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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ㅣ 트리플 25
서이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6월
평점 :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 서이제 (서평단 도서)
디지털 시대의 문법이 반영된 서이제의 소설을 좋아한다. 고작 단편 네다섯 편정도 읽었을 뿐이지만, 전부 감탄했다. 글이라는 아날로그 매체에 디지털 문법을 가져와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만의 감각을 나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곤 했다. 이번 소설집은 그 생각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번 소설집은 기억을 테마로 세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 소설 모두 세 인물이 등장한다.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누군가. 한때 친했던 사랑했던 너와 나는 어느새 멀어져 있다. 너와 멀어진 채 살던 현재의 화자는 너를 호출하는 어떤 단서를 발견하고서 너와 지냈던 과거를 회상한다. 표제작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는 오래 전 찍은 영화를, ‘이미 기록된 미래’는 오래 전 너가 썼던 카메라를, ‘진입/하기’는 너와 내가 오래 전 살던 공간을 통해 기억을 반추한다.
새롭다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들은 미래, 새로움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고 단지 과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빤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이상, 이 소설들은 마치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내가 어떻게 지금처럼 될 수 있었나를 나는 여기서 떠올렸다.
표제작은 영화 스크린을 연상시키는 네모 박스가 세 번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그 부분에 다다랐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구성이며 결말이 좋아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이미 기록된 미래’는 사람들은 잠든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진술을 앞에 두고 마지막에 너가 남긴 마지막 사진, 내가 마치 자고 있는 듯 눈 감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끝나는데, 화자의 공허함이 크게 와닿았다. 망우삼림이라는 소재는 너무 사기다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곳이라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
‘진입/하기’는 무언갈 추구하고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옛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화자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를 거니는 풍경은 내가 전에 살던 동네를 무용하게 거닐던 밤을 생각나게 했다. 나말고도 그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위안이 되는 일이다.
뒤에 실린 에세이는 길게 쓴 작가의 말 같았다. 처음엔 재밌다 하면서 읽었는데 뒤로 가선 이 세 편의 소설이 이런 기억과 약속을 통해서 탄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 구상하고 준비했는지를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설에서는 이야기를 감속하는 방식의 서술과, 인물들을 보호하는 화자의 서술이란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감속과 보호가 화자와 독자의 거리, 베일을 더욱 줄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스텔지어가 떠올랐다. 문득 불러일으켜지는 무언가. 특이한 건 노스텔지어가 디지털 도구 매체를 통한다는 거다. 그때 들었던 음악, 보았던 드라마, 영화, 했던 게임, 찍었던 사진, 지지직하던 티비 화면. 화자는 그런 것들을 마주한다. 버리지 않은 이상, 기억에서 잊어도 데이터는, 기록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디지털 시대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억이란 어떤가. 한없이 친했던 그 사람의 이름조차도, 중요한 사건도, 왜 멀어졌는지도 기억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은 그대로 남아있다. 기억은 디지털로 보충되고, 디지털은 기억을 토대로 나의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기억과 디지털이 만나는 기묘한 순간.
디지털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대에 살았던 세대는 그 당시 기술에 자신의 추억을 덧씌웠다. 저화질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어린 나. 저화질의 나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요즘 디지털 기술은 선명하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선명하고, 귀로 듣는 것보다도 생생하다. 지금 바로 내 기억에 저장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선명하다. 최근에 태어난 아이들이 미래에 어른이 되어서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남은 영상, 사진을 보고 그때를 우리처럼 그리워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십년 전의 내 모습이 담긴 마치 어제 찍은 것 같은 사진을 보고서 말이다. 그리움마저 탈색된다면 그들은 무얼 어떻게 되돌아볼 수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