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동정탑 -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구단 리에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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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신주쿠 교엔 한복판에 교도소 탑이 세워질 예정이다. 명칭은 '심퍼시 타워 도쿄'. 그곳에 수용되는 범죄자들은 동정받아야 할 사람을 뜻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로 불릴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도심 내 교도소 건설 문제를 다루는 사회적인 소설 같은데… 자세히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범죄가 개인의 됨됨이가 아니라 사회구조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동정 받아야 한다는 뜨거운 논쟁 아래 그와는 좀 많이 다른, 건축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미래를 염두하고 설계하는 ‘건축’과, 사유의 건축물인 ‘언어’를 끊임없이 이어붙이려는 이야기이며, 인공지능마저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독백의 시대, 그러나 누구도 누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소음의 시대에 말이 갖는 이중성과 위험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다보니 아쿠카타와상을 두 권 연속 읽었는데 둘 다 뭔가 인물이 비틀려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물론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고 비약적인 전개, 독특한 사유와 고집스러운 철학, 의식의 흐름 전개와 모호하고 환상적인 서술,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상징들로 인해 이야기 자체가 어렵다. 인물들의 언어가 처음엔 다르지만 나중엔 죄다 비슷해져 작가라는 신이 너무 잘 보인다는 한계도 존재한다(AI를 사용해서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상 직후 논란이 되었는데 소설 내에서 AI가 비판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다지 분량도 없어서 문제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묘하게 문장이 술술 잘 읽히며 강렬하게 전달하는 게 있기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아래부터는 내가 이해한 걸 바탕으로 전개한 줄거리다.

‘심퍼시 타워 도쿄’. 왜 그렇게 부를까? 서른 일곱의 성공한 건축가인 마키나 사라는 어렸을 적엔 수학천재였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지배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축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축이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미래가 보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심퍼시 타워 도쿄(가칭) 건축 설계 공모에 출전하기 위해 신주쿠 교엔 근처, 탑이 들어설 곳이 보이는 호텔에 숙박하며 스케치를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샤워를 하다 문득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녀는 말이 곧 현실이 된다고 믿고,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가 일본인이 일본어를 버리려 하는 증거라 여기고 경멸하며, 머릿속의 검열관에 의해 차별의 말을 과하게 삼가하려는, 언어에 있어서 예민한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명칭은 명칭이고, 설계는 설계대로 하면 된다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명칭이 자꾸 걸린다.

어떤 건물이 지어질 이유에서 가장 앞서 놓이는 것은 그 건물에 살 사람이다. 여기서 그들은 바로 범죄자, 아니 호모 미세라빌리스다. 이 용어는 사회학자이자 행복학자인 마사키 세토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자신의 책 <호모 미세라빌리스,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서 범죄가 개인의 인격이 아닌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중첩적이고 연쇄적인 고리)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서, 범죄를 저지른 그들이 사실 최초의 피해자였을 거라며 동정받아야 할 인간으로 규정하며, '범죄자'라는 말이 가진 차별성을 배제하고자 호모 미세라빌리스라는 말을 생각해낸 것이다. 반대로 도덕적이며 행복한 사람들을 '호모 펠릭스'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호모 미세라빌리스를 동정할 것을 촉구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그는 믿는다.
그렇게 섬세하게 그곳의 거주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생겨났으니, 그 거주지 또한 색다르게 불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마키나 사라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떠들썩한 논란 끝에 지어진 도쿄 국립경기장을 보게 된다. 저녁놀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빛나는 국립경기장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신만의 강박적인 언어적 사유를 통해 바라보자, 그 경기장이 질문을 하고 있으며 북쪽 공원 일대에 세워질 그 탑이 그 해답이 될 거라는 생각에 미치고, 그 해답을 내놓을 사람이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떠올리며 드로잉을 시작한다.

다쿠토는 아름다운 외모와 옷차림 덕에 우연히 마키나 사라에게 호감을 사게 된다. 거짓말에 한번 올라타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줄어든다고 믿는 다쿠토는 자신이 고급 의류점에서 일하지만 가난하게 산다며 집세를 밝히기도 한다. 그는 올림픽이 인류의 평화,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고, 올림픽에서 치러지는 스포츠 경기는 그를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한다. 현대가 경쟁이라는 태그를 덧씌움으로써 지워버린 올림픽-평화의 연결고리를 감각하지 못한다. 또한 건축에 어떤 의미가 깃든다는 것, 언어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자꾸만 이상하게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결핍과 그림자를 본다.
그는 호텔에서 그녀가 노트북에 띄어놓은 건축 공모안에서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이름을 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도쿄도 동정탑'?이라고 바꿔 말한다. 그의 말이 자신이 여태껏 고민하던 명칭에 대한 해답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 탑이 세워지면 그 안에서 새롭게 바뀌어야 할 명칭들(교도관 같은)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만든 언어의 감옥에 갇힌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동정하며 막아선다.

저녁을 후에 그들은 교엔 산책에 나선다. 술에 취해 겁 없이 여기저기 활보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그녀가 추한 현실을 아름다움으로 장악하고 싶은 지배욕을 가졌으며(그 때문에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끊임없이 믿고 그 비전을 마치 '답을 확인하듯'(102) 따라가기에 미래를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교엔으로 진입한 그는 공간과 자신의 관계성이 역전된 것 같은 기분, 그리하여 자신의 언어와 사유가 이 공간에 치환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는 낮에 도쿄도 동정탑 건설 반대 시위 현장이었던 곳에 놓여있는 여러 플래카드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호모 미세라빌리스, 그들의 행복을 위해 탑을 짓는 게 인류의 평화 평등을 위한 길일까 묻는다. 타워의 명칭에 대한 해답은 찾았으나 거기에 살 사람들에 대해선 해답을 찾지 못한 그녀, 자신의 의견이 차별적인 발언이자 상처가 될 거라며 경계하던 그녀는 일순간 이곳에 도쿄도 동정탑이 들어선 듯한 묘사를 마치 질문에 답변하는 AI처럼 끊임없이 내뱉기 시작한다. 그 언어에 기겁하다가도 어느 순간 설득되어 마치 지금 눈앞에 도쿄도 동정탑이 세워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다쿠토는 그 건물이 ‘압도적인 파괴’(111)임을 느끼지만 그것에 집어삼켜지고 만다. 그리고 마키나 사라가 자기 자신을 두 팔로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누워있는 걸 발견한 순간, 환상의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탑이 모래로 뒤바뀌며 무너져내린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중반부다. 이후로는 4년후, 탑이 지어진 2030년으로 건너간다.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 받는 미국인 삼류 기자 맥스 클라인은 지상 71층짜리 원기둥 타워인 도쿄도 동정탑 취재를 나가 그곳의 서포터(교도관)로 일하는 다쿠토와 대화를 나눈다. 360도 어느 방향이든 입장가능한 자동문,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 등, 안과 밖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게 설계한 마키나 사라의 의도가 엿보이는 공간을 참을성 있게 잘 살피던 맥스 클라인은 70, 71층의 도서관에서 자유 복장으로, 남녀 구분 없이 평화롭게 생활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를 보며 결국 격노하게 된다. 범죄자 안락사 계획 등의 도쿄도 동정탑에 관한 음모론을 늘어놓고, 행복 증진을 위해 비교하는 등의 부정적인 말이 금지된 이 공간이야말로 예쁜 거짓말을 잘 하는, 진심을 능숙하게 숨기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담겨있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정식 명칭이 있으면서 도쿄도 동정탑으로도 부르며 언어적 혼란을 초래하고 언어를 무한히 생성하면서 감추려는 게 뭐냐고, 일본인이 일본어를 버린다면 무엇일지 묻는다. 그 질문에 AI를 활용하기까지 하며 답변해보려던 다쿠토는 결국 그녀, 설계자인 마키나 사라를 만나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인 기사를 검토한 다쿠토는 맥스 클라인에게 수정사항을 보낸 뒤에 마키나 사라의 전기 쓰기에 몰두한다. '같은 것을 보는데도 전혀 다른 생각'(138)을 하는 인간들에게 재미를 느끼면서도 만일 다른 누군가가 마키나 사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늘리는 말을 할까봐 그 전에 자신이 전기를 써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맥스 클라인의 비난을 떠올리다 자기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70층 도서관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마저 전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득 도쿄도 동정탑 개축식날 등장해 축사를 한 사회학자 마사키 세토가 부정의 말을 잊어버리라고 주창한 것과, 그가 그날 집 마당에서 살해당한 일, 그 살해자가 했던 증언-마사키 세토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랬다는-을 곱씹는다. 시간이 늦었다는 걸 깨달을 즈음 지진인지 모르는 충격, 혹은 현기증을 느끼며 주춤하다가 순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순간 전화가 온다.

그 전화는 마키나 사라의 전화다. 도쿄도 동정탑이 지어진 뒤 건축 일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춘 그녀는 여전히 동정탑이 보이는 호텔에 칩거하고 있다. 그러나 다쿠토가 "가끔은 살아 있는 사람과 말하지 않으면 노이로제에 걸린다"(159)며 맥스 클라인과 인터뷰를 성사해준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이 인류의 평화나 존엄에 진지하게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누구에게도 그 일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임했을 뿐이고 결국 자기는 비난 받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고 앞으로 건축을 하게 된다면 진정한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영어 인터뷰가 번역의 다리를 건너다 왜곡되지는 않을지 AI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다가 영원히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무력한 말에 대한 피로함과 지겨움을 느껴 밖으로 나가 저녁을 때운다.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우중충한 저녁, 그녀는 탑을 바라보며 예전의 국립경기장이 그랬듯이 이번엔 탑이 질문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답이 무얼지 헤아리며 다가간 탑 입구에는 수많은 경비원과 경찰들이 서있다. 다쿠토에게 전화한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탑을 올려다보며 탑의 미래-전에는 그것이 앞으로 이 도시에 미칠 영향을 상상했다면 이번엔-그것이 파괴될 미래를 상상한다. 건축물처럼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수직으로 서 있는 자기는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상상한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어 곁을 지나가던 남자가 지금 자신을 영원히 서 있는 동상으로 만들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두 눈으로 탑을 바라보는 마키나 사라 동상은 뭐라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으나 자신을 가리키는 수많은 손가락들을 의식할 것이다. 그러는 채로, 영원의 끝이 도래하기까지 탑이 건네는 질문의 답을 생각하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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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트리플 25
서이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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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 서이제 (서평단 도서)

디지털 시대의 문법이 반영된 서이제의 소설을 좋아한다. 고작 단편 네다섯 편정도 읽었을 뿐이지만, 전부 감탄했다. 글이라는 아날로그 매체에 디지털 문법을 가져와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만의 감각을 나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곤 했다. 이번 소설집은 그 생각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번 소설집은 기억을 테마로 세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 소설 모두 세 인물이 등장한다.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누군가. 한때 친했던 사랑했던 너와 나는 어느새 멀어져 있다. 너와 멀어진 채 살던 현재의 화자는 너를 호출하는 어떤 단서를 발견하고서 너와 지냈던 과거를 회상한다. 표제작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는 오래 전 찍은 영화를, ‘이미 기록된 미래’는 오래 전 너가 썼던 카메라를, ‘진입/하기’는 너와 내가 오래 전 살던 공간을 통해 기억을 반추한다.

새롭다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들은 미래, 새로움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고 단지 과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빤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이상, 이 소설들은 마치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내가 어떻게 지금처럼 될 수 있었나를 나는 여기서 떠올렸다.

표제작은 영화 스크린을 연상시키는 네모 박스가 세 번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그 부분에 다다랐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구성이며 결말이 좋아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이미 기록된 미래’는 사람들은 잠든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진술을 앞에 두고 마지막에 너가 남긴 마지막 사진, 내가 마치 자고 있는 듯 눈 감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끝나는데, 화자의 공허함이 크게 와닿았다. 망우삼림이라는 소재는 너무 사기다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곳이라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

‘진입/하기’는 무언갈 추구하고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옛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화자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를 거니는 풍경은 내가 전에 살던 동네를 무용하게 거닐던 밤을 생각나게 했다. 나말고도 그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위안이 되는 일이다.

뒤에 실린 에세이는 길게 쓴 작가의 말 같았다. 처음엔 재밌다 하면서 읽었는데 뒤로 가선 이 세 편의 소설이 이런 기억과 약속을 통해서 탄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 구상하고 준비했는지를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설에서는 이야기를 감속하는 방식의 서술과, 인물들을 보호하는 화자의 서술이란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감속과 보호가 화자와 독자의 거리, 베일을 더욱 줄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스텔지어가 떠올랐다. 문득 불러일으켜지는 무언가. 특이한 건 노스텔지어가 디지털 도구 매체를 통한다는 거다. 그때 들었던 음악, 보았던 드라마, 영화, 했던 게임, 찍었던 사진, 지지직하던 티비 화면. 화자는 그런 것들을 마주한다. 버리지 않은 이상, 기억에서 잊어도 데이터는, 기록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디지털 시대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억이란 어떤가. 한없이 친했던 그 사람의 이름조차도, 중요한 사건도, 왜 멀어졌는지도 기억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은 그대로 남아있다. 기억은 디지털로 보충되고, 디지털은 기억을 토대로 나의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기억과 디지털이 만나는 기묘한 순간.

디지털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대에 살았던 세대는 그 당시 기술에 자신의 추억을 덧씌웠다. 저화질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어린 나. 저화질의 나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요즘 디지털 기술은 선명하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선명하고, 귀로 듣는 것보다도 생생하다. 지금 바로 내 기억에 저장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선명하다. 최근에 태어난 아이들이 미래에 어른이 되어서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남은 영상, 사진을 보고 그때를 우리처럼 그리워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십년 전의 내 모습이 담긴 마치 어제 찍은 것 같은 사진을 보고서 말이다. 그리움마저 탈색된다면 그들은 무얼 어떻게 되돌아볼 수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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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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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 마거릿 애트우드

애트우드의 9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전에 장편 <<눈먼 암살자>>를 읽으며 애트우드의 장르적 상상력과 인물의 인생을 빈틈없이 전개하는 노련함에 감탄을 한 적이 있어서 이 소설집을 읽고 싶었다. 이번 단편집은 노련하고 우아하고 재치있는 문체에 장르적 색체와 지금의 현실이 적절히 가미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루수스 나투라>를 제외한 모든 소설에 나이 든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의 육체는 전보다 쇠락해졌을지언정 영혼만큼은 과거보다 날카롭고 풍부하다. 회상을 하지만 회한으로 쏠리지 않고 후회하지만 지금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거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 견디고 참았던 일들을 지금은 참지 않고 맞선다. 현재는 과거를 복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걸까?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어간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에 있게 되는 걸까?

<알핀랜드>-<돌아온 자>-<다크 레이디>로 이어지는 연작은 판타지 대작 ‘알핀랜드’를 쓴 작가 ‘콘스턴스’의 이야기, 아니면 그녀의 과거 애인이자 개차반 시인 ‘개빈’-을 우아하게 까발리는-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알핀랜드’라는 판타지 소설의 탄생 비화와, 자신과 자신의 문학에 심취한 여성들을 착취했던 문인 개빈에 대한 우아한 폭로, 판타지 소설 내에 판타지스럽게 반영된 현실의 설정, 과거 그 문인에 엮였던 세 인물의 현재까지 정말 능수능란하게 엮여 있다.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인물을 동원하며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전하는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놀라워하면서 읽었다.

<동결 건조된 신랑>은 재치있고 섬뜩한 상상력이 놀랍고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은 지니아라는 여자에 대한 세 여자 주인공의 판단이 결말에 이르러 통쾌한 복수와 함께 뒤집혀서 재미있다. <<도둑 신부>>라는 장편에 이 네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해서 궁금해진다.

<죽은 손의 사랑>이 제일 흥미롭게 읽혔다. 자신의 월세를 대 준 동거인들에게 지금 집필 중인 소설이 발간되고 향후 나오게 될 이익을 (자신을 포함해) n분의 1 해서 나눠주겠다는 (기한 없는) 계약을 덜컥 해버렸는데, 그 소설이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된다면? 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야기. 이 설정도 흥미롭지만 잭이 집필한 <죽은 손의 사랑>이라는 소설도 재미있고, 소설 집필 과정이 현실의 맥락과 번갈아 적혀있는데, 그 속도감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계약을 따지기 위해 그 동거인들 한 명 한 명씩을 찾아간다니.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다.

표제작 <스톤 매트리스>는 다른 단편들에 비해 짧지만 강렬하고 화나고 또 으스스한 이야기다. 주인공 버나를-고등학생 시절 강간하고 임신시켜-망쳐버린 개차반 밥. 노년에 휴식을 위해 떠난 패키지 북극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밥에게 그녀가 가하는 복수는 섬뜩하지만, 밥이 가했던 일보다 그럴까?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 범죄 은폐가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마지막에 실린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이야기다. 앞선 이야기들에선 노년인 주인공들의 인생 이야기였다면 여기선 노년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잔인한 시선이 담겨있다. 양로원에 불을 질러 노인들을 서둘러 죽음으로 내몰려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다니. 정부는 각지의 기상-폭풍, 홍수, 화재-같은 문제에만 전력을 쏟는 듯하다. 젊은 시위대가 양로원에 불지르는 장면은 <루수스 나투라>라는 가장 짧은 단편에서 생김새 때문에 악마로 낙인 찍힌 주인공을 죽이러 오는 마을 사람들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사와 악마로 대표되는 선악이란 개념은 주로 스스로한테 부여하기보다도(이것도 나름 문제긴 한데) 타자로부터,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성되는 것 같다.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는 것인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 심해지고 문화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지금의 현실은 이 소설 같은 일이 그저 소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백히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대신 몰아내기를 택하게 만드는 사회는 그 테두리가 공고해질수록 속은 빈약해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인생을 읽어가는 재미가 압도적이고, 과거 사연과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여 이야기가 풍부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애트우드의 이야기는 훌륭한 식사를 한 것처럼 즐거운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서평단으로 제공 받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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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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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자아가 두 개로 쪼개진 금고 기술자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가 사는 지역의 하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소재를 전자는 파편화된 서사로, 후자는 역사적, 사회학적, 풍자적 맥락으로 구성하며 행간을 오가는데, 이게 기묘하다.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현실의 몇몇 일들이 연상될 정도로 구체적이니 뭐라 반박하기도 어렵고, 거기에 (쓴)웃음 짓는 사이에 서사는 조금씩 진전되니, 계속 읽을 수밖에.

뇌졸중으로 주인공은 왼쪽 몸만 살아남는다. 단점이 너무 크지만 장점도 있다. 기억력이 증대되고, 프랑스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육체적인 활동을 하면 좋아질 거라는 의사의 충고대로 그는 퇴원 후 공장으로 출퇴근하면서 하천을 거니는데, (불가해한 사건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천변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투사한다.

소설은 바람을 피우고도 뻔뻔하게 구는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하더니, 뒤에서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기에 이른다. 그의 고백은 내밀한 고백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비릿함을 제거한 고깃덩어리를 보여주는 것처럼 냉정하다.

그는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카롤린이라는 여자를 화마에 휩싸인 숲에 두고 도망갔으며, 금고 제작 일을 하기 전까지 도둑질을 일삼았고, 장모가 살해되는 일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떤 젊은이의 금고 내부를 도둑질해 거기서 빼낸 부동산 정보로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놓고 보면 그가 자신의 죄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다가 뇌졸중이라는 신의 심판을 받은 거구나, 하고 이야기가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금고 기술자처럼 표현하자면 조물주가 ‘그’라는 이름의 금고(뇌)에 심어둔 기폭장치를 작동시킨 것이라고. 신은 그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영원히 반복되는 듯한 10키로미터의 하천을 끊임없이 걸으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아내를 의심하며 자신이 만든 두 개의 금고(러시아인형처럼 하나가 하나의 안에 있는 구조)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아내에게 제공할까를 고민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서둘러 소진하도록 결정한 것이라고. 마치 시시포스에게 부과한 운명 같다. 그보다는 좀 더 시시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가 신의 심판으로 ‘쪼개진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봐야 한다. 그리고 그가 쪼개져 왼편을 차지한 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그가 집에 만들어 둔 금고, 아내가 그토록 열고 싶어 집착하는 금고(그녀는 금고가 하나뿐인 줄 안다)를 두고 그는 그 안에 심어둔 기폭장치를 발동시킬지, 유언장과 이혼신고서 중 무엇을 온전하게 둘 것인지 등을 고민한다. 그런데 그 고민은 신이 아니고서야 감히 할 수 없는 고민처럼 보인다. 그가 그 안에 남겨둔 종이 쪼가리와 다이아 반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질 아내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사위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게 더 값어치 있을지, 어떤 선택을 해야 그녀가 후회할지, 그녀가 자신 없이도 이 재산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지, 어떻게 해야 이 생활이 더 윤택해질지 하여튼 별걸 다 고민하는데, 아내는 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다. 신이 인간을 두고 하는 게 이런 놀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아내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여태껏 저질렀던 죄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선택-그 중 죄악에 속할 만한 것들을 오른쪽의 몸에 쉥거, 자신에게 복수할 거라던 친구의 이름을 투영해서 은근슬쩍 떠넘기려고 한다. 그렇게 현실의 모든 짐을 벗어 던지려는 그의 의도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현실에 대해 어떤 책임도 떠맡지 않으려는 신처럼 보인다.

나는 그 신의 이름이 ‘선’이라고 의심된다. 만일 내면의 악이 깨끗이 분리되기만 하면 그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에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어서 결코 구분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찾아든 뇌졸중은 그의 자아를 둘로 쪼개지게 했다. 하나가 둘로 쪼개짐으로써 최소한의 판가름 기준이 생겼고, 그는 임의로 한쪽을 선의 영역에, 다른 쪽을 악의 영역에 둘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과 악에 좀 더 유식해졌을 뿐이다. 그 쪼개진 둘이 모여야 ‘그’를 이룬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쪼개진 둘이 한데 모인 육체가 비록 게다리 걸음일지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신을 흉내 내는 인간이며, 지킬과 하이드 같은 이중인격이 아니라, 동시이중인격인 것이다.

하지만 천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소녀(그는 소녀에게 카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그의 죄를 또렷하게 상기시킨다. 죽은 줄 알았던 죄가, 기억 속에 남은 줄만 알았던 죄가 살아움직이는 걸 또렷이 본 것이다. 그것도 그의 삶 주위에서.
그는 그녀를 위한 금고를 만듦으로써 속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몸은 온전치 못하고, 그나마 믿을 만한 후임 아마드에게 맡겨보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금고 제작을 포기한다.
그는 결국 직접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녀(속죄)를 향한 그의 때늦은 갈구. 온 생의 비루함을 떨쳐내고 천국의 문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몸부림. 하지만 그녀가 그를 피해 하천을 건너버림으로써, 또 그가 하천에 처박혀 척추마저 손상되어 식물인간이 됨으로써 제대로 실패하고 만다.
실패 후 쉥거는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아내마저도 그를 방문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지만 그의 몸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는 모든 감각을 또렷이 느끼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죽은 뒤에도 그의 혼은 전과 마찬가지로 쉥거와 아내에 대한 미련을 보인다. 하지만 자기가 죽었음을 상기하고는 생의 모든 미련을 버리게 된다.
비로소 죽음이 그를 악이 제거된 선의 영혼으로,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제 무덤 주위를 떠돌고 있는 이 신은 그저 유령 같기도 하다.

ps. 선과 악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뿐이지 이 소설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정말 많다. 하천의 상징적 의미와 상류와 하류의 구분, 죽음에 대한 사유, 금고에 집착하는 이유 등등… 그것을 하나로 아울러 말할 수 없음이 이 작품의 깊이와 의미를 보증하는 것 같다.
(현대문학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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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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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오던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재난은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웅장하고 범상치 않게 등장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그림자에 슬며시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 거라고
그렇게 장악하는 거라고
뉴스를 보며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었다

신종 변이, 40도가 웃도는 기온, 해수면 상승, 뜨거운 태풍, 국지전, 새로운 정부 등이 세계를 이루는, 현재도, 그렇다고 완전한 미래도 아닌 이장욱의 세계에서 연과 천은 각자 모수와 한나를 회상하며 끊임없이 뒷걸음질 친다. 기록하는 모수와 연기하는 천, 중얼거리는 연과 혼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나. 그들이 모인 무도의 해변여관. 나아가지 않는 이야기, 닫혀버린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유령처럼 떠돈다. 누군가의 말이 다른 누군가의 말로 뒤바뀌는 돌림노래 같은 중얼거림을 듣다보면 나도 그들을 따라서 중얼거리게 된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가자고. 떠난 이들과 남겨진 이들, 그리고 사라지는 이들이 남기는 쓸쓸함이 바닷바람처럼 코끝으로 몰려온다. 그걸 맡으니 뭐든 상관없어진다.

인물들을 느리게 조망하는 시선이 마지막에 이르러 뜨겁고 황량한 바다를 향하는 순간, 나도 거기서 조용히 그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다가 아닌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이야기. 생성이 아닌 침잠의 이야기. 생성되다가도 어느 순간 침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재난 이후가 아닌 그들의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해야만 한다.

뒤에 실린 양윤의 평론가의 해설이 신비롭다. 실수와 허수의 개념으로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이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수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적혀 있다. 시간이란 허수의 차원이구나 하는 깨달음. 허수처럼 살게 되는, 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고 싶다. 세상은 비워지더라도 결국에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로 다시금 차오른다.

*현대문학으로부터 책을 제공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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