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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주차장 찾기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4월
평점 :
오한기를 쭉 따라온 독자는 작금의 오한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것이다.
그는 좀 이상해졌다.
오한기를 따라온 독자들은 이 말에 반신반의할 것이다. 오한기는 원래(?) 이상했으니까. 그는 말하자면 이상한 나라의 오한기였다. 그가 그리는 세상은 너무 이상했다. 병든 소, 친친나트, 헤밍웨이, 홍학, 햄버거, 똥, 벌목공, 토끼 머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모든 게 등장하는데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정말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 오한기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이상했던 오한기가 또 이상해졌다고 한 건 뭐랄까, 오한기 소설에서 그려지는 그 이상한 나라가 그냥 이상한 나라도 아니고 저기 있는 나라도 아닌, 내가 아마 평생 땅을 딛고 살 이 나라-대한민국-라는 게 오한기의 최근 소설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한기의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성을 갖춘, 현실밀착형의 소설이 되었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나는 오한기가 답십리도서관 상주작가로 분한 중편 <인간만세>부터라고 추측한다. 그때부터 오한기는 소설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전처럼 비범하게 이상한 인물도 등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산책하기 좋은 날>)이나 이명박(<펜팔>), 팽 사부(<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 그러나 전부터 소설에 자주 등장한 진진은 그의 아내가 되었고, 급기야 그들의 딸 ‘주동’까지 소설에 등장하면서 그의 소설은 온가족 총동원! 소설이 되었다(물론 가족애가 차오르는 화목한 소설은 아니다.)
도대체 뭘 깨달았기에 지금의 오한기는 이런 소설을 쓰고 (앉아)있는가, 그것이 내가 <인간만세>, <산책하기 좋은 날>, <나의 즐거운 육아일기>, <민트초코 브라우니>를 따라간 이유다. 그걸 좀 알 수 있었던 게 이번 연작소설집 <무료 주차장 찾기>다.
세 편의 소설에서 오한기의 목적은 분명하다. ‘정착’하는 것.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물론 주로 먹여살리는 사람은 아내 진진)이다. 소설 속 오한기는 가족이 있고 작가생활 11년 차인데도 여전히 정착을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왜일까?
지금부터 나 여기서 살 거야, 라고 주장할 순 있더라도 진짜로 거기서 살 수는 없다.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법이 전류처럼 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법이 나타나 당신을 막아선다.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감전. 그러면 법을 착실히 지키면 되겠구나, 법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면 되겠구나, 같은 겸허한 마음이 생길 텐데, 그때 법이 불쑥 손을 내밀고 말한다. 돈. 돈을 넣어주세요.
현대의 법은 자본주의라는 하드웨어(게임기)에 깃든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가 견고한 나머지, 법만 주구장창 업데이트(어떤 부분이 업그레이드이고 다운그레이드인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하는 구조가 지금의 세상이다. 하드웨어의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 모르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서 작가에게,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하지만) 전세사기까지 당한 그런 작가에게 돈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번 소설은 정착을 추구하는 소설이자, 그 때문에 직업을 배회하는 소설이다. 직업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배회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배회와 요즘의 배회는 다르다. 배회라는 말에는 불길함과 낭만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 밤길을 배회하는 걸 상상해보라.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함, 무슨 일이 벌어지든 참여해보겠다는 낭만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요즘 배회는, 툭하면 방해 받는다. 무언갈 느낄 새도 감상하거나 분위기 잡을 새도 없이. 어딜 배회하든, 누군가의 눈에 띄면 그 행위는 점거가 되기 십상이다. 누군가 밤길을 걷는 당신을 보며 말한다. 불법 체류자다!
첫 번째 소설 <무료 주차장 찾기>는 무료 주차장을 찾아다니며 과거의 배회가 남아있는지 탐구하는 소설이다. 물론 우리의 소설가 오한기는 탐구에서 슬쩍 물러나 주동과 같은 유치원 학부모인 조나가 탐구에 열중하는 걸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에세이 아니야?’에서 ‘이거 소설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건너가는 부분은 주동이 다니는 유치원 버스기사가 어느 날 무료 주차장을 찾으러 간다는 메시지만 남긴 채 유치원 버스를 몰고 실종되는 부분부터다. 이 미스터리는 자본주의 미스터리를 함축하고 있다. 원장의 정규직 압박에 주차비를 전부 내던 버스기사, 감당할 수 없어 박차고 무료의 세계를 찾아 떠난다. 이상하지 않은가? 과거의 모험은 영광과 풍요를 찾아 떠나는 거였는데 지금의 모험은 그저 무료, 돈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는 거라니.
이 자본주의의 미스터리는 ‘공간’에서 드러난다. 공간에 돈을 붙이는 것. 자릿세,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유지비까지 포함해서 존재세, 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차를 생각해보라. 보험료와 수리비, 유지비, 기름값… 그리고 주차장. 지하 혹은 지상으로 뻗어나가는 기계식 주차장. 주차장의 위치, 시간별로, 주말 평일 구분으로 천차만별인 금액들. 끝도 없다.
문제는 이 존재세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존재에 대한 책임의 차원으로서. 구입한다고 해서 소유의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돈이란 낸만큼 더 존재할 수 있다는 허락의 수단이다. 우리는 돈만큼 존재할 수 있다.
유치원 버스기사의 자본주의 미스터리는 조나가 하는 말이나 오한기의 상상을 통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모험으로 뒤바뀐다. 무료 주차장이라니. 그런 희귀한 장소가 서울에 있다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싸게’ 샀는지 자랑하는 게 우리나라의 특징인 만큼, 무료, 공짜는 우리나라에서 희소재에 속한다. 그런데 섬뜩하지 않은가. 무료가 바닥 나고 있다니(무료를 겨우 찾아도 그 주위에 불법이라는 지뢰가 무수히 깔려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무료 고갈의 시대, 배회 불가의 시대에 유일하게 배회가 가능한 건 직업이다. 직업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생활의 개념이다. 일하면 돈을 번다, 일이 내 삶의 보람이다. 돈과 보람의 일치. 관문을 거쳐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관문을 거쳐 직업을 바꾸거나 관둘 수 있다. 그게 직업의 배회 가능성이다. 문제는 배회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세상이 너무나 배회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대, 알바의 시대, 부업의 시대, 직업 배회의 시대, 직업 정착 불가의 시대. 오한기는 소설에서 갖가지 직업을 배회하는데, 이 모습은 탐구, 추구라기보다는 쫓겨남, 떠돎이다. 배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면서 배회를 유도하는 자본주의. 오한기는 배회와 배회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배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자, 배회를 유도하는 자-고용주, 자본가의 급작스런 탈선이다. 오한기를 블로거로 고용한 장 과장은 임금체불로 오한기의 심기를 건드린다. 그건 뭐랄까 기계식 주차장 운영자가 고액 체납자인 게 밝혀진 것과 비슷하다. 이제 그 주차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거기에 이미 차를 주차한 차주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차들이 침범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야말로 ‘무법지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무법은 언제까지나 불법 내부에서만 가능하다(이는 자연상태가 불법이라는 뜻일까?). 불법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러니까 합법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무법은 불법이 된다. 오한기가 건물 주차장에서 장 과장의 빈 차를 찾아 타고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 장면이 짜릿하면서도 섬뜩한 건 그 때문이다. 지금의 그가 곧 무법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앉아서 등을 기대고 있지만 선택의 기로에 위태롭게 서 있는 상태다. 불법의 인간이 될지, 합법의 인간이 될지.
두 번째 소설 <숲 체험>은 제목부터가 굉장한 오해를 사고 시작한다. 얼핏 보면 주동이 숲 체험을 하는 올림픽공원이 소설의 주요 배경 같지만 이는 함정이다. 의도가 깃든 공간은 공사가 중지된 아파트 공터와 무인문구점이다. 이 두 공간은 자본주의의 첨단과 극단을 모두 보여준다. (그래도 제목이 숲 체험인데… 하며 힐링을 상상하면 오산. 이 숲은 아파트 숲이다. 아이들은 나무숲으로, 어른들은 아파트숲으로.)
주동을 숲 체험에 데려다주고 주차할 곳을 떠돌며 애를 먹던 오한기. 주차에 집착하다 자발적으로 주차 관련 블로그를 쓰게 된 그는 인기를 타다 광고를 의뢰받는다.
그때 그가 홍보한 업체-주차요원B가 운영하는 ‘학부모를 위한 힐링 숲 체험(아이들의 숲 체험을 간 동안 차와 함께 남겨진 부모들을 위한 힐링의 공간)’은 자본주의는 실패 속에서도 창조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공사가 중단된 현장을 다른 용도로 일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원일까 잠식일까. 주차요원B는 주차 무료라고 크게 홍보하지만 그밖의 다른 것들이 유료라는 사실은 감춘다. 이는 자본주의의 시적 허용이다. 사람들은 이 시에 열광하고 작가인 자본주의는 성공한다(는 아주 행복한 이야기).
무인문구점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줄여버리더니 아예 없애버렸다는 걸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진진의 직장 동료이자 무인문구점 창업주인 장 과장(앞 소설과는 다른 사람이다)을 통해 무인문구점 매니저를 하게 된 오한기. 그는 cctv로 그곳을 감시하다가 우연히 아이 돌봄까지 맡게 되면서 돈을 제대로 벌어들기 시작한다.
앞의 소설에서 무료 주차장을 찾은 차주의 심정이 무인문구점에 온 부모(아이를 둔)의 심정과 연결되는 걸까? 그게 맞지만 또한 아니기도 하다. 왜냐면 이건 무료가 아니니까. 부모가 돈을 지불하니까. 이 부분은 아이는 돌봐야 하는 존재이며, 부모 혹은 누군가는 그 존재를 부담해야 한다는 걸 상징한다. 인구가 있어야 유지되는 사회가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걸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오한기는 깨닫는다. 맞다, 나 작가인데. 작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이 다시금 떠오르자 그는 모든 걸 그만둔다. 다시금 주동을 숲 체험에 데려다주고 주차할 공간을, 그래서 잠시나마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찾는다. 어쩌면 직업 세계에서 작가는 유령이 아닐까. 무엇으로도 빙의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있는 유령.
<숲 체험> 마지막에서 우연히 주차할 자리를 찾은 오한기가 마찬가지로 그 자리를 본 SUV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올리는 모습은 주차와 정착을 향한 집착이자 자본주의가 소진시키는 문학을 향해 목숨을 걸고 다가가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좀 더 삶과 죽음의 차원으로 나아갔다고도.
지금까지 정리하자면 오한기는 무료 주차장을 통해 자본주의를 인식했고, 공사장과 무인문구점으로 자본주의의 극단과 첨단을 두루 살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그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저격! 날카로운 일필휘지! 그러나 자본주의는 아직 한발 더 남았다.
그 한 발은 다름 아닌 배려다. 자본주의는 구매를 유도한다. 유혹한다. 속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완전 소비자를 배신하진 않는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배려한다. 단순히 마음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반품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 물건한테는 도로 돌아가도 괜찮겠냐고 묻지 않으면서.
마지막 소설 <반품알바>는 소비자를 배려하는 자본주의에서 탈락되는 것들을 수면 위로 올린다. 선배의 주선으로 이국에서 들여온 도마뱀 반품 업무를 맡게 된 오한기(여기까지 왔으면 오한기가 상품과 생명, 비인간을 건드린다는 걸 곧장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국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 말만 반품이지 실은 폐기다. 외래종이라 방생이 불가하고, 키우려면 온도와 습도 등 환경을 갖춰야 한다. 물론 한국에서 새 주인을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믿고 수락했으나 일이 꼬이고 마는데, 선배한테선 극소량이라 들었던 반품이 많아졌고 또 한국에서는 자신의 능력 한에서 도마뱀을 팔기가 어렵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수술로 인해 비어있는 부모의 집에 반품된 도마뱀들을 갖다놓는 오한기의 모습은 사회로 나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부모의 둥지로 돌아온 오한기 자신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돌아옴은 돌아옴이 맞을까?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소비되지 못하다 반품된 건 아닐까? 누가 그를 구매하고 반품했는가? 그의 무엇이 반품 사유인가? 그는 물건인가? 그는 무엇인가? 반품된 존재를 끝까지 감당하려던 오한기가 소설 마지막에 내린 선택은 정말이지 서늘하다. <반품알바>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한 발에 대한 오한기만의 서글프고 서늘한 대응사격이다.
이 세 소설은 진진의 관점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첫 소설에서 진진은 경주로 내려가서 일한다. 두 번째 소설에서 진진은 같이 살고 있다. 세 번째 소설에서 진진은 해고를 당하고 오한기와 같이 직업을 배회한다. 그 다음 진진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부디 진진과 주동 오한기 셋이 붙어지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