군가의 눈에 띄면 그 행위는 점거가 되기 십상이다. 누군가 밤길을 걷는 당신을 보며 말한다. 불법 체류자다!

첫 번째 소설 <무료 주차장 찾기>는 무료 주차장을 찾아다니며 과거의 배회가 남아있는지 탐구하는 소설이다. 물론 우리의 소설가 오한기는 탐구에서 슬쩍 물러나 주동과 같은 유치원 학부모인 조나가 탐구에 열중하는 걸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에세이 아니야?’에서 ‘이거 소설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건너가는 부분은 주동이 다니는 유치원 버스기사가 어느 날 무료 주차장을 찾으러 간다는 메시지만 남긴 채 유치원 버스를 몰고 실종되는 부분부터다. 이 미스터리는 자본주의 미스터리를 함축하고 있다. 원장의 정규직 압박에 주차비를 전부 내던 버스기사, 감당할 수 없어 박차고 무료의 세계를 찾아 떠난다. 이상하지 않은가? 과거의 모험은 영광과 풍요를 찾아 떠나는 거였는데 지금의 모험은 그저 무료, 돈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는 거라니.

이 자본주의의 미스터리는 ‘공간’에서 드러난다. 공간에 돈을 붙이는 것. 자릿세,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유지비까지 포함해서 존재세, 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차를 생각해보라. 보험료와 수리비, 유지비, 기름값… 그리고 주차장. 지하 혹은 지상으로 뻗어나가는 기계식 주차장. 주차장의 위치, 시간별로, 주말 평일 구분으로 천차만별인 금액들. 끝도 없다.

문제는 이 존재세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존재에 대한 책임의 차원으로서. 구입한다고 해서 소유의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돈이란 낸만큼 더 존재할 수 있다는 허락의 수단이다. 우리는 돈만큼 존재할 수 있다.

유치원 버스기사의 자본주의 미스터리는 조나가 하는 말이나 오한기의 상상을 통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모험으로 뒤바뀐다. 무료 주차장이라니. 그런 희귀한 장소가 서울에 있다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싸게’ 샀는지 자랑하는 게 우리나라의 특징인 만큼, 무료, 공짜는 우리나라에서 희소재에 속한다. 그런데 섬뜩하지 않은가. 무료가 바닥 나고 있다니(무료를 겨우 찾아도 그 주위에 불법이라는 지뢰가 무수히 깔려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무료 고갈의 시대, 배회 불가의 시대에 유일하게 배회가 가능한 건 직업이다. 직업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생활의 개념이다. 일하면 돈을 번다, 일이 내 삶의 보람이다. 돈과 보람의 일치. 관문을 거쳐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관문을 거쳐 직업을 바꾸거나 관둘 수 있다. 그게 직업의 배회 가능성이다. 문제는 배회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세상이 너무나 배회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대, 알바의 시대, 부업의 시대, 직업 배회의 시대, 직업 정착 불가의 시대. 오한기는 소설에서 갖가지 직업을 배회하는데, 이 모습은 탐구, 추구라기보다는 쫓겨남, 떠돎이다. 배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면서 배회를 유도하는 자본주의. 오한기는 배회와 배회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배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자, 배회를 유도하는 자-고용주, 자본가의 급작스런 탈선이다. 오한기를 블로거로 고용한 장 과장은 임금체불로 오한기의 심기를 건드린다. 그건 뭐랄까 기계식 주차장 운영자가 고액 체납자인 게 밝혀진 것과 비슷하다. 이제 그 주차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거기에 이미 차를 주차한 차주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차들이 침범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야말로 ‘무법지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무법은 언제까지나 불법 내부에서만 가능하다(이는 자연상태가 불법이라는 뜻일까?). 불법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러니까 합법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무법은 불법이 된다. 오한기가 건물 주차장에서 장 과장의 빈 차를 찾아 타고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 장면이 짜릿하면서도 섬뜩한 건 그 때문이다. 지금의 그가 곧 무법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앉아서 등을 기대고 있지만 선택의 기로에 위태롭게 서 있는 상태다. 불법의 인간이 될지, 합법의 인간이 될지.

두 번째 소설 <숲 체험>은 제목부터가 굉장한 오해를 사고 시작한다. 얼핏 보면 주동이 숲 체험을 하는 올림픽공원이 소설의 주요 배경 같지만 이는 함정이다. 의도가 깃든 공간은 공사가 중지된 아파트 공터와 무인문구점이다. 이 두 공간은 자본주의의 첨단과 극단을 모두 보여준다. (그래도 제목이 숲 체험인데… 하며 힐링을 상상하면 오산. 이 숲은 아파트 숲이다. 아이들은 나무숲으로, 어른들은 아파트숲으로.)

주동을 숲 체험에 데려다주고 주차할 곳을 떠돌며 애를 먹던 오한기. 주차에 집착하다 자발적으로 주차 관련 블로그를 쓰게 된 그는 인기를 타다 광고를 의뢰받는다.

그때 그가 홍보한 업체-주차요원B가 운영하는 ‘학부모를 위한 힐링 숲 체험(아이들의 숲 체험을 간 동안 차와 함께 남겨진 부모들을 위한 힐링의 공간)’은 자본주의는 실패 속에서도 창조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공사가 중단된 현장을 다른 용도로 일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원일까 잠식일까. 주차요원B는 주차 무료라고 크게 홍보하지만 그밖의 다른 것들이 유료라는 사실은 감춘다. 이는 자본주의의 시적 허용이다. 사람들은 이 시에 열광하고 작가인 자본주의는 성공한다(는 아주 행복한 이야기).

무인문구점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줄여버리더니 아예 없애버렸다는 걸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진진의 직장 동료이자 무인문구점 창업주인 장 과장(앞 소설과는 다른 사람이다)을 통해 무인문구점 매니저를 하게 된 오한기. 그는 cctv로 그곳을 감시하다가 우연히 아이 돌봄까지 맡게 되면서 돈을 제대로 벌어들기 시작한다.

앞의 소설에서 무료 주차장을 찾은 차주의 심정이 무인문구점에 온 부모(아이를 둔)의 심정과 연결되는 걸까? 그게 맞지만 또한 아니기도 하다. 왜냐면 이건 무료가 아니니까. 부모가 돈을 지불하니까. 이 부분은 아이는 돌봐야 하는 존재이며, 부모 혹은 누군가는 그 존재를 부담해야 한다는 걸 상징한다. 인구가 있어야 유지되는 사회가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걸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오한기는 깨닫는다. 맞다, 나 작가인데. 작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이 다시금 떠오르자 그는 모든 걸 그만둔다. 다시금 주동을 숲 체험에 데려다주고 주차할 공간을, 그래서 잠시나마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찾는다. 어쩌면 직업 세계에서 작가는 유령이 아닐까. 무엇으로도 빙의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있는 유령.

<숲 체험> 마지막에서 우연히 주차할 자리를 찾은 오한기가 마찬가지로 그 자리를 본 SUV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올리는 모습은 주차와 정착을 향한 집착이자 자본주의가 소진시키는 문학을 향해 목숨을 걸고 다가가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좀 더 삶과 죽음의 차원으로 나아갔다고도.

지금까지 정리하자면 오한기는 무료 주차장을 통해 자본주의를 인식했고, 공사장과 무인문구점으로 자본주의의 극단과 첨단을 두루 살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그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저격! 날카로운 일필휘지! 그러나 자본주의는 아직 한발 더 남았다.

그 한 발은 다름 아닌 배려다. 자본주의는 구매를 유도한다. 유혹한다. 속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완전 소비자를 배신하진 않는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배려한다. 단순히 마음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반품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 물건한테는 도로 돌아가도 괜찮겠냐고 묻지 않으면서.

마지막 소설 <반품알바>는 소비자를 배려하는 자본주의에서 탈락되는 것들을 수면 위로 올린다. 선배의 주선으로 이국에서 들여온 도마뱀 반품 업무를 맡게 된 오한기(여기까지 왔으면 오한기가 상품과 생명, 비인간을 건드린다는 걸 곧장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국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 말만 반품이지 실은 폐기다. 외래종이라 방생이 불가하고, 키우려면 온도와 습도 등 환경을 갖춰야 한다. 물론 한국에서 새 주인을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믿고 수락했으나 일이 꼬이고 마는데, 선배한테선 극소량이라 들었던 반품이 많아졌고 또 한국에서는 자신의 능력 한에서 도마뱀을 팔기가 어렵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수술로 인해 비어있는 부모의 집에 반품된 도마뱀들을 갖다놓는 오한기의 모습은 사회로 나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부모의 둥지로 돌아온 오한기 자신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돌아옴은 돌아옴이 맞을까?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소비되지 못하다 반품된 건 아닐까? 누가 그를 구매하고 반품했는가? 그의 무엇이 반품 사유인가? 그는 물건인가? 그는 무엇인가? 반품된 존재를 끝까지 감당하려던 오한기가 소설 마지막에 내린 선택은 정말이지 서늘하다. <반품알바>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한 발에 대한 오한기만의 서글프고 서늘한 대응사격이다.

이 세 소설은 진진의 관점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첫 소설에서 진진은 경주로 내려가서 일한다. 두 번째 소설에서 진진은 같이 살고 있다. 세 번째 소설에서 진진은 해고를 당하고 오한기와 같이 직업을 배회한다. 그 다음 진진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부디 진진과 주동 오한기 셋이 붙어지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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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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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과 4학년인 ‘재서’가 문교수의 권유로 동기인 ‘이본’과 함께 경주에서 서머 스쿨에 참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경장편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마음 한 켠에 추억을 새기는 여름의 인상이 이번 소설에서도 진하게 이어진다. 그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야기에 나를 맡겨놓은 채 소설 속 풍경을 감상하듯이 읽었다.

건축학과로 전과해 교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본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과 질투, 시기심, 교수들에게 ‘숙제’가 되기 마련인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며 권정연 씨와 홍자애 씨, 문교수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재서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나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소설과 나의 거리가 분명함(국문과와 건축학과)에도 불구하고 나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처럼 빠져 읽었다.

이번 소설에 쓰인 건축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이다. 읽으면서 건축과 소설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이승우 작가님의 문장이 건축처럼 느껴졌던 것도 떠올랐고). 건축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해도 현실이라는 지반 위에 세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그만큼 세상과 밀접하다(문교수가 수업시간에 ‘캐드’ 프로그램 대신 제도용 연필로 등고선을 직접 그리게 한 것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소설도 상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거기서 세계관과 인물, 갈등과 구조를 설계하고 써나가야 제대로 지어질 수 있다. 그래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남지 않을 수 있다.

건축과 소설의 유사성은 오래된 고택을 두고 ‘개축’할 것이냐 ‘재건’할 것이냐 갈등하는 이 소설을-오래전부터 전해져왔으나 현재 위기에 처한 무언가를 개선할 것인지 아니면 버리고 새로 만들 것인지를 따져보는-예술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또 주목해야 하는 점은 거기서 누가 ‘살고 있다’는 것, 그러니 설계자가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면 안된다는 것, 그 타인의 삶을 두루 이해해야 개선방안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타인인 홍사애 씨와 권정연 씨는 몇 번의 지진을 겪고서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지 불안한 상황. 집을 살펴본 이본은 재건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화자도 갈팡질팡하다가 재건을 생각하지만, 문교수의 권유로 경주를 둘러보고 첨성대와 문화재들을 관람하며 그들은 조화, 건축 용어인 ‘차경’을 떠올린다. 문화재들이 천년, 즉 사람이 열 번을 나고 죽는 시간을 버티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어주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세상과의 조화가 건축에서 중요하다는 걸(이 고택이 이곳 산내면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의 마음은 이제 개축으로 기운다.

여기까지는 막힘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소설의 후반부에서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분위기가 뒤바뀌나 싶었는데 그 뒤에 이웃들이 그들을 구해주고 서로 손잡으며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부분을 보며, 이 소설이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 ‘개축’하기로 하는 결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행위이자, 상상으로 현실을 보완하는 행위다. 그렇게 상상과 현실은 연결된다. 그러나 때론 현실 자체가 상상으로 보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게 휘청거리기도 한다. 집을 고치기도 전인데 또다시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건축이며 상상이며 전부 무용해질 것만 같은 그런 순간에, 그 어긋나는 세상에서 서로 손잡아주는 사람들(타인들)이 있다. 소설이 차근차근 전달하는 메시지-세상과 건축의 조화-는 소설의 말미에 타인과 나의 조화로 도약한다. 그렇게 건축의 인본주의는 소설의 인본주의와 이어지고 나는 타인과 세상과 이어진다. 그 지점이 감동적이었다.

소설에서 나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많이 느껴졌는데 최근 심각한 산불문제가 떠올라 착잡하기도 했다. 호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요즘 부쩍 산불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엉망이 줄어들고 모두가 덜 다치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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