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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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 마거릿 애트우드

애트우드의 9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전에 장편 <<눈먼 암살자>>를 읽으며 애트우드의 장르적 상상력과 인물의 인생을 빈틈없이 전개하는 노련함에 감탄을 한 적이 있어서 이 소설집을 읽고 싶었다. 이번 단편집은 노련하고 우아하고 재치있는 문체에 장르적 색체와 지금의 현실이 적절히 가미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루수스 나투라>를 제외한 모든 소설에 나이 든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의 육체는 전보다 쇠락해졌을지언정 영혼만큼은 과거보다 날카롭고 풍부하다. 회상을 하지만 회한으로 쏠리지 않고 후회하지만 지금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거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 견디고 참았던 일들을 지금은 참지 않고 맞선다. 현재는 과거를 복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걸까?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어간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에 있게 되는 걸까?

<알핀랜드>-<돌아온 자>-<다크 레이디>로 이어지는 연작은 판타지 대작 ‘알핀랜드’를 쓴 작가 ‘콘스턴스’의 이야기, 아니면 그녀의 과거 애인이자 개차반 시인 ‘개빈’-을 우아하게 까발리는-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알핀랜드’라는 판타지 소설의 탄생 비화와, 자신과 자신의 문학에 심취한 여성들을 착취했던 문인 개빈에 대한 우아한 폭로, 판타지 소설 내에 판타지스럽게 반영된 현실의 설정, 과거 그 문인에 엮였던 세 인물의 현재까지 정말 능수능란하게 엮여 있다.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인물을 동원하며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전하는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놀라워하면서 읽었다.

<동결 건조된 신랑>은 재치있고 섬뜩한 상상력이 놀랍고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은 지니아라는 여자에 대한 세 여자 주인공의 판단이 결말에 이르러 통쾌한 복수와 함께 뒤집혀서 재미있다. <<도둑 신부>>라는 장편에 이 네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해서 궁금해진다.

<죽은 손의 사랑>이 제일 흥미롭게 읽혔다. 자신의 월세를 대 준 동거인들에게 지금 집필 중인 소설이 발간되고 향후 나오게 될 이익을 (자신을 포함해) n분의 1 해서 나눠주겠다는 (기한 없는) 계약을 덜컥 해버렸는데, 그 소설이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된다면? 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야기. 이 설정도 흥미롭지만 잭이 집필한 <죽은 손의 사랑>이라는 소설도 재미있고, 소설 집필 과정이 현실의 맥락과 번갈아 적혀있는데, 그 속도감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계약을 따지기 위해 그 동거인들 한 명 한 명씩을 찾아간다니.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다.

표제작 <스톤 매트리스>는 다른 단편들에 비해 짧지만 강렬하고 화나고 또 으스스한 이야기다. 주인공 버나를-고등학생 시절 강간하고 임신시켜-망쳐버린 개차반 밥. 노년에 휴식을 위해 떠난 패키지 북극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밥에게 그녀가 가하는 복수는 섬뜩하지만, 밥이 가했던 일보다 그럴까?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 범죄 은폐가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마지막에 실린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이야기다. 앞선 이야기들에선 노년인 주인공들의 인생 이야기였다면 여기선 노년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잔인한 시선이 담겨있다. 양로원에 불을 질러 노인들을 서둘러 죽음으로 내몰려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다니. 정부는 각지의 기상-폭풍, 홍수, 화재-같은 문제에만 전력을 쏟는 듯하다. 젊은 시위대가 양로원에 불지르는 장면은 <루수스 나투라>라는 가장 짧은 단편에서 생김새 때문에 악마로 낙인 찍힌 주인공을 죽이러 오는 마을 사람들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사와 악마로 대표되는 선악이란 개념은 주로 스스로한테 부여하기보다도(이것도 나름 문제긴 한데) 타자로부터,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성되는 것 같다.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는 것인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 심해지고 문화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지금의 현실은 이 소설 같은 일이 그저 소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백히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대신 몰아내기를 택하게 만드는 사회는 그 테두리가 공고해질수록 속은 빈약해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인생을 읽어가는 재미가 압도적이고, 과거 사연과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여 이야기가 풍부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애트우드의 이야기는 훌륭한 식사를 한 것처럼 즐거운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서평단으로 제공 받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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